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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자백 오늘날 많은 분들이 참된 회개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자백에 대하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여 의문과 오해 속에 있는 분들이 많아 이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성경이 말하는 회개(悔改) ♥거듭나지 못한 삶 저는 거듭나기 전까지 12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는 말씀이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5:12)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20)이런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죄로 인해 사망과 저주를 피할 수 없는 내 영혼의 문제로 인해 많은 고통과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특히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저에게 율법(계명)을 준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제 마음에 굉장한 부담과 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는 그분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고, 율법을 어기거나 죄를 지을 때마다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 달라는 간구를 드렸지만, 그렇게 해도 죄 사함의 확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넘도록 교회를 다니면서 “주여, 오늘도 주의 뜻대로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리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요구대로 살려고 노력해 봤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죄의 욕구를 이기지 못해 정죄와 가책을 받곤 했습니다. 선하게, 바르게, 진실하게, 반듯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원함뿐이었지 실제의 삶은 허물투성이였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부끄럽고 죄송하고 마음이 무겁고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여러 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잘해 봐야지’하고 각오도 하고 노력해 봤지만 항상 작심삼일이었고, 진정한 영적 변화나 믿음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닌 지 10년쯤 지났을 때 지난 삶을 뒤돌아보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앞으로 1년쯤 더 교회를 다니면 내 신앙에 진정한 변화가 올까?’ 회의적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1년이나 5년이 더 지나도 지금과 별로 달라질 것 같지가 않다. 내년은 올해의 연장(延長)이고, 내일은 오늘의 반복이지,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1. ‘비록 내가 죄를 짓기는 했지만 이렇게 간절히 용서를 구했으니 나의 이 간구를 들으시고 용서해 주시겠지. 비록 내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기는 했지만 이렇게 괴로워했으니 긍휼히 여겨주시겠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신의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증거 하는 죄 사함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해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좀 긍휼히 여기실 것 같아 했던 종교적인 회개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를 깨닫고 거기서 돌이키는 회개, 즉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몇몇 가지 잘못한 내 행위로 인해 괴로워하고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식의 회개를 되풀이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식의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놓고도 ‘회개했으니까 용서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으로 자기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생각의 소산인 것입니다. ♠‘회개’라는 단어의 의미 참된 신앙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 한 것이라.”(행20:21) ‘회개[悔改, repentance]’라는 단어를 백과사전에서는 “마음의 변화나 후회, 가책 등의 감정을 뜻하는 말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로부터 벗어나 신에게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신약 성경의 헬라어 원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다. 돌이키다. 마음을 변경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떠난 길에서 하나님께로 마음의 방향을 전환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며 그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구원은 타락의 역순 그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회개는 어떤 것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구원은 타락의 역순(逆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정확한 길을 알려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살던 하와는 어느 날 사탄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를 신뢰하는 쪽으로 마음이 변질되면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과를 그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고, 그도 먹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사단의 종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죄 창세기 3장을 읽어 보면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사단은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 자기가 자기를 위하려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거짓의 아비 마귀의 마음이었고, 그들을 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사단은 하와의 마음 안에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에 세우도록 역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던 하와가 사단의 음성을 듣게 되자 갈등과 혼 돈 이 왔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이하 ‘선악과’라 약칭함)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뱀은 그걸 먹으면 결코 죽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하나님처럼 된다고 한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지? 내가 직접 내 눈으로 선악과를 한번 보고, 내가 판단해야 되겠다. 일단 내가 그 실과를 보고 난 뒤에 그걸 먹으면 죽을지 살지, 누구 말을 따라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겠어.’ 하와는 어느새 자기 눈을 믿고, 자기 판단을 가장 신뢰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미 선악과를 먹게 되면 정녕 죽는다는 판결이 나 있는데, 하와는 ‘그렇지만 뱀은 다른 말을 하니까 내가 직접 그 나무의 실과를 보고 나서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결정권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두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는 쪽으로 마음이 변질된 것입니다. 자기를 가장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자기 눈으로 다시 보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삶이 자기가 기준이 되는 쪽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이제 하와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 아닌데, 인간이 이렇게 타락한 배후에는 마귀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마귀는 하와의 마음에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넣어 주었고, 욕망에 사로잡힌 하와는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다른 게 아니라, 하와처럼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높은 곳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눈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더 신뢰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 죄(罪)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했습니다. 