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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생애와 사상

작성자넓은가슴|작성시간13.03.10|조회수1,163 목록 댓글 0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생애와 사상

정준기 교수

카톨릭 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즉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내졌을 때 그의 선생에게 “하나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 질문은 그가 일생동안 해결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보다는 “하나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얻고자 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이 동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만이 가장 완전하시며, 자존하시는 분(the pure actuality)이라고 했다. 에티네 질송은 성 어거스틴이 플라톤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신학을 체계화한 것처럼,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을 체계화했다고 평가했다.

아퀴나스의 평생의 작업은 믿음과 이성의 분명한 구별에 의한 신학의 체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아퀴나스를 크리스천 아리스토텔레스라고도 부른다. 그는 신학자요 철학자요 교수로서 신학과 철학을 서로 다른 학문으로 구분했는데,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와 교회의 가르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분명한 원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으로서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이며 다른 것은 하나님과 관계에 의해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철학이란 은혜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을 사용하여 믿음의 진리를 증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봤다. 이처럼 철학은 신학과는 구별되는 서로 다른 학문이지만, 신학자들이 계시된 교리를 설명하고 변증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문으로 생각되었다. 마찬가지로, 믿음과 이성도 서로 구분은 되지만 상반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데 서로 같이 일하여 결국 똑같은 계시에 도달하는 두 가지 길이라고 봤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아퀴나스의 생애,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내적 믿음의 행위에 대한 이해에 관해 논술을 하면서 믿음과 이성의 관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아퀴나스의 생애
아퀴나스는 1225년 초 나폴리 근교의 로카세카 성에서 아퀴노의 대지주인 란돌프(Landulf) 백작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그를 몬테 카지노의 베네딕트 수도원(Benedicten Abbey)으로 보냈다. 이 수도원은 나폴리의 프레데릭 왕국과 교황령 사이의 접경 지대에 있었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군대가 이 곳을 점령하여 학업을 중단시키기 전까지, 그는 여기서 9년(1230-39)간 기초적인 공부를 했다. 잠시 집에 있다가 아퀴나스는 다시 나폴리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이 대학은 볼로냐의 교황 대학에 맞서기 위해 아퀴나스가 입학하기 14년 전에 호아제가 설립된 대학이었다. 대학에서는 7과목의 교양과목을 공부했다. 문법, 논리학, 수사학, 수학, 기하학, 음악 및 천문학 등의 과목을 공부하였는데, 후대 학자들의 주석이 달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저술들을 소개받으면서 아퀴나스는 철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244년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승, 더 나아가서는 대수도원장이 되기를 기대하였던 부모와 친척들은 이 일로 크게 분개하였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수도승과 수사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13세기의 형편으로 볼 때 수도승(monk)과 수사(friar)는 아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게다가 개인적 재산도 소유할 수 있는 고위 성직자를 추구하는 수도승과,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구걸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사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아퀴나스의 부모와 친척들의 분노를 알아 챈 도미니크 수도회는 비밀리에 아퀴나스를 파리로 피신시키고자 했다. 파리를 향해 가는 도중 투스카니 숙소에서 동료들과 휴식을 처하고 있을 때 아퀴나스는 그의 형들에게 납치되어 몬테 산 지오바니에 있는 그들의 성에 감금되었다. 아퀴나스는 2년간 성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 때 아퀴나스의 형제들은 아퀴나스가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방으로 아름다운 몬테 지오반니(Monte San Giovanni)라는 고급 매춘부를 들여보냈다. 아퀴나스는 펄쩍 뛰면서 화롯불이 붙은 장작을 집어들고서 그녀를 방 밖으로 내쫓았다. 이것은 아퀴나스가 얼마나 거룩하게 살고자 했는가를, 또 얼마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살고자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 후 아퀴나스는 꿈에 천사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 일 이 후로 그는 특별하고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습관적으로, 인간이 뱀을 피하듯이, 여자와 사귀는 것을 피했다”고 아퀴나스의 최초의 전기 작자는 말했다.

아퀴나스가 베네딕트 수도회를 버리고 도미니크 수도회를 택한 것은 비장한 결단으로서, 오늘의 아퀴나스가 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몬테 카지노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는 아퀴나스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영적이고 지적인 욕구를 채워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를 선택한 것이다.

로카세카에서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와 자신의 누이동생의 도움으로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리고 중요한 교부들의 신학을 요약한 책인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의 <명제집>(Sentences)을 공부할 수 있었다. 로카세카에서 풀려난 후 아퀴나스는 파리로 가서 12세기에 세워진 유명한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는데, 특히 중세 스콜라신학에 탁월한 알베르투스 마그누수(Albertus Magnus)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아퀴나스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강의(collatio)를 듣고 롬바드의 명제집에 대한 주로부터 “말없는 황소”(dumb ox)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스승 알버트는 “이 말없는 황소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알버트의 평가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퀴나스는 후에 카톨릭의 대부적인 신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252년 알버트는 아퀴나스가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배웠다고 생각하였다. 아퀴나스는 27세의 나이에 2년 동안 사제로 근무했지만 박사 과정에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알버트는 뛰어난 지성과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가진 아퀴나스로 하여금 상급의 학업을 할 수 있도록 도미니크 수도회의 총장에게 강력히 추천했다. 그 결과 아퀴나스는 석사 학위를 하면서 박사 학위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신학 강의를 받기 위해 파리로 가게되었다. 강의는 성직자와 교부를 위한 교재로 유명한 롬바드의 <명제집>에 관한 것이었다.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4년의 준비 동안 아퀴나스가 행한 <명제집>에 대한 강의록은 그의 뛰어난 지성과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아퀴나스가 공부한 파리 대학은 당시 철학과 신학의 국제적인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아퀴나스는 당시에 그가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학문을 배운 것이다. 1255-56년 사이에 아퀴나스는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교수직 발령을 받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한편 아퀴나스는 교수로 봉사하면서 교황청을 위해서도 일을 했다. 성경 주석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도 했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이교도에 대한 대전>(Summa conra Gentiles)과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이다. 전자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끔 저술된 백과사전식 신학 입문서이고, 후자는 롬바드의 <명제집>을 대신할 목적에서 저술된 아퀴나스 신학의 대걸작으로서,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초보자들을 위한 교재로 고안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1273년, 10월 6일 미사에서 황홀경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이 후 그는 집필을 위한 구술까지도 거절했는데, 한번은 그의 비서가 <신학대전>만이라도 완성할 것을 요구하자 “나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껏 내가 써 왔던 모든 것은 지푸라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비서의 권유를 거절했다. 신비적인 체험 이 후 아퀴나스는 자신의 저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했다. 성경에서도 솔로몬의 영광이 들에 핀 백합화만 못하다고 했지 않은가? 인간의 업적이란 “있는 그대로의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퀴나스는 그가 고백한 대로 저술을 그만 두고 기도와 헌신의로 나날을 보냈다. 아퀴나스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 갔으며 많은 업무로 몹시 지쳐 있었다.

