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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찬양의 이해
a.경배&찬양의
의미 성경에서 예배로 번역된 구약용어는 '샤하(Shachah)'와 '아바드(abad)'이다.
문자적으로 '아바드'는 히브리어로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라는 의미로 봉사, 섬김으로 나타나는데 영어로 서비스(Service)라는
표현은 바로 이 '아바드'에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샤하'는 '노예가 그 주인을 섬기다. 고용된 종이 그의 고용주를 섬기다'라는 의미로 숭배,
순종, 봉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우리의 자세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뜻한다. 이외에 예배라는
말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신약용어 헬라어인 '프로스퀴네오'이다. 그것은 '절하다. 엎드리다. 손에 키스하다. ...에게 키스하다'라는 뜻을
의미로 웃어른에 대한 예의와 존경과 복종을 함께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영어의 "Worship"인데 이것은 앵글로 색슨어인
"weorrhscipe"에서 유래된 것으로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말의 뜻을 가진 합성어 이다. 이 말의 뜻을 "가치를
돌린다" 또는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분"이란 뜻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배라는 개념은
존경심과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보좌에 들어갈 때에 그분의 권위와 위치를 인정하는 표시로서 그리고
전적인 헌신을 그분에게 보이는 방법으로서 무릎을 끓고 부복하는 것이다. 예배의 정의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감격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성경원어상으로는 예배와 경배가 모두 같은 말이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시 번역자들의
불일치로 일부 성경(요한복음, 사도행전 등)에서만 예배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라고 하면 회중예배를 의미하고 경배라고 할 때는
본래적인 의미의 경배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예배란 곧 경배로서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자연히 가지게 되는 태도이다. 경배는 사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앞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반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 찬양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높이는 것이라면, 경배는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엎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또
그 뜻에 따르지 않고는 온전히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찬양이라는 낱말로 가장
많이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할랄'이다. 이 단어의 쓰임 중에 두드러진 것은 '자랑하다', '칭찬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찬양의 사전적인
의미에서 찬양의 근본이 음악적인 것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찬양의 성패는 얼마나 하나님을 잘 드러내고 자랑했는가에 달려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많이 자랑하려면 우선 하나님을 많이 알아야 하고, 또 아는 것을 잘 표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을 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사뭇 다른 일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많이 듣는다. 그러나 아직 삶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든지, 하나님이 나의 피할 바위가 되신다는 지식을 가사로 만들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찬양이 진정한 것이 되려면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그분을 경험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을 향해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
찬양의 이해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음악적인 용어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음악이라는 울타리에 찬양을 가두어 놓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성도의 특권을 손도 못대본 채 ?이상을 잃어 버리는 격이 된다. 사실 찬양이 노래와 긴밀하게 결부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어디까지나 비음악적인 용어이다. 찬송에 대해 처음으로 정의를 내린 것은 주후 633년 스페인 '토렌도 회의'에서
였다. 그 정의 규정은 어거스틴이 말한 찬송의 정의를 그대로 수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의의는 참으로 크다. 어거스틴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찬송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찬송은 지으심을 입은 피조물들이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찬송을 '의미없이 부르거나',
'무감동'으로 부르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찬송이라고 할 수 없다. 찬송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서 드려지는 생명력있는 찬송이어야 한다.
찬미라고 하는 것은 '음악이라는 예술적 매체 없이 언어로만 찬양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의 표현이다.
찬미는 구체적으로 기도 찬미, 증언 찬미, 삶의 찬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기도찬미'라 함은 우리의 기도가 찬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대개 무엇인가를 받기 위하여 "주옵소서"위주의 기도를 드릴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받기 위햔 기도 보다는 영광을 돌리는
기도이어야 한다. 둘째로, '증언찬미'란 우리의 말 자체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하나님을 높인다면 얼마나 큰 찬양이 되겠는가? 셋째로, '삶의 찬미'란 우리의 삶 자체가 찬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부를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찬양이란 찬송을 포함해서 또 다른 표현(언어, 몸짓, 기도, 선포
등)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과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랑하다, 뽐내다, 미친체하다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찬양이란 하나님을 높이는 모든 행위와 표현을 포괄한 것이다. 그러므로 찬양이란 '찬송'과 '찬미'를 합친 통합적
의미이다.
경배(worship)와 찬양(praise)은 분명히 다르다. 찬양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혹은 우리에게 베푸신 일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큰소리고 외치며
기뻐하고 뛰노는 것이다. 그러나 경배는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로서 섬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그의
성품과 거룩한 임재에 대해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경외함과 무릎 꿇음이
있게 된다. 따라서 경배를 몸의 행동과 연관시키지 않고는 이해 할 수 없다. 찬양이 주로 소리로 표현되는 반면, 경배는 몸의 자세로 나타난다.
따라서 찬양이 주로 하나님의 귀를 향한 것이라 한다면, 경배는 하나님의 눈을 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경배는 몸의 동작으로 표현된다.