교만한 위치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단이 높여 놓은 우리 마음을 낮추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우리가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삶임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이 우리 속에 넣어준 생각과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수고와 실패, 어려움과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낮추기 위해 일하실 때 쓰시는 연장(도구)인 것입니다. 사단의 음성을 듣고 마음이 미혹된 하와는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심에 이끌려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 등을 돌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음성을 듣고, 사단의 마음을 받아들여 사단 편에 섰고, 범죄 한 인간의 후손들은 모두 사단의 영역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과의 교통은 단절되어 버렸고, 성경은 그 상태를 ‘영적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멸망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고린도전서 15:22) 하와는 선악과를 남편에게도 먹으라고 주었고, 아담 역시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린 인간들은 사단 편에 서게 되었고, 사단이 넣어주는 생각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사단의 종이 되어버렸고, 인간의 마음은 사단이 역사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단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던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져 버렸고, 사단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영적소경이 되어버렸고, 범죄 한 인간들은 그들의 육체를 주목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초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육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창세기 3:7) 그들은 그들의 영이 죽은 줄은 모르고, 몸이 벗은 줄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이끌림을 받고 있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회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신뢰하고, 스스로 만든 선악의 기준, 즉 자기 법을 따라 살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罪)입니다. 자, 구원이 타락의 역순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겠습니까? 참된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원함을 따라 살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길이 하나님을 떠난 길, 사단이 이끄는 저주와 멸망의 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참된 회개(悔改)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신뢰하는 데서 돌이키거나 자기 생각을 부인하지는 않은 채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비는 것이 회개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려고 경부선을 타고 가던 사람이 대전에서 길을 잘못 들어 호남선을 타고 가다가 U 턴을 하여 길을 돌이키지 않고, 여전히 광주를 향해 가면서 차선(車線)만 바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U 턴이지, 차선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55:7) 참된 회개는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악한 행위를 통해 근본적으로 악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생각을 버려본 적도 없이,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이 죄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율법을 지켜나가고, 죄를 지을 때마다 잘못했노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그것이 회개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회개가 되려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잘못되었고, 어디서 어떻게 돌이켜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한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부분적인 행위가 잘못된 것보다 그보다 앞서 우리의 근본, 본질, 소속, 길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말하는 죄인의 모습이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지를 모르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했기 때문에 죄인인 줄 압니다. 성경은 우리가 출생 후에 범한 범죄 행위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탄 편에 서버린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를 더 신뢰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버린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탄의 영역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곳곳에서 참된 회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하나님을 떠난 아담이 어떻게 회개하고 은혜를 입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악한 가인이 어떻게 회개하여 은혜를 입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회개하는 과정이 분명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가장 강하게,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은 ‘돌아오라(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탕자의 회개 자, 그럼 참된 회개를 잘 설명하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을 통해 성경적인 회개란 어떤 것인지를 같이 상고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3 가지의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의 마음, 잃었던 아들을 얻는 아버지의 마음이 ‘찾도록 찾아다니는, 찾도록 찾는’마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아담 안에 속한 인생들의 마음과 삶의 모습을, 예수님은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의 이야기로 비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진정한 회개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기를 믿는 교만한 마음과 욕망을 따라 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그 결과로 찾아오는 것들은 허비와 궁핍, 수고와 고통, 실패와 죽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탕자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날 때 이미 죽었는데, 둘째 아들은 주려 죽는 형편이 왔을 때 비로소 그 마음에 죽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 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눅 15:17~19) 그 때 둘째 아들은 궁핍이 찾아오자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리던 허랑방탕한 삶에서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돼지를 치는 성실한 삶으로 돌이켰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까? 아닙니다. 성실하게 살아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성실은 육(肉)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실은 여전히 수고롭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기를 믿고 산 삶의 결국이 멸망임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게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돌이킴이 참된 회개입니다. 자기 악(惡)에서 자기 선(善)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양심이나 도덕은 자기 악에서 자기 선을 향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회개가 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되어 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간구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행20:21)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행26:18) ♠자기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한 사람 우리가 우리의 몇몇 가지 잘못한 행위를 고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이 되어버린 아담 안에서 태어났고,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에(엡 2:1), 행위를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러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발견하고,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자기의 소속과 신분, 자기 영혼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밝히 깨달아야 진정한 회개가 되어 지면서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자기가 죄로 말미암아 이미 사망이 확정된 자임을 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긍휼뿐입니다. 