그 이듬해 초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리용에서 공회를 소집했는데, 그 주요 안건은 희랍 정교와 로마 카톨릭교회 간의 화해였다. 아퀴나스는 공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리용으로 가는 도중, 도발적인 사고로 머리에 상처를 입고 파사노바에 있는 씨토 수도숭의 집에서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는 것을 깨달은 아퀴나스는 시편 132:14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를 암송한 후 솔로몬의 아가서를 읽어 주도록 부탁하였다. 그리고 아퀴나스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아퀴나스로부터 고해성사를 받고 나온 사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퀴나스의 죄는 5살 먹은 어린애의 죄 같았다고 고백했다. 아퀴나스는 마지막으로 믿음의 고백 -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그분의 사랑 때문에 연구하고 이제까지 살아왔으며, 그분은 전파하고 그분에 반대해서 가르치지 아니하였으며,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자기의 무지 때문이라는 고백 -을 하고 자기 저술을 후세의 로마교회에 평가와 수정을 일임하는 길이 않은 생애에 아퀴나스는 엄청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주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사업에 일생을 바쳤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존재
아퀴나스의 일생의 관심사는, 그가 5살 때 했던 질문처럼, “하나님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이 질문을 믿음과 이성이라는 상호관계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대한 작업을 <이교도 대전>에서는 철학적으로 세밀하게 다루지만, 그의 명저 <신학대전>에서는 단순하고 간결하게 다룬다.

초기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13세기에 와서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했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론적 변화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해서 가능했는데, 아퀴나스는 이 점에서 플라톤 철학의 방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을 따른 것이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의 서문에서 밝힌 대로, <신학대전>은 롬바드의 <명제집>을 대신해 신학 공부를 하고자 하는 초보자를 위해서 기독교의 중요한 교를 명료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저술되었다. 안쏘니 캐니에 의하면, <신학대전>은 그 방식에 있어서 철학적인 유형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고수되어야 할 입장과 반대되는 세 가지 입장을 각각의 주제별로 논쟁적으로 다루었는데, 중세의 라틴어 구문과 스콜라주의의 전문용어에 익숙하다면 아퀴나스의 논증 방식이 얼마나 부드럽고 명료하며 평에한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신학대전>은 미완성 작품이지만 52명의 교부들과 41명의 교황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퀴나스가 성경과 교회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학대전>이 성경과 교회사에 대한 백과사전적 책(冊)임을 알 수 있다. <신학대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prima pars)은 하나님-하님의 본질, 삼위일체, 그리고 창조-에 대해서 다룬다.
둘째 부분(secunda pars)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처럼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목적을 고찰한 아퀴나스의 윤리학으로서, 인간 심성에 대한 탁월한 연구이다. 아퀴나스는 궁극적인 목적과 행복을 동일시하여 행복이란 세상적인 부, 명예를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고 지적인 덕과 일치하는 행위, 즉 신의 본질을 명상하는 행위에 있다고 봤다. 이 세상의 행복은 불완전한 것이며, 참 행복이란 신에 대한 명상(theoria)에 있다는 것이다. 캐니는 이러한 <신학대전>의 둘째 부분을 아퀴나스의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극찬했다.
셋째 부분(tertia pars)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 성례 · 영생에 대해서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요 구세주이며,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시고 인간에게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신 분이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아는 것은 모든 신학을 연구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한 불변성이다. 안셀무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있다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것”(natura essendi)이다. 그래서, “있다는” 존재의 본성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셀무스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존재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 개념은 독특하다.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으로 구성된 준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있다”라는 동사가 지시하는 “능동성”(the pure activity)이라고 했다. “있다”는 생성이나 현재로부터 미래로 투사하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필요치 않은 가장 완전하고 스스로 있는 존재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은 그대로 있음을 하나님을 묘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며 피조물의 원인이 되신다. 그래서 참다운 신지식은 술어의 부정에 의해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유비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여기서 “유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닮은, 즉 비례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원인이시오 피조물은 그 결과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떤 비례 관계가 성립하는데 이것이 소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개념에서 “존재”한다는 언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필수적이며 객관적인 술어가 된다는 말이다.

