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Darwin)
19세기 중엽에 다윈이 생물학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는 지질학 분야에서 허튼과 라이엘이,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이룩한 성과와 비교된다 하겠다. 예컨대, 다윈은 현재적으로 알려진 힘의 시각에서 사물을 설명하였다. 그는 유명한 세계 일주 여행기 The Beagle에 자기가 관찰하였던 여러 섬들과 핀치새들과 같은 대상들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바 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정원에 잡초들의 자라는 양상을 관찰하였다. 잡초의 생태계에서는 다른 잡초를 질식시키고 생존한 잡초의 개체군(個體群)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적 모델은 두 가지 핵심 본질에 근거한다. 첫째로, 어떤 개체군에서도 변화와 변이는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둘째로 어떤 형태로건 적자생존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는다. 즉, 개체군들은 각기 그 자체 내부에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적자가 생존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적자생존이 후손 생산을 잘 하려는 능력이라면, 이도 또한 사실임은 당연하다.
당시 다윈의 이론은 현재 관찰될 수 있는 힘의 시각에서 설명하려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론이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이 현재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내용의 지지를 받아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웠다.
다윈의 이론이 초래한 결과는 어찌 보면 뉴턴의 이론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관념을 확립하는 측면에서는 뉴턴의 충격과는 결코 같은 성질의 것일 수는 없다.
다윈 이론이 초래한 결과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크게 우려되었다. 첫째로 기원에 대한 믿음에 미친 영향이다. 인생과 세계, 그리고 우주 기원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끼친 다윈의 충격은 의심할 바 없이 크다. 1895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우주생성에 관한 창세기 1장의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1859년 이후, 창세기 초두의 章들의 기사 내용의 진실성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창세기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고 있었지, 어떤 알레고리나 시, 또는 하나님이 그와 같이 창조하셨다는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구전진술(口傳陳述)로는 믿지 않았었다.
둘째로 다윈이 제기하였던 인간관은 더욱 의미심장하였다.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은 사실상 인간기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는 나중에 가서 취급한 것이다. 그의 관점으로는,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로서 원숭이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과의 사이에 있는 간극이 그리 광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윈이 그의 만년에 또 다른 하나의 저서,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 (The Expression!! at the Emotions in Animals and man)'을 탈고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저서는 여러 측면에서 종의 기원 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그는 생명체의 생존의 가치의 측면에서 평가할 때 생명체의 신체적 구조보다는 그 생명체의 행동 양식에 더 많을 역점을 두었다. 다윈은 기원에 관한 그의 최초의 이론에서 생명체의 외적 구조가 생존환경에 적응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유리한가를 설명하였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에서 생명체가 취하는 어떤 특정한 행동 형태의 표현에 주목하였다. 인간은 왜 어떤 특정한 행동 특징들을 가지는가? 그런 특징들은 진화에 유리할까?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생존환경 적응에 불리했을까? 예컨대 인간은 왜 얼굴을 찡그리고, 또 무시무시한 얼굴 표정을 지을까?
여기서 그는 그의 종전의 이론의 시각으로, '그런 능력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라고 물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원시인의 동굴주거지에 송곳니를 세우고 호랑이가 기어들었다고 상상하자. 거기 살던 사람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사람이 생존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지 않았을까?
이 저서에서 찰스 다윈은 역시 인간의 감정표현을 얼굴을 찡그리고 으르렁거리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의 감정표현과 연관하였다. 개코원숭이의 군서지의 생활양태를 필름에 담은 것이 있다. 그들은 군서지에 접근하는 대상이 있으면 사람이건 동물이건 상관 않고 무작정 진흙이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고 먹던 찌꺼기를 흩뿌린다. 인류의 제반 종족들은 거의 다 흙덩어리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던 단계를 지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으르렁거리는 단계에 있는 부류도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얼굴 표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행동 특징이 다른 행동 특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을 더욱 광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할 것 같다. 과학자들은 동물에 관한 수많은 실험과 거기서 얻은 심리학적 발견들이 인간에 관한 심리학적 발견들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학교 교실내의 수업태도와 수업관리에 관한 많은 증거들은 쥐와 비둘기에게 실시하였던 실험에 근거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교사양성 사역에 몸담고 있는 교육자들 몇몇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나 자신은 이 교육자들이 뭔가 매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동물의 행동수정기술을 개발한 하버드 대학교의 B.F. Skinners는 한 쪽 구석에 버튼을 단 상자 안에 쥐 한 마리를 집어넣었다. 