마음에 사망이 오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행위와 노력에 기대를 두며,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마음에 사망이 임한 사람은 그의 모든 행위와 노력이 전적으로 무익하며, 이제 그가 기대할 것은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선한 행위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값없는 은혜와 긍휼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재판장의 판결이 선고되기 전이나 형(刑)이 확정되기 전에는 죄인의 수고나 노력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최종 판결에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이라면, 그의 노력이나 비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행위가 이미 선고된 하나님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자기 영혼의 모습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긍휼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애(仁愛)와 약속에만 전적인 기대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고, 전적으로 그분의 구원의 손길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낮아지고 가난해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다. 이러한 회개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죄 사함은 아니다 그러나 회개 자체가 죄를 사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누구보다도 ‘회개’를 강하게 외친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원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회개하면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도 회개하고 그 후에 죄 사함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실제 죄를 사함 받는 것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의 공효(功效)와 부활을 마음에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알 때 죄에서 벗어나고 의롭게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와 회개 여기서 구원의 복음, 즉 우리가 어떻게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고 의롭게 되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든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의인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사 2000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어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는 죄를 짓지 않는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죄를 짓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 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두 종류의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의 회개이고, 하나는 성도의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위에서 말씀 드린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첫 번째 회개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죄인이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고, 거룩해지고, 성도로 거듭나면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인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것이고, 예수님이 의롭게 해주셔서 의인이 된 것이지, 우리의 행위가 의로워서 의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우리 모습과 상관없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사함 받은 그리스도인은 범죄를 안 하느냐? 또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범죄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그 죄를 책임지고, 자기가 그 죄를 해결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앞으로, 영원한 속죄의 약속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회개입니다. 성도(의인)의 회개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연약하여 실수하고 넘어졌을지라도 그런 자기를 받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앞으로, 영원한 십자가의 사랑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 하면 마귀가 또 속삭입니다. “네가 구원받았다고? 그런데 네가 그런 짓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냐? 가관이더라. 네가 그런 짓을 하면서도 죄가 없다고? 의롭다고? 그래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이 너를 받으실 것 같아? 네 기도를 들으실 줄 알아? 하나님은 너와 함께하시지 않아.” 마귀는 그런 생각을 넣어주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송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할 때 부담을 갖도록 일을 합니다. 누구든지 마귀의 음성을 들으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게 됩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하면 마귀는 우리 마음에 있는 믿음의 뿌리까지 흔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향해 부담을 갖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일을 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자유 자식들이 부모한테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한테 나아갈 자유와 용기가 없어집니다. 제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한번은 학교에 가서 체육복을 잃어 버렸습니다. 점심시간에 밖에 나갔다 왔더니 누가 체육복을 훔쳐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체육 시간에 체육복을 못 입고 나가서 체육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기합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집에 와서 “아빠 제가 학교에서 체육복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해요? 체육복 하나 다시 사 주 세요.”라고 하면 제가 얼른 사 줄 건데, ‘아빠한테 이 사실을 말씀 드리면 아빠가 혼내실 거야. 아빠는 체육복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시고, 새로 사주지 않으실 거야. 네가 잃어버렸으니까 네가 선생님께 혼 나 거라. 너같이 정신없는 놈은 혼줄 나야 돼.’라고 꾸짖기만 하고 체육복을 안 사 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 달 동안 체육 시간마다 혼자 체육복을 안 입고 나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기합을 받은 거예요. 그러다가 선생님이 “너 이놈 다음 시간에도 체육복 안 입고 오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해라. 이놈아. 도대체 네 아빠는 뭐하는 사람이야?”그러니까 얘가 할 수 없이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아주 어렵게 제 눈치를 봐 가면서 체육복을 잃어버린 사실을 이야기한 겁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이 녀석아, 그 이야기를 진작 하지, 왜 이제 하냐? 네가 말만 했으면 아빠가 바로 사주었을 건데. 아빠가 그것 하나 사 줄 마음과 능력이 없는 줄 알았니? 네가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아빠가 돈을 빌려서라도 사줄 텐데.”하고는 그 날 저녁에 당장 체육복 값을 주었습니다. 그제 서야 제 아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마음이 자유를 얻고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아들이 왜 마음이 어렵고 고통스러웠습니까? 