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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관련]]경배, 아름다움, 거룩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1.09.15|조회수207 목록 댓글 1
경배, 아름다움, 거룩
- Worship, Beauty, Holiness -

켐벨 몰간 著 / 권오현 譯

"오,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시편 96:9)
본문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단어는 "아름다움(beauty)"입니다.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  그 적용에 있어서 이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단어가 갖는 매력이 이 단어의 배경을 고찰하게 합니다. 이 같은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이 단어가 암시하는 바와 그 중요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이 특별한 단어[역자 註 : 하다라]는 성경에서 단지 5번만 쓰였습니다. 한번은 잠언 14:28에서 "영예(honor)"로 번역되었고, 또 한번은 역대상 16:29에서 궤(ark)가 오벳에돔의 집에서 성막의 안식처로 옮겨질 때 불려진 시편에서 쓰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역대하에서 여호사밧이 군대 앞에서 노래하며 나아가는 자들을 배치하는 이야기에서 나옵니다(대하 20:21). 거기서 그들은 "거룩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시편 29편에서 쓰였고(시 29:2),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다소 드물게 쓰인 단어입니다. 영어 단어 "beauty"는 번역에서 이 단어의 참된 의미를 거의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장식으로서가 아닌 본질적인 가치, 곧 고유의 특성으로서 영예(honor) 혹은 영광(glory) 혹은 아름다움(beauty)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되셨을 때, 그 변모는 하늘로부터 빛이 그분 위를 비춘 것이 아니었으며, 내가 감히 믿는 바로는 그분의 신성이 빛난 것도 아니었으며, 그분의 인성의 완전함과 본질적 영광으로부터 비추어 나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목격자들은 그분의 옷이 빛처럼 희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읽을 때, 그것은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그곳에서 밝히 드러난 그분의 성품의 본질적인 영광으로 인하여 옷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단어 "아름다움"에서와 같이, 그 사상은 고유의 특성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장식이 아니며, 밖에서 온 것 같이 씌우는 것도 아니며, 눈에 밝히 드러나는 것이며, 그 자체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로서 감정과 생각에 호소하는 것이며, 또한 본질적으로 우리가 접촉하게 되는 사실에 속해 있습니다. 본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를 드리라고 요구하는 외침이며, 따라서 부수적으로 경배의 참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단어는 오직 한 번 잠언에서 이러한 동일한 배경과는 다르게 쓰였습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구절에서 이 단어는 모두 경배와 거룩에 관련됩니다.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

이들 단어는 시편기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호소하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깨달으라고 외치며, 그분의 권능과 위엄을 생각하라고 외치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들에 대해 그분께 찬양을 드림으로 응답하라고 권하는 언어 가운데 있습니다.

경배
그같이 시적이고 아름다움이 충만한 외침 가운데 경배와 경배의 조건과 영광의 깊은 의미에 대한 계시가 있습니다.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 경배는 가장 최고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배해야 하나요? 바로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입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곳마다, 그 아름다움은 거룩의 산물입니다. 당신이 거룩의 산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곳마다, 그 아름다움은 자체가 향기이며, 경배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경배를 드리려 시도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 삶은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경배란 무엇인가요? 이 단어의 본질적이며 단순한 의미, 근본적인 의미는 '엎드려 절하기'를 뜻합니다. 경배는 왕좌를 인식하고, 탁월함을 인식하는 태도를 시사합니다. 경배는 삶을 주관하시고 복종케 하시는 분의 존전에서 절대적인 공경(reverence)의 낮은 자리를 취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경배는 힘이 넘치는 단어로서, 우리를 강권하며, 우리에게 공경의 태도를 강요합니다.

"경배"란 단어는 성경 전체에 걸쳐 등장하며, 경배의 사상은 성경의 처음에서 끝까지 발견됩니다. 경배의 사상은 사람의 편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인식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충족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인식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찾는다는 고백입니다. 경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확신을 말로써 답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만이 내 삶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 있지 않을 때에는 내 안에는 어느 곳도 완전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나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의 필요의 공급원이라는 생각과, 나의 전 생애가 오직 그분과의 관계에서 그 절정과 전성기를 찾으며 채워진다는 생각이 경배의 행위와 태도를 만듭니다. 경배의 태도는 바로 왕 되신 분 앞에 굴복하는 복종의 태도입니다. 경배의 태도는 아이가 모든 사랑을 아버지께 드리는 태도입니다. 경배의 태도는 목자이신 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분께서 정해주신 목초지에 만족해하는 양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하는 태도입니다.

