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에 나타난 찬양원어의 의미 / 야다(Yada), 토다(Towdah), 바락 (Brak)
좀 더 구체적으로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율동에 드러난 문제점을 세가지로 요약해 본다.
1)율동은 정의가 볼확실하지만 몸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자연스런 춤`이다.
유아교육과가 설치되어있는 대학에서의 율동에 대한 정의는 음률활동으로 창의력 신장, 정서적 반응, 지능발달을 도움, 언어발달을 도움, 신체발달을 도움, 사회성발달을 도움 등으로 매우 선명하고 분명한 교육의 목표와 정의가 내려져 있다. 반면에 교회에서 수년동안 사용되어 오는 율동은 그 정의가 분명하지 않다. 사회교육보다 더 정교하고 분명해야 할 교회에서 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쉽다. 지금이라도 당장 서점에 나가 율동책들을 훑어보면, 각 사람마다 어쩜 그렇게 율동에 대한 정의가 분분한 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율동은 성서적으로 조명하지 않았지만 몸찬양은 성서의 `춤`에 배경을 두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프로그램은 성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예배가 그러하고 기도, 헌금, 봉사 이 모든 것이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율동은 성경적인 해석 없이 무작정 어린이들이 좋아한다는 단 하가지 이유로 지금까지 약 30여 년간 사용되어 왔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말이다. 몸찬양은 성서에 기록된 `춤`이라는 말으 frmsrj로 한다. 성경에는 구약에 21회, 신약에 5회, 모두 26회 `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형태로 기록된 것은 모두 9회이다.
3)율동은 어린이에 국한되어 있지만 몸찬양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가능하다.
교회 안에 활용되어 온 율동은 어린이들에게 국한되어 있다. 어른들에게 함께 따라하시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어른들은 유치하고 멋 적어서 따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몸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기에 누구나 다 잘 표현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地位高下를 막론하고 기쁘면 손을 들고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어화둥둥 사위 춤을 추기도 한다. 억지로 주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즐거운 경사가 생겨나면 누구나 그렇게들 자발적으로 표현하길 즐겨한다. 몸찬양은 목사님도 장로님도 누구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찬양은 언제나 실제상황이다. 더구나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고 놀라운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생각해 낸다면 이 세상에 그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있겠는가? 경건을 가장하여 얌전한 듯 가만히 있을 겨를이 없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 우리 마음 속에 임 불붙는 감격을 어찌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쉽게 하나님을 향한 몸짓을 표하지 않는 나쁜 숩관에 젓어있다. 사람들은 한국적 정서를 핑계삼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쉽게 몸짓을 따라하지 않으려 하지만 잔치 집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행위는 다 핑계인 것이다.
그것은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몸으로 적극적인 찬양을 할 때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윗의 아내이며 사울의 딸이었던 미갈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여호와 앞`에 있는 다윗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신하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왕에게 바가지를 긁음으로 미갈은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매한가지이다.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며 그 관심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요구된다. 그런데 손을 들다 말고 옆에 앉아있는 친구에게 신경이 쓰여 다시 들던 손을 내린다거나, 적극적으로 열심히 박수를 치다가 옆에 앉은 성도가 의식되어 스스로 찬양을 절제한다면 미갈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무서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강습회나 혹은 찬양세미나에서 참석자들에게 가끔 물어보는 일이 있다. “혹시 지금 교회에서 `야다`의 방법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부답의 표정을 짓는다. 그럼 저는 예를 든다. “주일 낮 예배에서 경배찬양 드릴 때 일어섰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까?” 사람들은 그 제사 “아하!” 하는 표정으로 이미 삶 속에서 `야다`의 찬양 행위를 이루어 왔음을 확인한다.
그렇습니다. `야다, 토다, 바락`은 현대인들에게 예배 중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표현되는 액션들이다. 또한 이에서 파생된 한 형태로 `몸찬양`, `워십댄싱` `선교무용`등이 적용되고 있다.
“야다”를 사용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야다)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야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백성으로 더불어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야다)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20:21)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인생에게 향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야다)할 지어다.(시107:8,15,21,31)
담당: 박연훈 목사님 (프레이즈음악신학교 학장)
좀 더 구체적으로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율동에 드러난 문제점을 세가지로 요약해 본다.
