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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관련]]찬양을 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09.02.01|조회수120 목록 댓글 0

찬양을 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

너무나 자주하고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아야 한다. 또 자주하는 것일수록 본래적 방향을 잃고 형식적으로 흘러가기 쉽다. 더 조심할 일은 그것이 사단의 중요한 통로가 된다면 더더욱 주의해야 마땅하다. 그런 것들 중에 예배나 찬양(음악)은 대표적인 일이다.

사실 성도의 생활 가운데 찬양만큼 많이 하는 것도 드물다. 어떨 때는 하루 종일 찬송가를 입에 달고 살 때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찬양하고 있는 것조차 모를 때도 많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불러 대고, 세상적인 풍으로 편곡을 하여 흥얼거리기도 한다. 문제는 지금 찬양이 찬양답지 못하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찬양의 축복을 완전 놓치고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지적하거나 바로 잡아주는 자도 없다. 특히 바른 기준을 배워야할 렘넌트들에겐 더욱 시급하다. 사실 우리의 찬양 방법들은 거의 99%가 세상적이며 마귀적인 것들이다. 학교에서 배웠던 음악의 기준이 그렇다. 우리의 찬양은 거의가 사람을 중심한 음악이요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아니다. 인간으로 하나님처럼 영광 받게 해 주겠다는 것은 사단의 가장 오래된 속임수다. 바로 하와가 최초로 꼬임을 받았던 메시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찬양자로 지음을 받았기에(사43:21) 당연히 풍부한 음악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창 3장 때문에 그 방향과 대상, 방법과 가치를 모를 뿐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찬양의 잣대는 은혜스러운가 하는 기준이다. 은혜스럽게 들리면 좋은 찬양으로 평가한다. 그럼 그 은혜스런 기준은 누구의 입장인가? 성도들의 감정이나 목사님의 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귀와 감정인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시94:9“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하셨다. 찬양은 하나님만이 평가하시고 판단하실 자격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찬양할 ! 사명 밖에는 없다.

1.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그분으로 구원을 얻었으며, 또 그의 절대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제마다 존재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성경은 모든 피조물들의 공통된 기본적 사명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것이 시편 전체에 나타나는 중요한 메시지요, 특히 시148편에 강조되어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은 물론이요, 하늘과 땅과 물도 찬양해야 하며, 우박과 눈과 안개와 심지어 바다의 용들도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하셨다. 그렇다. 모든 피조물들은 전능자의 지혜와 명철로 지음 받은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창조주께 영광과 존귀를 드려야 마땅하다. 자신들을 창조하신 그 기묘한 솜씨, 어떤 존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천지에 뛰어난 작품으로 빚어주신 그분께 영원히 영광과 존귀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시148:13).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들을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입히시고 먹이시고 보존하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깊은 산속의 이름 모를 풀 한포기, 새 한 마리, 저 깊은 바다 속의 작은 물고기까지도 돌보시고 간섭하신다. 햇빛과 비를 주시고, 적절한 온도와 공기며 철따라 아름다운 색깔의 옷들로 갈아입히신다. 더더욱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지위로 창조되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구약시대의 찬양은 특히 창조주를 찬양하는 일에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한 구속의 완성으로, 찬양은 훨씬 구원의 은혜와 그 축복에 대한 내용으로 강조되고 있다.(엡1장, 벧전1장…). 물론 신약시대에는 엄청난 핍박과 박해 때문에 찬양이 개인화로 깊어지는 현상을 보이지만, 바울 서신을 보면 어느 한 구절을 떼어내어도 훌륭한 찬양 가사가 될 만큼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식물이 태양을 바라보아야만 생존이 가능하듯, 인간은 하나님을 앙망하고 가까이 하는 것이 최상의 축복을 누릴 창조의 원리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보라. 세상에서도 음악 하는 자들이 어떤 명예와 존귀를 누리는가? 어떤 권력자, 재벌도 부럽지 않을 만큼 복된 삶을 살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그런 대접을 받기에는 나이도, 실력도, 기능도 많이 부족하지만 가는 곳마다, 남녀노소, 피부색깔,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찬양자들에게 그 이상의 은혜를 주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찬양을 주신 참 목적이 무엇이며, 왜 기독교는 이렇게 찬양이 풍성한지를 빨리 깨달으면 찬양을 가지고도 다윗처럼 온 땅에 여호와를 선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복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 세상 현장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임마누엘의 비밀을 누려야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찬양만큼 선입견, 편견, 착각이 많은 것도 드물다. 그만큼 음악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으나 무지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찬양에 대한 올바른 배움이 없었기 때문이요, 더 큰 원인은 세상에서 배운 음악적인 모든 지식들이 사단의 배경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의 본질을 모르면 평생 선입견과 편견, 착각 속에 살게 되며,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과 그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혼란을 심어주게 된다. 세상 음악이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나 그 속에는 엄청난 영적 문제와 고통들을 품고 있다(사14:12-20). 이유는 찬양의 본질을 모르고 사단의 음악전략에 빠져 속기 때문이다.
원래 찬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적 호흡으로 주신 선물이다(시150:6). 창3장과, 4, 6, 11장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든든히 묶어주는 임마누엘의 강한 밧줄 같은 기능으로 주신 언어이다. 그런데 사단이 창3장을 통하여 그 축복된 끈을 끊어 버린 것이다. 복음을 아무리 들어도 현장의 영적 사실, 곧 세상과 불신자 상태를 사실적으로 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이 성경책을 가지고도 율법주의, 인본주의로 흘러 계속 전쟁, 포로, 노예, 속국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받고도 음악의 현장을 모르면 찬양의 본질은 놓치고 기능과 음악적인 법에 매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는 세상적인 음악법이나 기능을 강조하지 않았다. 소홀하지는 말아야겠지만 그것들이 참 찬양이 되는데 결코 기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찬양, 그분과 교제가 되어지는 찬양이라면 음치 같은 찬양도, 혹은 벙어리의 노래도 최상의 찬양이 된다. 임마누엘의 비밀이 없는 찬양은 아무리 기능과 기교가 뛰어나며, 음정 박자가 정확해도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또 모든 사람을 열광케 하고 칭찬과 박수와 앙코르가 쏟아져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찬양이라면 마귀 음악 밖에는 되지 못한다. 성도는 천국에서 파송된 스파이(Spy 히11:13) 신분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과 가장 잘 통하는 찬양의 암호(?)만 정확하면 다윗처럼 어떤 멸망의 현장도 넉넉히 뛰어넘어 만민 앞에 승리의 깃발을 흔들 응답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성경적 찬양 기준을 바로 하여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참 찬양의 비밀을 회복하자.