경배의 절정은 결코 번역된 적이 없는 두 단어를 사용한 표현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데, 그 두 단어는 성경의 쪽과 교회의 일상 언어 가운데 원어로 있는 "할렐루야(Hallelujah)" 와 "아멘(Amen)"입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온 존재로 이 두 단어를 말하는 것을 배웠을 때, 나는 곧바로 경배의 정점(頂点)과 내 삶의 가장 충만한 실제화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온 백성은 아멘 할지어다(시 67:5; 106:48)." 이윽고 하나님의 장서(Divine library)의 끝을 지나게 될 때(역자 註 : 계시록), 나는 하늘에서 "큰 무리가...말하기를, '할렐루야', 그리고 두 번째 말하기를 '할렐루야'하니"라는 소리를 듣는데, 이에 대한 가장 위대한 응답은 바로 "아멘"입니다. 아멘은 그분의 뜻에 대한 응답이며, 할렐루야는 찬양의 희생입니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그것이 단지 진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형제여, 나는 여러분 중 누구와도 같이 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오, 나의 혼이여, 그대는 하나님께서 통치와 수단과 섭리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시다는 깊고 심오한 확신의 기초 위에, 그분께 "아멘"이라고 말씀드리는 법을 배웠는가? 당신은 비췸을 받지 못한 혼의 시끄러운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 안에 거하는 마음의 고요한 표현으로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경배이고, 그것은 삶입니다.

제 2의 경배에 관해서는 그것을 언급하고 인식하는 정도 외에는 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은 신성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와 충족하심을 찬양하는 찬양의 노래, 기도가 모든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자원임을 확신하기에 그 부담을 쏟아놓는 기도, 고요히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쏟는 묵상 : 이러한 것들이 경배의 외적 행위이며, 이러한 찬양과 기도와 묵상 뒤에는 위대한 인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으며, 그것은 나의 전 생애를 그분께 맡기는 것에 비례하며, 그 비례함에 따라 나의 필요가 채워지며, 그 결과, 하나님 안에서 평온하며, 그분과의 관계로 인해 강력한 내 삶은 노래와 시와 성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외부로 드러난 행위는 우리의 경배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지난 육일 동안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했다면, 일요일 아침도 그분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가 전혀 없었다면, 나는 그분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혀에서 자주 "호산나"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헌신이 시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삶의 경배가 우선하지 않거나, 삶의 경배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성소의 경배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 기자가 "오,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라고 말한 의미를 강조하여 묻고자 합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일상적인 용례 가운데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겠습니다.

아름다움(Beauty)
찰스 킹스레이(Charles Kingsley)가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단어에 거의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심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가운데 그분의 아름다움에 관한 사실만큼 사람에게 더 독특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생각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언제나 아름다움으로 충만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만물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눈은 너무나 어두워서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일들과, 그분의 권능과 임재하심의 증거들과 완전한 아름다움이 활짝 핀 곳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법칙을 보지 못합니까?

형제들이여,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것들을 봅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것을 기억나게 하고자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잔디 가운데 데이지가 활짝 피고, 별이 하늘에서 총총 빛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생각으로 이끌려고 여기 있으며, 내가 제시한 오늘의 본문인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로 여러분들을 이끌기 위하여 여기에 있으며, 여러분들로 하여금 모든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각은 아름답다는 사실과 추함과 변형된 것(deformity)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나게 하고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양과 색과 향기가 어려있는 꽃의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지나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의 모든 아름다움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동일한 진리를 모든 견해에 적용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것은 아름답습니다. 꽃을 훼손시켜 보기 흉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있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이 사실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몇 년 전에 특별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친구와 데본쉐어에 머물렀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날 아침, 이 곳 런던에서는 솜씨 있는 손길로 실크 위에 장미를 수놓은 우편물이 친구에게 왔습니다. 친구는 실크 위에 수놓아진 장미들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매우 아름답군." 나는 형편없는 근시로 그것을 치켜올려 보며 말했습니다. "완벽하네." 그러자 친구는 "정말 그럴까?" 라고 대답하면서 현미경을 가져와, 장미를 그 위에 놓자, 그 실크는 베옷과 같이 굵어졌습니다. 잠시 후, 친구는 자신의 온실에서 하나님의 장미 한 송이를 가져와 현미경 밑에 놓았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욱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만개한 꽃의 작디작은 세포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하늘의 질서와 같이 만개한 꽃에서 드러났습니다.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매우 아름다우시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무엇이든지 근본적으로 아름답습니다.