1)율동은 정의가 볼확실하지만 몸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자연스런 춤`이다.
유아교육과가 설치되어있는 대학에서의 율동에 대한 정의는 음률활동으로 창의력 신장, 정서적 반응, 지능발달을 도움, 언어발달을 도움, 신체발달을 도움, 사회성발달을 도움 등으로 매우 선명하고 분명한 교육의 목표와 정의가 내려져 있다. 반면에 교회에서 수년동안 사용되어 오는 율동은 그 정의가 분명하지 않다. 사회교육보다 더 정교하고 분명해야 할 교회에서 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쉽다. 지금이라도 당장 서점에 나가 율동책들을 훑어보면, 각 사람마다 어쩜 그렇게 율동에 대한 정의가 분분한 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율동은 성서적으로 조명하지 않았지만 몸찬양은 성서의 `춤`에 배경을 두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프로그램은 성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예배가 그러하고 기도, 헌금, 봉사 이 모든 것이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율동은 성경적인 해석 없이 무작정 어린이들이 좋아한다는 단 하가지 이유로 지금까지 약 30여 년간 사용되어 왔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말이다. 몸찬양은 성서에 기록된 `춤`이라는 말으 frmsrj로 한다. 성경에는 구약에 21회, 신약에 5회, 모두 26회 `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형태로 기록된 것은 모두 9회이다.
3)율동은 어린이에 국한되어 있지만 몸찬양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가능하다.
교회 안에 활용되어 온 율동은 어린이들에게 국한되어 있다. 어른들에게 함께 따라하시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어른들은 유치하고 멋 적어서 따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몸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기에 누구나 다 잘 표현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地位高下를 막론하고 기쁘면 손을 들고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어화둥둥 사위 춤을 추기도 한다. 억지로 주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즐거운 경사가 생겨나면 누구나 그렇게들 자발적으로 표현하길 즐겨한다. 몸찬양은 목사님도 장로님도 누구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찬양은 언제나 실제상황이다. 더구나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고 놀라운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생각해 낸다면 이 세상에 그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있겠는가? 경건을 가장하여 얌전한 듯 가만히 있을 겨를이 없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 우리 마음 속에 임 불붙는 감격을 어찌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쉽게 하나님을 향한 몸짓을 표하지 않는 나쁜 숩관에 젓어있다. 사람들은 한국적 정서를 핑계삼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쉽게 몸짓을 따라하지 않으려 하지만 잔치 집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행위는 다 핑계인 것이다.
그것은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몸으로 적극적인 찬양을 할 때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윗의 아내이며 사울의 딸이었던 미갈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여호와 앞`에 있는 다윗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신하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왕에게 바가지를 긁음으로 미갈은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매한가지이다.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며 그 관심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요구된다. 그런데 손을 들다 말고 옆에 앉아있는 친구에게 신경이 쓰여 다시 들던 손을 내린다거나, 적극적으로 열심히 박수를 치다가 옆에 앉은 성도가 의식되어 스스로 찬양을 절제한다면 미갈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무서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강습회나 혹은 찬양세미나에서 참석자들에게 가끔 물어보는 일이 있다. “혹시 지금 교회에서 `야다`의 방법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부답의 표정을 짓는다. 그럼 저는 예를 든다. “주일 낮 예배에서 경배찬양 드릴 때 일어섰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까?” 사람들은 그 제사 “아하!” 하는 표정으로 이미 삶 속에서 `야다`의 찬양 행위를 이루어 왔음을 확인한다.
그렇습니다. `야다, 토다, 바락`은 현대인들에게 예배 중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표현되는 액션들이다. 또한 이에서 파생된 한 형태로 `몸찬양`, `워십댄싱` `선교무용`등이 적용되고 있다.
“야다”를 사용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야다)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야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백성으로 더불어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야다)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20:21)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인생에게 향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야다)할 지어다.(시107:8,15,21,31)
담당: 박연훈 목사님 (프레이즈음악신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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