질송에 의하면 아퀴나스주의의 모든 증명은 다음 두 가지를 전제한다. 즉 ‘하나의 원인을 요구하는 감각적 실재의 실존’과, ‘그 감각적실재의 실존은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에 의해서 하나님이라는 제일 원인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변화와 가능성에서 추론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변하는 것인데, 이것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부동의 원인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부동의 원인자가 하나님이다.
둘째는 원인과 결과에 의한 증명이다. 자연과 과학에서 스스로 원인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제일 원인자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다. 이 제일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다.
셋째는 필연성에 의한 증명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필연성 자체이시므로 자신은 필연성이 필요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필연성의 원인에 의존하는데, 이 필연성의 원인이 하나님이시다.
넷째는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완전성에 대한 정도에서 도출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 정도의 차이가 있다. 선한 것을 예로 들면 덜 선한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선한 것에 이른다. 이 지고의 선이 하나님이시다.
다섯째는 자연의 질서와 자기의 원위치로 돌아가려는 성향에서 도출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질서와 목적이 있다. 이런 질서를 유지시키시며 성향을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상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에 대한 타당성의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인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그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Ⅲ. 믿음과 이성
아퀴나스에 의하면 ‘믿는다’는 것은 “사고를 수반한 동의이다”(To believe is assent with cogitation).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말하거나 믿음의 정의가 아니라 믿음의 내적인 행위(To believe means the inner act of faith)를 mlal한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사고를 겸한 동의”라는 명제는 아퀴나스의 것도, 성 어거스틴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퀴나스가 왜 어거스틴의 믿음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는가?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정의는, 내가 지금 설명할 것이지만, 믿음을 다른 모든 지적 활동과 구분케 하는 좋은 정의이다”라고 말했다. 환언하면 아퀴나스는 동의를 겸한 사고(a concomitant cogitation)가, 믿음(believing assent)이 어떻게 다른 지적인 행위-의심, 의견, 과학-와 구별되는가를 성명해 준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믿는다는 것은 사고를 수반하는 동의” 라는 아퀴나스의 명제는 믿음의 내적인 행위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인가? 아니면 신학적이면서 실존적인 이해인가? 믿음과 이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질문은 아퀴나스의 믿음의 내적인 행위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질문으로서, 이 질문을 명쾌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믿음의 정의에 대한 역사, 2) 믿음의 대상, 3)믿음의 원인, 4) 믿음의 대상과 의지의 관계, 5) 믿음과 이성의 관계이다.

1. 믿음의 정의에 대한 역사
역사적으로 본다면 아퀴나스는 믿음의 행위에 대한 정의를 성 어거스틴으로부터 인용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사고를 수반한 동의”로서 믿음의 정의에 대한 제반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 성 빅토르 휘(Hugh of St. Victor)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런 젬에서 그의 신학은 중세 신학에 속한다. 어거스틴은 “사고”(cogitation)-여기서 ‘사고’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3:5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라는 말을 펠라기우스의 신학에 반대하는 논문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느니라.” 어거스틴의 요점은 믿으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래서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논쟁에서 나타난 “사고”라는 말은 아퀴나스의 믿음의 내적인 행위를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형상을 논하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로(cogitation)를 구분하여 “탐구적이고 선별하는 정신”(an inquistive, discerning activity of mind)을 사고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오브리엔(O'brien)은 이와 같은 정신의 이해는 어거스틴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 했다.

성 빅토르 휘(Hugh)에 의하면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에 관한 의견보다는 강하고, 과학보다는 약한 마음의 확실성”으로 정의했다. 휘의 믿음에 대한 정의는 무지 · 의심 · 의견 · 과학과 같은 정신의 작용들과 믿음을 비교하도록 해 준다. 그는 어거스틴의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요점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의 믿음에 대한 성격과 가치의 우위성을 인정한다. 위는 피터 아블라(Peter Abelard)의 다소애매모호하게 정의된 믿음에 대해 반박하면서 믿음의 절대 확실성을 강조한다. 아블라는 중세 신학에 있어서 철학적 방법을 통해 믿음의 의미를 파악하려도 시도한 최초의 신학자로서, 그는 전통적인 믿음의 정의를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Theologia Christimama)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이며, 보지 못한 것의 증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 버나드(St. Bernard)나 성 틸리의 윌리암(Wiliam of St. Thiery)은 아블라의 정의는 믿음을 철학적으로 이해한 변형된 정의라고 반박했다. 아블라는 믿음을 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과학 · 지식과 대조시켜 “의견”(existimatio)으로 정의하였다. 즉 믿음을 성경의 진리에 대한 동의로 본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긍정적인 공헌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의견이나 혹은 그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은 믿음의 확실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믿음이란 단순히 지식이나 과학과 구별되는 의견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상황에서, 즉 믿음을 의견으로 정의한 아블라의 정의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휘의 믿음에 대한 정의-믿음을 과학과 의견의 중간 위치에 놓으면서, 믿음을 지적인 동의의 행위와 비교한 아블라의 의도도 받아들인 휘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여러 가지 지적인 행위로부터 믿음의 행위를 구별하고 명료화시켜야 할 관점에서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믿음의 정의를 이해한 것이다. 그는 믿음의 내적인 행위를 다른 선구자들보다도 더 명료하게 설명하게 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달한 그의 통찰력과 그의 경건한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2. 믿음의 대상
아퀴나스에 의하면 믿는다는 것은 “사고를 수반한 동의”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대상은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은 “제일 진리”(the first turth)이다. 제일 진리는 그의 지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인식의 행위는 도든 존재와 지성의 원인이요 저울이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최상의 , 그리고 원초적인 진리”이다. 제일 진리는 비인격적인 대상에서 추론한 진리가 아니라, 최상의 진리이요 원형적인 진리이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성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들-예수님의 인간성, 성례,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믿음의 덕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아퀴나스는 제일 진리는 우리가 바라는 실체이며 보지 못한 것의 증거라 말한다. 이와같은 믿음에 대한 이해는 믿음에 대한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올바른 믿음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보여지는 믿음의 습관(habitus)에 대한 것이다. 믿음의 습관(habitus)이란 습성을 형성하는 대상에 의해서 생기는 행위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행위는 의지의 대상인 선이나 목적, 그리고 정신의 대상인 진리를 갖고 있다. 신학적인 덕으로서 믿음은 하나의 실체를 같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대상과 목적으로서 “제일 진리”이다. 따라서 믿음의 대상과 목적은 서로 연관을 갖고 있다.