거룩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의 주제에 이르러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라는 구절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아름다움은 거룩의 표현입니다.

아름다움은 그분의 작품이며, 빛은 그분의 얼굴에서 빛나고, 향기는 그분의 부드러움이며, 땅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분의 은혜이네.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각이 오직 그분의 법의 행(行)을 따라서만 실현된다면, 법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이 지켜지지 않는 곳마다 아름다움이 훼손됩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성품의 올바름(rectitude)이며, 아름다움의 조건입니다. "거룩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법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실제(實際)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의 아름다움은 경배의 유일무이한 조건입니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잔디 위에 활짝 핀 꽃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경배하고 있나요? 자신들의 아름다움으로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꽃들의 아름다움은 무엇입니까?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의 법이 역사한 결과입니다. 그 꽃들은 자신들의 수고나 외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생명으로부터 역사 해 나오는 본질적인 영광에 의해 생명의 법에 응답함으로 경배합니다. 그들은 거룩으로 경배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으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꽃들은 법의 영역 안에서 경배합니다.

"주의 음성이 백향목을 꺾으시나니"(시 29:5)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천둥을 치시나니...주께서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꺾으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시 29:3,5).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법이 그들 위에 선포되니, 그들이 듣고 응답하여, 그들의 생명이 솟구쳐서, 자태와 아름다움의 충만함으로 활짝 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추한 나무를 본 적이 있나요? 필자는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나무는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새 모양으로 자르려던 나무였습니다. 나무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합니다. 무엇이 나무의 아름다움일까요? 그것은 법의 아름다움입니다. 여러분이 나무의 법을 훼손한다면, 여러분은 나무에서 그 아름다움을 빼앗는 것이며, 여러분은 또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그분으로부터 빼앗는 것입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봅시다.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서 태양이 당신의 땅 한 부분을 비추는 것을 가렸다는 이유로 당신은 불신앙으로 불평을 합니다. 이윽고 그 구름은 자신을 드러내며, 땅 위에 자신을 드리웁니다. 그리고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여 흔적조차 없어져 버립니다. 모든 비와 소나기는 구름이 드리는 경배이며, 그 존재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구름이 자신을 쏟아 내며 경배할 때,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경배합니다. 밀려 왔다가 사라지는 조수도 경배하되 아름다움으로 경배하며, 귀가 먹을 정도로 우리 주위를 포효(咆哮)하는 깊은 음성을 가진 위엄으로 경배하지만, 그것은 모두 경배의 성가입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법에 대한 응답, 곧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입니다.

언제 경배를 드리는가?
이러한 예들을 사람에게 승화시켜 봅시다. 사람은 언제 경배를 드립니까?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일 때,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나는 찬송가집에 있는 모든 찬송가를 부르고도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정된 신조를 모두 암송하면서도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매로 내 몸을 괴롭게 하면서도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밤에 홀로 무릎을 꿇고 긴 기도를 드리면서도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한 개인의 고독한 이 땅의 삶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존재가 아니라면, 찬송과 희생과 기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존재일 때, 나의 온 삶은 경배를 드립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오직 주님의 법을 발견할 때, 오직 그분의 길을 걸을 때입니다. 사람과 꽃 사이에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애의 최고의 존엄과 거대한 압도적인 위엄은 고르고, 택하며, 결정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르고, 택하고, 하고자 하는 혼의 경배는 다른 어떠한 경배보다도 더욱 심오하고, 강력하고 위대합니다. 그것은 성가대의 교창곡(交唱曲)이나 우리가 듣고 부르는 음악의 찬송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경배는 우리 개인의 삶을 움켜잡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가 되도록 그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끼워 넣는데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고향에 머무르면서 목수의 일을 하도록 원하셨다면, 나는 선교사로 중국에 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능력이 조용한 일과 단순한 일과 알려지지 않은 일과 감추인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분을 위해서 어떤 능력 있고, 영웅적인 것들을 열망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벌새가 튜울립 꽃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공중을 치고 날아올라가서 독수리와 싸우려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벌새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곳에 머무르는 것이 경배하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태양을 향해 높이 솟아올라가야만 하는 때, 거짓 겸손을 구하며, 튜울립 속에 머무르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사악한 것입니다.