체육복을 잃어버리고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허물도 받아주고, 해결해 주기 원하는 저의 마음을 모르고, 자신의 허물에 매여 아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들이 비록 잘못해도 아들에 대한 제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아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그 문제를 아빠한테 들고 나와 은혜를 구하면 아들의 문제는 저의 문제가 되고, 아버지인 제가 그 모든 걸 다 해결해 줍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자식은 비록 잘못해도 부모에게 담대하게 나아갈 용기(勇氣)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은 부모를 향한 자유(自由)가 있는 아이들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부모에게 나아가 부모를 믿고 내가 실수한 것, 잘못한 것 탁 털어놓고 은혜를 구하면 부모가 그를 기뻐하고 받아주고 책임져 주시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구원받고 또 실수하고 잘못하고 범죄 했을 때는 우리가 그것을 해결하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죄를 씻어놓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회개입니다. “예수님, 제가 오늘 또 잘못했습니다.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이 죄까지도 씻으시고 나를 받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내일 또 실수하고 또 잘못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제 인생을 당신께 부탁드립니다.”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회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를 얻고,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갈 담력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손에 맡기면 어떤 문제든지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의 사형 선고는 이미 철회(撤回)되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재판장의 옷을 벗으시고, 사형을 선고하기 위해 들고 계시던 망치도 내려놓으시고, ‘내 집에 들어오너라. 내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법정에 서 계시는 재판장이셨지만,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자비한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죄를 막 지어도 되는 것 아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죄를 없애버리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의 종 된 삶,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사단과 연결되어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단과 단절시키고, 하나님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풀어놓아 죄에서 자 유케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끌려 다니며 죄에 종노릇하던 우리가 이제는 죄에 끌려 다니지 않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풀어놓으신 것이지, 죄에다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고 난 뒤에도 끊임없이 은혜를 입어야 하는데, 사단은 ‘넌 죄를 지어도 구원받았기 때문에 지옥 안 가잖아? 천국 가는 데 아무 문 제 없잖아? 그래도 죄는 없잖아?’하며 다시 죄에다 우리 자신을 내어주도록 유혹해 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옥 가는 건 아니고 구원이 취소되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부분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두움을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주의 인도를 받아 복되게 살기를 원하시는데, 사단은 우리가 마음을 육(肉)에 내어주면서도 ‘그래도 넌 구원받았잖아? 그래도 넌 이런 역사와 열매가 있잖아? 그래도 아무 일 없잖아?’하며 육을 용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태만하고 교만하고 방종하게 만들어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역사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목자의 양육과 다스림을 받고, 성도간의 상종과 사귐을 가질 때 그런 부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 가운데 머물면서 이 귀한 복음으로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귀하고 복된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한일서 1장의 자백에 대하여 요한일서 1장은,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는 데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救贖)함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밝은 사귐을 갖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된 말씀입니다. 왜냐 하면 요한일서의 기자 요한은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 1장의 초점은 '속죄(贖罪)'가 아니라, '사귐(교제)'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요일1:3) 우리가 구원을 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사해진 사실에 대한 믿음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며, 말씀의 인도와 교회의 다스림을 받지 아니하면, 마음이 육신을 따라 흘러가며, 다시 죄의 유혹에 빠지고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령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해도 예수님의 보혈은 이미 그 죄와 허물까지 심판을 받아버린 보증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나누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엡1:13)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에 의해, 또는 우리의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켜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모든 죄의 담을 헐어서,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했고, 가깝게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의 능력이 변하지 않고, 그 피가 우리 모든 죄를 씻으신 공로가 변하지 않는 한 우리의 연약함이나 어떤 허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나누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만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믿고, 자신을 세우며,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잘하고 못한 것, 선하고 악한 것을 따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속(屬)하게 하셨고,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를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도록, 복음을 섬길 수 있도록 도우시고 이끌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세계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믿음으로 산 간증도 있고, 하나님께 받은 약속이 있고, 내게 귀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을지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다윗이나 삼손의 삶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그럴 때는 징계를 통해 우리가 육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도 하시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은혜가 아니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죄를 짓는 걸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지, 죄에다 내어준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이 교만해지고, 사단에게 속아서 죄를 범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요한일서 1장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이 말씀을 보면 복음의 진리와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가 있다고 해야 되나, 없다고 해야 되나?' 성경 곳곳에 수없이 분명히 '의롭다(롬3:26 / 롬5:9 /롬 8:33 등), 거룩함을 얻었다(히10:10),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10:14) 죄를 그쳤다(벧전4:1)..... 이렇게 약속하셨는데, 또 여기서는 "죄가 없다고 하면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하니, ‘그러면 우리가 또 죄 있다고 해야 하나?’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자, 요한일서 1장 8절을 10절 말씀과 한번 자세히 비교해 보십시오. 표현은 다르지만 똑같은 내용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 여기서 밑줄 친 부분을 비교해 보고, 파란 색(“ ”) 글씨의 내용을 잘 비교해 보십시오. 똑같은 의미입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은 왜 기록하셨는가? 