그 쥐에게 버튼을 누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우선 그 쥐에게 밀 알갱이나 치즈 조각을 던져놓은 위치로 눈을 옳게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그 쥐는 그 방향을 바라본 대가로 먹이를 먹도록 하지 않고, 그 버튼이 설치된 위치로 다가섰다는 이유로 먹이를 먹게 하였다. 이렇게 반복하여 그 일에 익숙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한 조각의 먹이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하여 그 쥐는 보상을 받는 습관에 길들게 되어 마침내 먹이를 원할 때면 언제나 그 버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결국 버튼을 눌러대게 되었다. 보상을 주는 방법을 매우 용의주도하게, 언제는 간헐적으로 다른 때는 무작위로 하여, 그 가련한 놈이 버튼 누르는 일에 중독 들게 만들었다. 사실상 그 놈은 버튼을 하루 종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비둘기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주둥이를 계속 찍어대어 어쩔 수 없이 새장에서 끄집어 낼 만큼 중독증세를 보이는 단계까지 실험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나 연예(演藝) 분야에서는 인간을 단시간 내에 일반화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외팔의 밴디트라는 포커 기계는 이 실험에 놀랄 정도로 안성맞춤이다. 실험은 사람이 이 기계 조작에 습관 들게 하는 방법이다. 지불 기능을 꺼버리고, 그 사람이 기계 조작을 중지하기 전에 그 기계 안에 약 800 개의 10전 짜리 주화를 집어넣었다. 그 실험에 그 사람이 반응하는 것을 주목해보자. 만약에 그 실험을 쥐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은 학교 수업 관리의 원리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한 줌의 젤리 빈(콩 모양의 사탕과자)을 가지고 소란을 일으키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시끄러운 교실에 교사가 들어선다. 순간 한 아이가 잠깐 조용해진다. 그리고 그에게 젤리 빈 한 톨을 건네준다. 이 행위가 그의 정숙을 더욱 북돋운다. 그리고 뒤따라 나머지 아이들도 조용해지다가 마침내 반 전체 어린아이들은 선생의 통제에 순순히 응하게 된다! 이 이론은, 만약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면, 그 선생은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신경질환 병자나 정신지체 아동에게 적용하고 있는 행동수정기술은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그리고 쥐와 비둘기에 대한 조사에서 발견된 내용들이 교생실습 중인 예비교사들을 위한 교재에 포함되었다. 행동은 어떤 경우에는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총체적 연속성에 대한 가정은 억지 가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것을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쥐와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Skinner의 상자 안에 든 쥐에 관해서 농담 하나를 만들었다. 쥐 한 마리가 다른 쥐에게 말을 건다, '어이, 이거 봐, 내가 Skinner 실험에 길들어졌나봐! 저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는 내게 먹이를 주거든!' 이 농담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언가 하면, 사람들이 쥐를 '생각하는' 동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물 실험 모델을 얼마나 빨리 인간의 사고 행동에 사용하는가를 알면 진정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만치, 우리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야만 하겠다. 즉, '이러한 실험결과를 이성의 범위 안에서 어디까지 적용하려 하는가?' 라고.
과학(science)이 반-하나님적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의식 또는 무의식적인 골격 안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하면, 더 이상 '이성'에 대한 수긍할 만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그리고 우리 생명을 유지해주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서 인정하고 영접할 때만,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고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지 않는가에 대한 유효한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Creation 3(4):28–37, November 1980
19세기 중엽에 다윈이 생물학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는 지질학 분야에서 허튼과 라이엘이,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이룩한 성과와 비교된다 하겠다. 예컨대, 다윈은 현재적으로 알려진 힘의 시각에서 사물을 설명하였다. 그는 유명한 세계 일주 여행기 The Beagle에 자기가 관찰하였던 여러 섬들과 핀치새들과 같은 대상들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바 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정원에 잡초들의 자라는 양상을 관찰하였다. 잡초의 생태계에서는 다른 잡초를 질식시키고 생존한 잡초의 개체군(個體群)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적 모델은 두 가지 핵심 본질에 근거한다. 첫째로, 어떤 개체군에서도 변화와 변이는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둘째로 어떤 형태로건 적자생존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는다. 즉, 개체군들은 각기 그 자체 내부에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적자가 생존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적자생존이 후손 생산을 잘 하려는 능력이라면, 이도 또한 사실임은 당연하다.
당시 다윈의 이론은 현재 관찰될 수 있는 힘의 시각에서 설명하려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론이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이 현재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내용의 지지를 받아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웠다.
다윈의 이론이 초래한 결과는 어찌 보면 뉴턴의 이론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관념을 확립하는 측면에서는 뉴턴의 충격과는 결코 같은 성질의 것일 수는 없다.