믿음의 올바른 대상은 보이지 않는 “제일 원리”와 제일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제일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있는 믿음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가? 환언하면, 인간은 믿음의 행위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데, 그 심리적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아퀴나스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사고를 동반한 동의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내적 행위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인가? 아니면 신학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이해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믿음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3. 믿음의 원인
아퀴나스에 의하면 믿음에는 두 가지 필수적인 조건을 필요로 한다. 하나는 믿도록 하는 제안이며, 다른 하나는 믿도록 하는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이 믿도록 하는 원인이다. 그 이유는 믿어야 할 것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는 믿도록 하는 제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왔지만 우리에게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제안은 두 가지 자료로부터 온다. 하나는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인 계시에 의해서이다. 전자의 경우는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하나님 계시의 내용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조명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이 계시의 내용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근거로써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따라서 믿음의 시작은 성경에 묘사한 하나님의 역사적인 계시를 들음으로써 온다. 우리는 이 계시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이다.

동의를 하게 하는 데에도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설득하는 원인이다. 예를 들면, 기적에 대한 동의나 믿도록 하는 인간적인 설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득이나 기적은 동의하도록 하는데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기적을 보거나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기적, 예언, 교회사, 믿음과 이성의 조화 등을 인간으로 하여금 믿도록하는 합리성과 신뢰성의 동기라 하였다. 믿음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내용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신뢰성에 대한 동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믿음의 동인은 아니다. 믿도록 하는 객관적인 동인은 유일한 하나님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에 대한 믿음은 인격적인 응답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선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의 행위는 주관적이며 지적인 동의일 뿐이다. 이 때문에 아퀴나스는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내적인 믿음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은혜를 통해서 내적으로 믿도록 감동시킨다”고 말한다.

4. 믿음과 의지
믿어야 할 것에 대한 내적인 원인은 제일 진리인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마음이 믿어야 할 것에 동의하도록 은혜를 통해서 인간의 의지를 감동시킨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아퀴나스의 믿음의 정의-믿는다는 것은 사고를 동반한 동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뿐만 아니라 아퀴나스의 믿음에 대한 이해가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실존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도 대단히 중요하다. 의지의 원인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아퀴나스는 의지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the motions of mind on will)과 마음에 의한 의지의 움직임(the motions of will on mind)을 구별한다. 즉 전자는 의미를 주고 행동하도록 하는 대상을 의미하고, 후자는 행동을 실행하도록 하는 목적이라고 말한다. 환언하면 이성적인 힘으로써 의지는 영혼이 힘을 발동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의지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첫째, 진리란 보편적인 선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의지는 마음이 그것에 걸맞게 행동하도록 움직이게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행복은 명상을 통해서나 사려 깊은 분별을 통해서 얻어진다.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음은 행복을 보편적인 선으로 이해하며 그래서 의지는 마음을 움직인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상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고를 통해서나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얻을 수가 없다. 영생은 이토록 좋기 때문에 의지는 믿어야 할 것에 대해 끌리게 되며 동의하게 된다. 이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믿음으로 붙잡도록 하는 것에 동의하도록 의지는 마음을 움직인다.

위에서 언급한 두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의지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에 의한 의지의 움직임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의 의지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은 마음이 보편적인 선으로서 행복을 인식한 데서 온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마음은 영생을 인삭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지는 무엇인가 외적인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동의를 하게 된다. 이 외적인 원인은 하나님이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동의하도록 의지를 움직이시는데,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움직이신다. 아퀴나스는 이 은혜를 “활동적인 은혜”(operative grace)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동의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동의는 절대적으로 확실히다, 왜냐하면, 제일 진리이신 하나님이 마음이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 동의하도록 의지를 움직이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동의란 서로 상충된 명제에 대해서 확실성을 가지고 붙잡을 수 있는 사려 깊은 분별력(judgment/sententia)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레이스(L.M. Regis)는 말하기를 아퀴나스는 항상 동의라는 말을 긍정과 부정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상충된 명제에 대해서 연관시킨다고 했다. 아퀴나스가 동의라는 말을 믿음의 행위에 적용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아퀴나스에 있어서 믿어야 할 것에 동의라는 명제는,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마음과 의지의 상호작용에 대한 심리학적인 관계를 사용하였지만, 믿음에 대한 단순한 철학적인 이해가 아니라 신학적인 이해인 것이다.