3. 하나님은 나를 인류 역사상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악기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악기라는 사실이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만물보다 뛰어난 악기요,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악기다. 로마서 6:13에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병기’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의미로도 번역할 수 있다고 여러 주경신학자들이 주석하였다. 우리 몸을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자랑하는 악기로서 그분께 드려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배와 경배자로서의 삶을 말씀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선전할 전도자의 사명을 명시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악기로서,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며, 유일무이한 그의 빛을 선전하는 악기로 살아가야 할 사명자이다(벧전2:9). 그래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도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이라고 하지 않았던가?(고전10:31)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찬양의 기능이 부족하다고 찬양을 게을리 하거나 아예 기피한다. 그것은 큰 불신앙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라. 수많은 악기들이 함께 다양한 소리를 낼 때, 얼마나 더 풍성하고 멋진 하모니를 만드는가? 바이올린이란 악기와 비올라라는 악기는 생김새와 음색도 비슷하다. 그러나 약간 다른 음역의 소리를 내면서 멋진 앙상블을 연출한다. 혼자 소리를 내면 소음에 불과할 것 같은 큰북, 작은 북, 또는 심벌즈 같은 타악기들도 교향악을 연주할 때는 다른 악기들로는 도무지 대체할 수 없는 효과음을 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너무 세상의 음악적 기준(사실은 사단의 속임수이기도 한)에 속아서 최고 장인(匠人)의 손길로 빚어낸 악기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여 찬양의 축복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나 혼자만 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찬양 소리를 듣기 원하신다. 그래서 모든 유일한 악기들이 한 하모니로 하나님께 영광 드리기를 기뻐하신다. 나의 악기를 멈추면 우주의 음악은 그만큼 불완전한 화음으로 들리게 된다.

그래서 종일, 평생, 항상(시35:28, 104:33) 찬양하도록 명하셨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연주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소리를 낼 수 없지만, 하나님이 친히 연주하시면 완벽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것이 성령 충만이요, 또 성경 말씀에 기준한 찬양이다. 지금껏 자신을 위한 찬양이었기에 음악적, 기능적으로 많은 노력과 준비가 필요했으나, 하나님이 연주하시도록, 말씀의 기준을 따른다면 천상의 소리를 낼 것이다. 오늘도 최고의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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