성서에 나타난 경배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침묵의 형태(시46:10), 손을 드는 형태(시63:4), 주를 바라보는 형태(겔46:9),
일어서는 형태(출33:10), 머리 숙이는 형태(출12:31), 몸을 굽히는 형태(느8:6), 무릎을 꿇는 형태(시95:6), 엎드리는
형태(출34:8), 얼굴을 땅에 대는 형태(느8:6) 등으로 나타난다. 경배와 찬양으로 불리우는 'praise
& worship'의 뜻은 'worship in praise'이다. 찬양을 드리고 또 경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배를 돕는 찬양의 분명한 역할을 보여 주고, 사역의 올바른 우선순위를 제공한다.
경배와 찬양 사역자는 가장 먼저 예배에 대해서 준비되어야 한다. 예배의 대상과 예배자, 예배의 흐름에 대한 지혜와 분별력을 겸비한 사역자라야
회중들을 강요하지 않고서도 예배의 흐름에 맞게 어떤 때는 천천히 그리고 어떤 때는 멈추어 서면서 하나님의 보좌로 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경배와 찬양 시간에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경배와 찬양이라 할 수 없다.
b.경배&찬양의 의의 성도의 삶의 이중성에
대한 갈등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예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삶을 변화시키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 뜨거운 찬양,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는 고백, 열린 심려에 뿌려진 말씀, 확고한 헌신과 결단 등등. 회중의 참여가 증대된 예배, 우리는 이 예배형태를 경배&찬양이라고
부른다.
(1)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에게 지,
정, 의를 주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 모시고 그분을 알아 가고 닮아 감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앙생활 중에
예배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지, 정, 의가 모두 고르게 강조되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경 공부는 지적인 것을
강조하고, 기도회나 찬송은 정적인 것을 강조하며, 봉사나 교제는 삶에서의 의지적인 실천을 강조하게 되지만 예배는 인간의 지, 정, 의의 모든
것을 합해서 전인적인 행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지, 정, 의가 조화롭지 못한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배&찬양은 말씀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횟수를 늘려 그 동안 절제되어 온 뜨거운 감동의 찬양과 의지적인 결단과
헌신으로 지, 정, 의가 조화롭게 성장될 수 있는 전인적인 예배를 제시해 주고 있다.
(2)하나님과의 많은 접촉점을
제공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예배에는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예배순서를 보면 기도나 말씀선포 사이사이에 찬송을
끼워 넣은 형식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찬양이나, 기도, 말씀선포에 있어서도 깊이 있는 순서들이 되지 못하고 그저 정해진
순서에 따?치러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찬양을 한데 묶어서 집중적으로 찬양하고, 기도
순서도 집중되게 하고, 그 후에 찬양과 기도로 열린 마음에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예배 형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주로 깊이 드려지는 예배에서 경험되어지는데 예배에 참석한 회중들은 개개 복잡한 마음들을 가지고 나오게 되기 때문에 토막토막 잘라진 작은
찬양과 기도시간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 확정하고 깊이가 있는 예배로 나아갈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배&찬양은 예배갱신의 좋은 모델로 볼 수 있다. 찬양의 가사를 메시지처럼 묵상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설교시간에 국한되어 있던 말씀과의 접촉점을 늘리고, 찬양과 기도시간을 집중시키고 늘림으로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증진시킬 수 있다. 우리의 예배는
엄격한 교리보다는 하나님을 접촉하려는 어리아이와 같은 순전함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3)예배자의 예배 참여도를
높인다. 전통적인 예배순서는 강단 중심이어서 회중들의 예배참여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길들여진 회중들의 수동성은 회중을
예배의 관람자로 전락시키고 무기력한 신앙인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은 각각의 사람들을 일대일로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를 원하신다. 남이
대신 드려 주는 기도에 그저 고개 숙이고 끝나기만을 바라거나, 남이 부르는 찬양을 그저 감상하며 채점하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이 터져라
부르짖고, 입을 벌려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관람자가 아닌 예배자의 위치를 회복해야만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7)"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저 은혜받기만을 바라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진정한 예배의 갱신은 모든 예배자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참여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회복되어서 삶으로 돌아가는 생명력있는
예배이다.
(4)하나님께 사랑의 표현을 자유롭게 한다. 잘못된 경건과 거룩의 개념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서먹서먹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데 좀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법궤가 들어올 때 옷이 벗겨진 줄 모르고
춤을 췄던 다윗과 이 장면을 책망한 미갈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표현이 더욱 순전해져야 할 것을 교훈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5)청소년들을 복음안으로 이끌 수 있다. 현대의 청소년들은 과거보다 훨씬
다변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다변화된 시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변하신 하나님을 선택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게 하기 위하여 청소년을을 불러모아서 복음과 감동을 심어 주는 예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 또한 문화는 언어와 같아서 문화가 다르면 의사가 전달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을 불러모으고 복음을 심기 위하여
그들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한 예배가 있어야 한다. 함께하는 기도와 함께하는 찬송으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결단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찬송을 많이 부르는 문화적인 행사가 아니라 기존 예배보다 회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모든 찬송의 가사들을 묵상함을 통해 삶의
변화와 결단의 기회를 확대시키는 예배이다.
c.경배&찬양의 역사와
배경 (1)경배&찬양의 역사 현대적인 모습의 경배와 찬양은 '마라나타 뮤직'이 처음이지만 '경배와 찬양'은 다윗때에도
있었다. 시편은 다윗과 솔로몬등의 시련기자들의 노래들을 모은 것으로 이 노래들은 지금도 '경배와 찬양'뿐 아니라 많은 CCM에도 실려 있다.