요약하면, 마음(mind)이 믿어야 할 것들에 대하여 동의하도록 하나님은 의지를 움직이신다. 그래서 마음은 완전한 이해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지고선을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마음의 이해를 깊은 사고(cogitation)라고 한다. 여기서 깊은 사고란 단순한 지적 행위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의 행위는 과학에 있어서의 이해와 같은 것이다. 깊은 사고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의 지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합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탐구와 비교라는 점진적인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한다. 이처럼 “사고”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 마음의 특별한 성향에 기인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사로”란 마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하게 획득하고자 하는 마음 자신의 획득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믿음의 내적인 행위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고를 “진리에 완전히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마음의 몸부림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진리 획득을 위해 몸부림(a deliberate act of mind)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정신의 행위를 “마음의 몸부림”(restlessness of heart)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사고란 완전한 진리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분명한 확실성이 없는 지식이란 아직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것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문제인 것을 보여준다라고 아퀴나스는 말한다. 때문에 확실한 믿음은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이해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은혜를 통해서 움직이시는 ?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고를 수반한 동의로서 믿음의 내적인 행위는 다른 지적인 행위-의심, 의견, 과학 등-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의견이란 서로 상충되는 주장에서 어느 하나에 동의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동의한 것이므로 이 동의는 불확실하다. 의심의 경우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상충된 주장에 대해서 어느 하나에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성이 결여된다. 과학에 있어서 과학적인 지식이란 사고와 확신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런 점에서는, 과학적인 지식이란 사고와 확신이 서로 협력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과학적인 지식에 있어서는 사고가 동의를 하게 하며 동의는 사고를 멈추게 한다. 이와 같은 이성의 움직임은 과학적인 지식과 믿음의 내적은 행위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과학적인 지식에 있어서 사고는 동의를 유발시키며 동의는 사고를 잠재우지만, 믿음의 행위에 있어서 사고를 동반하는 동의는 사고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자극하고 도전케 한다. 환언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통해서 마음이 믿어야 할 것에 대해 동의하도록 의지를 움직이시고, 이 의지는 마음을 움직이며, 마음은 하나님의 지고선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하나님의 지고선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하지는 않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5. 믿음과 이성
이 글 전반부에서 우리는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믿어야 할 것에 대한 동의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했다. 그것은 이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하게 파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의를 하도록 한 중재자가 제일 진리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해서 평화롭게 되며 사고의 몸부림이 그치게 된다. 그래서 동의는 확실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성은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은 내적인 믿음의 행위는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변적인 이해에 있어서는 갈등이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은 단순히 신학적인 믿음의 내적 행위에 대한 이해를 신학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이해라도 부르고 싶다. 그래서 사고를 동반한 동의로서 믿음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철학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적인 행위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열정과 전인격적인 참여가 수반된 실존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세와 참여가 있는 신앙은 하나님을 철학자의 하나남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퀴나스를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하여 신학을 체계화한 사람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숲은 보고 나무의 진가를 모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달한 철학자이기 전에 신학자였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다시 말하면, 사고하는 방법,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방법, 인간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도입했던 것이다. 즉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자신의 신학 체계를 명료화하고 분석하는 데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자체를 신봉한 것은 아니었다. 질송의 평가와 같이 신학의 본질을 변형시키지 아니하고 철학을 신학에 도입한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조직 신학자였으나, 무엇보다 그는 그 일생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명료화시키는 데 헌신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집념을 가지고 그의 짧은 인생(49세에 죽음)을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아낌없이 바쳤는데, 그 결과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카톨릭의 대부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아퀴나스는 믿음을 “사고를 수반하는 동의”로 받아들이면서 이 정의를 신학적이고 실존적으로 분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거스틴의 믿음의 정의를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믿음의 내적인 행위로 이해하게 했다.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한 이해는 철학적으로 명료하며 신학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질적으로 의심, 의결, 확신, 과학과 구별됨을 마음의 인식 작용을 통해서 검증한 것은 그의 긍정적인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단순히 이성적인 것도, 그렇다고 해서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전인격적인 관계이다. 믿음에는 동의와 사고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로 마음이 의지를 움직여서 믿어야 할 것에 동의하도록 하신다. 따라서 사고를 수반한 동의는 단순히 믿음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내적인 믿음의 행위를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명료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믿음의 내적인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의지의 움직임으로 본 것은 적절했지만, 마음에 확실성을 주는 데 있어서 성령의 절대적인 역할을 중요하게 다루지 아니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Ⅲ. 정리
아퀴나스는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사람이다. 그는 49세라는 짧은 일생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책이 그의 명저 <신학대전>이다. 아퀴나스는 당시에 주류를 이루는 철학 중에서 플라톤 철학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밝히고자 했다. 이것은 아퀴나스가 성경의 계시 없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증명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구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이르는 길을 인정하였지만, 신 존재 증명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이르는 계시의 길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르는 이성의 길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고자 했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이란 “있음”의 능동성(the pure activity)이다. 그래서 스스로 있는 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아퀴나스는 “존재”라는 말의 형이상학적이며 신학적인 의미를 철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깊이 파헤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란 사고를 동반한 동의”라는 말은 믿음에 대한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믿음의 내적인 행위를 신학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분석하고 명료화시킨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믿음은 다른 지적인 행위들-지식, 의견, 확신, 의심-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검증했다. 이것이 아퀴나스의 공헌이다.

아퀴나스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성을 주도면밀하게 구분한다. 아퀴나스에 있어서 믿음과 이성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 서로 다른 두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이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함께 일한다. 이성은 믿음의 진리를 설명함으로써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인간 마음을 준비시킨다. 이성은 믿음의 진리를 설명하고 변증하도록 도운다. 따라서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이성의 역할은 믿음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퀴나스는 자기도 모른 사이에 이성의 힘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자연적인 이성에 치중하여 중생된 이성을 소홀하게 다룬 점이 아쉬운으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제 3부(tertia pars)에서 칠 성례(세례, 성찬, 견진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신품성사, 혼인성사)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있지만 이는, 성례와 성찬을 제외하고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퀴나스가 말하는 성찬조차도 빵과 포도주가 우리 주님의 피와 살로 변한다는 화체설로서 비성격적인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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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반 (12세기) 기독교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성 버나드는 수도원 공동체, 교황청, 그리고 세속 통치자에게까지 두루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도 버나드의 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루터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나는 버나드를 모든 수도사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누고보다도, 심지어 성 도미닉보다도, 그를 더 좋아한다. 그만이 교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고 열심히 연구해 볼만한 사람이다." 탐부렐로는 최근 그의 연구에서 버나드와 칼빈의 신학 사상을 비교 · 검토한 후 칼빈의 개혁 사상이 버나드의 사상에서 적지 않게 유입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본 장은 이러한 학구적인 토론이 지속적으로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버나드의<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국어 번역본으로도 나왔는데, 이 번역본에는 버나드의 글 이외에도 성 틸리의 윌리엄(William of St. Thierry)과 리볼의 앨레드(Aelred of Rievaulx)의 글이 실려 있다. 우리는 편의상 버나드의 글만 선택하여 거론할 것이다.