경배란 무엇인가?
앞에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일들을 미리 정하셨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관해 말했다면, 이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찾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길 안에서 걸으며 경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경배는 나 자신의 삶을 찾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그 삶을 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경배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찾는 것에 관해 말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잃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을 찾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라고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는 자는 찾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도 아니요, 새생명도 아니요, 새로운 차원의 생명도 아니요, 천사의 생명도 아니요, 바로 자기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필요합니다. 억제도 필요합니다. 희생도 필요합니다. 자기부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협소한 문이며, 십자가는 인도하는 통로이며, 십자가는 시작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고의 상태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라고 묘사했습니다.

그가 다시 그리스도에 대해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라고 말하지만, 그분의 죽으심은 마지막이나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러므로 십자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필요한 모든 것은 여러분의 십자가요, 나의 십자가요, 내가 이기적인 욕망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너머에 생명이 있습니다. 어떤 생명입니까? 나의 생명입니다. 새로운 출생은 단지 첫 번째 출생의 가능성으로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단지 첫 창조의 의미를 찾으며,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 그분의 법을 발견하고, 그분의 법에 응답하며, 그분이 정하신 길을 걸으십시오. 여러분을 만드신 그분께서 여러분의 삶의 모든 사실들을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이끄시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경배인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러면 경배가 여러분들이 교회를 갈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경배의 매우 귀중한 부분이지만, 그것은 이차적인 경배이며, 상징적인 경배입니다. 지금은, 찬송가 찬양과 기도로,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법에 따라 산 삶, 곧 거룩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아름다움이라는 영구하고 무궁한 진리를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그분을 완전하게 영화롭게 하는 경배를 잠시 멈춘 때입니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말과 태도에서 삶의 내면의 노래를 표현하는 잠깐의 멈춤(pause)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면의 찬송마저도 없다면, 경배는 이 땅에서 없는 것입니다. 경배는 인간의 삶 가운데 표현된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영구한 시(詩)입니다.

천사들은 그들의 얼굴을 가린 채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노래를 부르며 경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노래를 멈추고 희생단에서 산 숯불을 가져다가 신음하며 통회하는 혼의 입술에 갖다 대면서도 경배합니다. 나의 경배는,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여기서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이 아니며, 삶과 동떨어져서 행한 어떤 특정한 행위가 아닌, 삶으로 섬기는데 있습니다. 내가 오늘 여기서 말씀을 선포하지만, 나는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그분의 법안에서 발견되고, 그분의 섭리와 안배에 반응하여 그분의 부르심에 답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내 삶의 대부분은 노래와 찬양과 찬송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경배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가 되었을 때, 천사들과 모든 자연과 함께 경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이상(理想)이 활짝 핀 가운데 우리는 그분의 위대함과 사랑을 노래합니다.
우리의 한 밤중은 주님의 사라진 미소요;
우리의 한 낮은 주님의 은혜로운 새벽이요:
우리의 무지개 아치요
주님의 긍휼의 증표이네;
구름과 같은 죄에서 구원받은 모두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주님의 진리와,
주님을 향해 타오르는 애틋한 마음을.
주님의 모든 산 희생단이
한 거룩한 빛, 한 하늘의 불꽃을 요구할 때까지.

그러므로 나는 예배가 끝나고, 일요일이 지나가도, 가게에서나 집에서나 시장에서, 그리고 모든 일상의 수고에서 거룩의 아름다움으로 주님을 경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기도합니다. 거룩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 경배가 있습니다. 외적인 것들에서 아무리 경배를 치장할지라도, 거룩의 아름다움이 결여되었다면, 그 경배는 결코 내적 성소에 도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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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민족복음화 | 작성시간 12.03.0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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