어쨌건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존재했다. 현대에 와서 마라나타가 80년대 중반까지 '경배와 찬양'을 이끌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호산나 인테그리티 뮤직'이 '경배와 찬양'을 이끌었다. 마라나타에서 발표한 곡들은 80년대에 와서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졌고 찬송가뿐이었던 한국에도 GOSPEL이란 이름으로 경배와 찬양곡이 불리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부터 90년대까지 호산나 뮤직은
보다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와 충실한 내용, 현대의 무대기술을 총집결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경배와 찬양'운동을 일으켰고 미국 각 지역에
유명한 예배 인도자들과 함께 앨범을 제작했다. 이 앨범들은 미국의 어떤 유명한 가수들의 콘서트앨범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뛰어난 앨범들이었고 곧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몇년전부터 2달에 한번씩 앨범을 제작할 정도로 활성화되고 '경배와 찬양'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기뻐하며 모든
성도들이 주님앞에 나올수 있도록 인도하는 새로운 예배형식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에서는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전하세 예수' 시리즈로 11집에
이르기까지 외국곡들을 번역하여 발표해서 많은 경배와 찬양곡들을 알리고 있다. 또한 최근에 예수전도단이 발표한 '부흥'은 그 충실한 음악적
완성도와 신앙적인 깊이가 담긴 가사로서 한국의 경배와 찬양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경배와 찬양은 단순한 현대적인 음악의 찬양이 아니다. 분명히
하나의 예배로서 주님과 회중이 만나는 시간인 것이다.
(2)경배&찬양의 배경 a)가스펠
송의 발전 찬양이 말씀사역과 힘을 합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것은 무디와 생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대중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이들을 회심시키는 데 가스펠 송은 그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와 같았다. 예전에 부흥회나 예배 전의 준비찬양으로만 인식되던 가스펠
송이 이제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서도 사용되는 겨우가 많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전도용으로 쓰인던 가스펠 송이 음악적인
수준을 높여서 대중가요의 정상 순위에 오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깊이를 추구하면서 주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노력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전자는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으로 발전하였고, 후자는 경배와 夏瑛?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CCM 그룹들은 동시대의 모든 음악적인 형식과 방법을 수용하면서 기존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선교의 방편으로 사역을 하고, 경배와
찬양은 교회 안에 정착되어 예배 갱신의 모델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b)수도원의 침묵찬양 중세 시대에
교회가 타락의 끝을 달리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던 자들은 한편은 종교개혁이라는 방법으로, 또 다른 한편은 수도원을 짓고 은둔하는
것으로 교회에 경종을 울렸다. 그 중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 운동은 인간 내면의 영혼을 울리는 심오한 경건서적들을 출판하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개인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구교의 형식화된 예배와 거짓 경건을 배척할고 순수한 그들의 마음을
자유스런 노래로 표현하고 또한 하나님앞에 직면했을 때 맛보는 침묵기도 혹은 침묵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머무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침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저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한다는 명분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고집하며 소리치고 있다. 마치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마르다의 행동처럼 책망받을 예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 중에서 지성소로 여겨질 만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장이 마련되어야像岵?예배(무형식의 예배) 참여와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으로 드려지는 카리스마 운동의 예배는 예배에 있어서 영적 자유함과 많은 은사를 체험케 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 운동에 있어
주의할 점도 있는데 첫째, 그릇된 신학을 좇는 경향이 있다. 흔히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무분별한 표현을 쓴다. 둘째, 영적으로 교만해지는 경향을
주의해야 한다. 셋째, 감정과 체험, 은사를 강조한느 경향을 주의해야 한다. 예배에 있어 무질서를 주의해야 한다. 넷째, 가르침의 깊이가 얕은
경향을 주의해야 한다.
카리스마 운동의 예배를 보여주는 원형은 고린도 교회인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은사를 활용한 예배에 있어서 단점으로 나타날 수 있는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순서를 정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은사의
사용목적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고전14:26)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풍성한 은사로 가득한
예배를 드린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사도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고전3:1)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배의 깊이는 뜨거운 은사보다는 말씀의
깊이나 예수님을 닮는 것에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 운동은 신실한 예배자들에게 예배의 본질이
일정한 형식으로 순서만을 채우는 것일 수 없으며 예배는 반드시 영적인 시도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줌으로써 경배와 찬양 사역의 문을 여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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