Ⅰ. 버나드의 생애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는 1090년 부르군디의 퐁트왕 르 디종(Fontaines-les-Dijon)에서 비교적 낮은 귀족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버나드의 부친 테셸링(Tescelin)을 제 1차 십자군원정(the First Crusade, 1090-99)의 기사로 출전할 정도로 카톨릭 교리에 헌신적이었다. 버나드의 모친(Aleth 혹은 Aletta) 역시 경건한 분이었는데, 자녀들을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양육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버나드가 17살 되었을 즈음에 사망하였다. 모친의 사망은 버나드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후 버나드는 세상의 출세보다 영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세상의 모든 명예와 위로를 버리고 다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가난하게 살기 위해 1112년 시토 수도원(Citeaux Order)에 들어갔다.

시토 수도원은 당시 많은 수도원들이 베네딕트파의 청순성을 저버리자 수도원의 개혁을 위해 일어난 수도원 정화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수도원으로서 부르군디 지방의 몰렘 수도원장인 로버트(Robert of Molesme)와 그의 추종자 몇 명이 몰렘에서 빠져 나와 1098년 디종(Dijon) 근처의 시토에 설립한 것이다. 이들은 광야와 같은 시토에 오두막을 짓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기기 시작했다. 교회사가(敎會史家)인 딘슬 리가 시토 수도우너의 모습을 설명하기를, 이들은 수도사들의 염색한 검은 제복들 대신에 자기들이 직접 짠 [양털 담요를] 걸치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작은 교회당에 금은으로 만든 성상이나 십자가를 일체 두지 않았다. 클루니 수도원에서 볼 수 있었던 대리석도 없었으며, 가장 소박한 신부들의 제복을 사용하였으며, 후기 클루니파 교회당들을 아름답게 치장한 조각이나 문양들도 거부하였다. 이들은 소박하게 예배를 드렸으나 그 찬양이 너무나 아름다워 부르군디 공작이 이를 들으러 찾아오곤 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교회당을 동정녀 마리아―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자, 특별히 수도사들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게 헌정하였다.

버나드가 시토 수도원을 찾아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창 감수성이 강한 때에 모친을 잃은 그가 마리아를 높이는 시토 수도원에 매력을 가진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따뜻한 여성의 상징인 마리아는 그에게 자비와 사랑이 풍성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버나드는 이 수도원에서 3년간 철저하게 자기 부인(否認)을 함으로써 시토 수도원이 요구한 모든 규정을 가장 잘 지킨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너무나 깊이 명상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자기 방의 “천장이 평평하였는지 혹은 무늬가 있었는지, 창문에 유리가 하나였는지 혹은 3개였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는 농노처럼 일하였고, 제복을 입은 채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의 침실에서 잤으며,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얼마 안되는 식사마저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기도와 철야를 계속하였다.

수도원 입소 3년 후 버나드는 클레르보의 시토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참으로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겨우 25세의 약관인 그가 클레르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장에 취임한 것이다. 버나드는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모든 시토 수도원의 확장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유럽 세계의 통치자들과 교황청의 실력자들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153년 그의 임종시까지 그는 “70개의 수도원을 직접 설립하였고 그 밖의 90여 개의 수도원을 그의 권위 아래 두었다.” 후술하겠지만 버나드는 일개 수도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어느 통치자나 교황보다도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1153년 8월 20일 사망하였다.

Ⅱ. 버나드와 제 2 차 십자군 운동
십자군 운동은 모하메드의 추종자들인 셀주크 터키인들(the Seljuk Turks)이 지속적으로 동로마제국을 위협하자, 동방황제 콤네누스(Alexius Comnenus)가 1095년 로마 교황에게 지원을 부탁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Ⅱ)는 이 기회에 성지를 탈환하고 동방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유럽의 군주들에게 단결하여 싸울 것을 부탁하였다. 제 1차 십자군 원정(1096-99)은 성공리에 끝나 예수살렘과 그 인접의 점령지에 라틴제국(the Latin Kingdom of Jerusalem, 1099-1291)이 성립되었다. 에뎃사, 안디옥, 트리폴리는 라틴 제국의 봉토(the fiefs)가 되었다.

사라센 모슬렘(the Saracens)들은 1144년 라틴제국의 봉토 중의 하나인 에뎃사(Edessa)를 재점령하였다. 당시 교황은 유게니우스(Eugenius Ⅱ, 1145-53 재위)로 버나드의 옛 제자였다. 교황은 스승인 버나드에게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위해 설교를 부탁하였고, 버나드는 이를 쾌히 수락하였다. 버나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드를 설복시켜 군대를 일으키도록 했고 불란서왕 루이 7세에게도 원정을 요구했다. 제 2차 십자군(1147-49)은 이렇게 해서 구성되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독일군은 회교도들과 싸우기 전에 독일 경내에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버나드의 재빠른 개입으로 중단되었다. 싸움은 적의 진지에서 하는 것이지 자국 내에서 이방인을 살육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 2차 십자군은 다마스커스에서 모슬렘의 복병에게 습격을 당해 크게 사기가 저하되었는데, 동방제국의 비협조로 인해 결국 이코니움(Iconium)에서 거의 전멸 당하였다.