요한일서 1장 8절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지만, 죄가 있는 것이구나. 죄가 없다고 하면 안 되는구나.우리가 여전히 죄인이구나.' 하고, 이 말씀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장 10절에서 다시 그 말씀의 참된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라는 대목의 진정한 의미는 "여전히 우리는 죄가 있다. 죄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사하셨지만,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안 된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대목을 다시 부연(敷衍)해서 정확히 설명하면 10절의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이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즉 구원받은 후에 거짓말을 했다든지, 도둑질을 해놓고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그런 죄를 안 지었노라고 한다면 "스스로 속이고"(8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것이며, "네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10절)이죠. 죄를 지어 놓고도, '나는 죄를 안 지었는데, 나는 거짓말 안 했는데, 나는 도둑질 안 했는데, 하나님은 왜 내가 자꾸 죄를 지었다고 하십니까?'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이라는 구절의 참된 의미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이 자기 아우 아벨을 들에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 속에 있는 근본 죄악을 보셨고,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죄를 지은 사실을 아시고, 그에게 물었습니다."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그 때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 이 까?"(창4:9) 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 하면서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요일1:8)가인의 경우를 요한일서 1:10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 이해가 가시지요? 동생 아벨을 쳐 죽여 놓고도 동생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거짓말하는 가인의 마음 안에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가인 안에는 진리가 아닌, 거짓의 아비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 안에서 그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한일서 1장에 기록된 말씀은, 삶 속에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어두움에 잡힌 부분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그 죄와 허물도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된 사실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올 수 있는 믿음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지, 영원한 속죄를 받은 의인이 여전히 근본적으로 죄 아래 있고, 여전히 죄인의 신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오해하면 십자가의 공로는 무효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내어놓고,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은, 우리 마음을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백은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 사단의 송사와 정죄를 제거하여 우리와 주님과의 사귐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우리 마음을 정결하고 자유롭고 담대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말하는 자백의 삶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자백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가 씻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은 과거의 죄는 십자가에서 씻어졌지만, 날마다 짓는 죄, 앞으로 짓는 그때마다 회개함으로써 용서를 받는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를 사하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에 있지, 자백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자백을 해야만 죄 사함을 받는다면 죄를 범한 사람이 그 죄를 자백하기 전에 교통사고나 심장마비로 죽었을 때 지옥으로 갑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틀림없이 사해졌고, 예수님은 인류가 짓는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이미 받으시고 죄를 끝내 놓으셨는데, 사람들은 그 십자가의 능력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주목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죄를 짓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를 짓기 때문에 정죄를 당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무결한 공효(功效)를 믿는 믿음에서 마음이 떠나 있기 때문에, 자기를 공격하고 송사하는 사단의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어떤 허물과 연약함도 이미 해결해 놓으신 사실을 바라보지 아니함으로 정죄를 당하는 겁니다.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죄인이고,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씻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왜 마음이 왜 어둡습니까? 내가 못 났고, 잘못하고 실수하고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문제는 부족한 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부족한데 마음이 빠져서 ‘내가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어렵게 하시고, 돕지 않으시는가 보다.' 하고 생각해서 그 마음이 은혜에서 떠나버리고, 예수님에게서 떠나버리고, 주를 믿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나를 도우시고, 이끄시고, 위하신다.' 하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딱 가지면 되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우리가 율법(律法) 전체를 다 지킨 것과 똑같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힘입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義)와 하나님의 의(義) 두 가지를 다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義)도 세워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깨뜨려지면 큰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는 가지고 갈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의 하나만 가지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의는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의 의를 버린 자들, 자기의 의가 무너진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육(肉)은 사단에게 길들여져 있어서, 구원을 받은 뒤에도 ‘내가 잘해야 안 되겠나?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시는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그러한 자기 생각을 믿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허물이 드러나거나 부끄럽고 악한 게 드러나면, 그것을 숨기려는 쪽으로 마음이 달려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렸어. 하나님이 나는 사랑 안 하실 거야. 내가 하는 기도는 안 들으실 거야' 라는 생각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복주시겠다고요. 우리가 잘한 것을 보고 복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예수님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엡1:3)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맡기십시오.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주관하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 받을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을 주(主)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참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수많은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일에 마음을 같이하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 귀한 열매와 주의 아름다운 역사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