버나드는 “성지에서의 위대한 기독교 승리가 헤아릴 수 없는 이교도들을 회심시키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길을 예비할 것”으로 믿고 십자군 전쟁을 고무시켰지만, 일단 패배의 소식을 듣자 십자군병들이 “하나님보다 나를 탓하는 것이 더 낫다”라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Ⅲ. 버나드와 아블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당시 3가지 해석이 있었다. 각각의 해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해석은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C. 1033-1109)의 만족설을 들 수 있다. 안셀름은 그의 저서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이 마귀를 무너뜨리지도 않고 마귀에게 짓밟힌 채,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겠다고 하니 이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얼마나 거스르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이 승리는 사망의 협곡을 따라가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마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안셀름은 마귀에게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신이자 인간(a God-man)인 그리스도라고 주장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인간의 죄를 사해줄 수 있다고 보았다.

두 번째 해석은 피터 아블라(Peter Abelard, 1079-1142)의 대속설이다. 아블라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모범으로 보았는데 이는 정말 존재론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었다. 제베르그는 아블라의 대속이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의 한 계시로써, 그리고 한 교사와 한 모범으로써 죄 범한 인류에게 그의 성자를 보내셨다. 이 수단에 의하여 범죄한 인간들 속에서 신앙과 사랑이 있어나게 된다.

세 번째 학설은 버나드의 속전설이다. 버나드는 인간의범죄로 사탄이 인류를 통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탄의 통치권을 박멸하는 유일한 길은 사탄에게 속전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바로 사탄에게 이 속전을 지불하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버나드는 아블라의 이론에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헌신에 귀착시키고 있음에 반하여 중생에는 일언반구가 없다”고 추궁하고, 특히 그리스도를 일개 도덕 선생으로 전락시켰다고 비난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블라의 주관적 대속설이나 버나드의 속전설이 모두 문제가 있으나 당시에는 버나드의 인품과 영향력 대문에 아블라만 1141년 생스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Ⅳ. 버나드의 종교개혁
버나드의 소도원 교욱은 전통적 흑의 수도사(black monks) 방법 - 수사만을 위한 교육 방법을 따르지 않고, 평신도 교육을 위한 백의 수도사(white monks) 방법을 채택하였다.이는 평신도들에게 수도원을 개방함으로써 청빈과 헌신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귀족, 학자, 장인, 기술공은 물론이고 동정녀와 과부, 심지어는 창녀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수도원 이용법을 채택하였다. 이들 평신도들이 일정 기간의 훈련을 통과하여 수도사가 되기를 희망할 경우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던 것이다.

버나드의 종교개혁의 희망은 그의 제자가 1145년 교황이 되었을 때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교황에게 쓸데없는 소송 사건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 것, 교황청에서 각종 음모가 발생하지 말도록 노력해 줄 것, 면죄부 발행과 교황이 하사하는 봉록제도의 오용을 금할 것, 성직 매매를 금해줄 것 등을 건의하였다.

이 외에도 버나드는 수도원 규율이 해이해진 것을 곧잘 지적했으며, 부도덕한 성직자의 성직 임명을 반대하였다. 한 번은 특별한 사유없이 파리 주교를 해임한 프랑스 왕을 책망하기도 했다.

Ⅴ. 버나드의 <하나님의 사랑>
버나드의 <하나님의 사랑>은 수도원의 문헌으로 “하나님 앞에서 명상을 불러일으키도록 반성과 명상 가운데서 신중하게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설교와 서신, 그리고 논문으로 구성되었는데, 버나드의 아가서 설교는 명상을 위한 기록으로 계획되었다. 당시 서신은 공동체들 사이의 의사 전달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는데, 버나드는 서신 속에 그의 교리적 가르침과 따뜻한 우정을 담고 있다. 한편 논문은 서신의 확대 형식으로,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쓴 것으로서,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쓴 것으로서, 공중 집회시에 낭독되기도 하였는데 수도사들이 논문을 경청했기 때문에 대부분 영적 지시 또는 권고의 서신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우리는 설교 · 서신 · 눈문의 형태상의 구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사랑이란 무엇인가?
버나드는 사랑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접 그의 글을 읽어보자.

사랑의 제 1단계: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본성이 너무 연약하고 유약해서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인간이 자신을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육신적인 사랑이다. …거센 파도처럼 너무 과해져서 절제의 한계를 넘어 방종에 빠지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본성이다.

사랑의 제 2단계: 사람은 자신의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스스로 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점들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사랑의 제 3단계: 사람은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인간은 …계속적인 의존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향유하는 것을 배운다. 이 하나님과의 친교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를 발견하여 사랑을 돈독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결핍을 넘어서게 한다. …이제 그는 순수하게 사랑하며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사랑 가운데 순종한다. …이 사랑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또한 기쁨을 준다.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요일3:18) 이것은 참된 사랑이다.

사랑의 제 4단계: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의 제 4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제 하나님 안에서만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은 높고 비옥하며 풍요로운 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이 생에서 이 사랑을 맛보는 특권을 누린 자는 복되고 거룩하다. 자신이 무로 축소되기까지 자신을 내어버리는 것은 신적인 체험이지 인간적인 감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이여! 오 그윽하고 은혜로우신 감정이여! 사심이 섞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연합하여 그윽해진 순결하고 깨끗한 의지의 동기여!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곧 경건하게 되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포도주 통에 떨어지면 포도의 맛과 색깔로 변하여 없어지듯이 이 상태도 그와 같다. 쇠막대기가 불에 달구어지면 불꽃에 발갛게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그와 같다. 공기가 햇빛을 받으면 그 자체가 햇빛으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간적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하여 변화된 성도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버나드는 이와 같이 4단계의 사랑을 말하고 난 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마지막 4번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사랑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어지며,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지만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이 사랑은 부활시에 완전히 체험된다고 말한다. 이 영원한 사랑이 나중에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버나드는 우리에게 삶의 현장에서, 비록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이 사랑을 체험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인가?

2.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
버나드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한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고, 문을 두드린즉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고, 구한즉 받기 때문이다. 버나드의 기도는 다분히 묵상 기도이다.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도이다. 그는 이 기도를 통해 두 가지의 황홀경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지성의 황홀경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의 황홀경이다. 전자는 밝아지는 것이고, 후자는 불붙는 것이다. 전자는 지식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헌신에 대한것이다. 이 부드러운 성질의 감정들, 즉 사랑과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는 마음과 열심히 가득한 영적 활력은 분명히 … 얻게 된다.

버나드는 황홀경을 얻기 위해 무분별한 감정 발산이나 감정 이입을 경고한다. 감정이 충만하여 성령 세계를 도가 넘게 강조하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버나드의 다음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자.

지식이 없는 열심은 참을 수 없다. 따라서 열심히 있는 곳에는 역시 분별, 즉 사랑의 환화제가 필요하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효과가 없기 때문에 분별을 잃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해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열심이 대단하고, 영적으로 열정이 대단하며, 사랑이 보다 넓어질수록 또한 열심을 억제하고 정열을 다스리며 사랑을 완화시키기 위해 보다 분별력 있는 지식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결국 버나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에 취하는 것, 즉 사랑의 교제에 함몰되는 신비의 황홀경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는 위험을 동시에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교리 부재로 종종 일어나는 종말론적 황홀경은 성경 지식의 결핍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진다. 신비를 강조하면서도 잘못 된 신비주의를 비판하는 버나드의 신학은 훌륭한 것이다. 버나드가 우리에게 내적 영성을 개발할 수 있는 침묵과 독거의 기도를 여러 번 가르쳐 주고 있는데, 이 분야의 연구도 보다 활발히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본다.

3. 겸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는 것은 겸손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겸손의 시작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바로 알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섬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를 스스로 속이는 자만과 교만에서 나오고, 자기 사랑에 그 죄악의 뿌리를 두고 있다.

참으로 겸손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형성된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죄인으로 낮아지시고 죄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셨다. 십자가상의 죽음이야말로 죄인이 받을 형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이신 주님이 벌거벗겨진 창피를 당하셨다. 이와 같이 창피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나의 유익으로 받아들은 자야말로 참으로 겸손하다.

또한 겸손한 자는 지식의 교만을 떨지 않는다. 겸손 없는 지식은 근심의 근원을 알기 때문이다. 지식이 있는 자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의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겸손한 자는 지식을 봉사와 사랑과 절제를 위해 취한다. 그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열심히 섬기기 위해 그의 지식을 “사랑의 불 위에 굽고 영혼의 훈련에 의해 철저하게 소화”시키려 한다.

4. 우정
참된 우정은 어떤 이상향을 미리 설정하고 그 공식 속에서 친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참괸 우정은 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그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점이 많아도 단지 그가 나의 우정의 대상이요, 친구라는 것 하나 때문에 그에게 “모든 관심을” 쏟아야하는 것이다(같은 쪽). 이 얼마나 멋진 인간과인가!

Ⅵ. 정리
버나드의 인품은 참으로 놀랍다. 그는 교황이나 추기경에 오를 수 있는 자임에도 불고하고 그 길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제자를 교황으로 세우고 그 교황을 섬겼다. 많은 군주들과 교황청 관리들, 그리고 수도원장들이 그에게 자문을 구할 때 그는 거만을 떨지 않았다. 분쟁을 화해시키고 나면 그는 다시 일개 수도원의 수사로 조용히 은거하였다. 그는 12세기의 큰 인물이었지만, 평화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운둔과 명상을 즐겼던 사람이다. 세속의 영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심취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12세기 교회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되었다. 모든 것을 주와 그리스도를 위해 버렸을 때 그는 명예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버나드의 지도자 상을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도 배웠으면 좋겠다.

버나드는 중세 사람이지만, 종교개혁을 강력히 지향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모든 지혜를 찾았고 성경 해석도 성경을 통해 그 뜻을 찾았다. 그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관을 일관성 있게 주장하는 것은 16세기 종교 개혁자의 사상의 틀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버나드 신학에도 역시 약점이 있었는데 이제 이에 대해 살펴보기고 하자.

버나드는 일찍이 모친을 잃었기에 카톨릭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있었다. 그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심은 자칫 잘못하면 마리아 숭배로 전이될 위험이 있었다. 이는 마리아를 예배하거나 숭배하지 않는 개신교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예정론이다. 버나드와 칼빈은 예정론 특히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갖는다. 칼빈은 예정론을 철저히 받아들였지만 버나드는 “예정의 절대적 확신을 우리는 갖지 못한다”(Certitudinem utique non habemus)고 증언했다. 그러나 버나드는 절대적 확신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의 신념까지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구원의 희망을 견지하고 쓸데없는 의심이나 고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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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준기 교수 약력
미국 노스이스턴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역사학과 졸업(B.A)
동 대학교 대학원 졸업 (M.A)
시카고 대학교 졸업 (Ph.D)
동 대학교 신학대학원 (Postdoctorate)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 졸업 (D.Min. in Missiology)
미국 노스팍 대학교 방문교수 (Visiting Professor)
현 광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신학대학원장

저서........
우찌무라 간조와 김교신의 사회비평(Social Criticism of Uchimura Kanzo and Kim Kyo-Shin)
대학생 성경읽기선교회 약사(A Short History of University Bible Felloship)
선교적 문화비평, 미국 대각성운동사, 청교도 인물사, 기독학생 운동사, 복음운동사
사막교부들의 영성, 자서전의 영성
고전과 인물을 통해서 본 기독교사상 - 고광필. 정준기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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