다윈 이론이 초래한 결과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크게 우려되었다. 첫째로 기원에 대한 믿음에 미친 영향이다. 인생과 세계, 그리고 우주 기원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끼친 다윈의 충격은 의심할 바 없이 크다. 1895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우주생성에 관한 창세기 1장의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1859년 이후, 창세기 초두의 章들의 기사 내용의 진실성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창세기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고 있었지, 어떤 알레고리나 시, 또는 하나님이 그와 같이 창조하셨다는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구전진술(口傳陳述)로는 믿지 않았었다.
둘째로 다윈이 제기하였던 인간관은 더욱 의미심장하였다.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은 사실상 인간기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는 나중에 가서 취급한 것이다. 그의 관점으로는,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로서 원숭이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과의 사이에 있는 간극이 그리 광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윈이 그의 만년에 또 다른 하나의 저서,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 (The Expression!! at the Emotions in Animals and man)'을 탈고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저서는 여러 측면에서 종의 기원 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그는 생명체의 생존의 가치의 측면에서 평가할 때 생명체의 신체적 구조보다는 그 생명체의 행동 양식에 더 많을 역점을 두었다. 다윈은 기원에 관한 그의 최초의 이론에서 생명체의 외적 구조가 생존환경에 적응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유리한가를 설명하였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에서 생명체가 취하는 어떤 특정한 행동 형태의 표현에 주목하였다. 인간은 왜 어떤 특정한 행동 특징들을 가지는가? 그런 특징들은 진화에 유리할까?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생존환경 적응에 불리했을까? 예컨대 인간은 왜 얼굴을 찡그리고, 또 무시무시한 얼굴 표정을 지을까?
여기서 그는 그의 종전의 이론의 시각으로, '그런 능력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라고 물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원시인의 동굴주거지에 송곳니를 세우고 호랑이가 기어들었다고 상상하자. 거기 살던 사람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사람이 생존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지 않았을까?
이 저서에서 찰스 다윈은 역시 인간의 감정표현을 얼굴을 찡그리고 으르렁거리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의 감정표현과 연관하였다. 개코원숭이의 군서지의 생활양태를 필름에 담은 것이 있다. 그들은 군서지에 접근하는 대상이 있으면 사람이건 동물이건 상관 않고 무작정 진흙이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고 먹던 찌꺼기를 흩뿌린다. 인류의 제반 종족들은 거의 다 흙덩어리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던 단계를 지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으르렁거리는 단계에 있는 부류도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얼굴 표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행동 특징이 다른 행동 특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을 더욱 광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할 것 같다. 과학자들은 동물에 관한 수많은 실험과 거기서 얻은 심리학적 발견들이 인간에 관한 심리학적 발견들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학교 교실내의 수업태도와 수업관리에 관한 많은 증거들은 쥐와 비둘기에게 실시하였던 실험에 근거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교사양성 사역에 몸담고 있는 교육자들 몇몇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나 자신은 이 교육자들이 뭔가 매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동물의 행동수정기술을 개발한 하버드 대학교의 B.F. Skinners는 한 쪽 구석에 버튼을 단 상자 안에 쥐 한 마리를 집어넣었다. 그 쥐에게 버튼을 누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우선 그 쥐에게 밀 알갱이나 치즈 조각을 던져놓은 위치로 눈을 옳게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그 쥐는 그 방향을 바라본 대가로 먹이를 먹도록 하지 않고, 그 버튼이 설치된 위치로 다가섰다는 이유로 먹이를 먹게 하였다. 이렇게 반복하여 그 일에 익숙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한 조각의 먹이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하여 그 쥐는 보상을 받는 습관에 길들게 되어 마침내 먹이를 원할 때면 언제나 그 버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결국 버튼을 눌러대게 되었다. 보상을 주는 방법을 매우 용의주도하게, 언제는 간헐적으로 다른 때는 무작위로 하여, 그 가련한 놈이 버튼 누르는 일에 중독 들게 만들었다. 사실상 그 놈은 버튼을 하루 종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비둘기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주둥이를 계속 찍어대어 어쩔 수 없이 새장에서 끄집어 낼 만큼 중독증세를 보이는 단계까지 실험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나 연예(演藝) 분야에서는 인간을 단시간 내에 일반화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외팔의 밴디트라는 포커 기계는 이 실험에 놀랄 정도로 안성맞춤이다. 실험은 사람이 이 기계 조작에 습관 들게 하는 방법이다. 지불 기능을 꺼버리고, 그 사람이 기계 조작을 중지하기 전에 그 기계 안에 약 800 개의 10전 짜리 주화를 집어넣었다. 그 실험에 그 사람이 반응하는 것을 주목해보자. 만약에 그 실험을 쥐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은 학교 수업 관리의 원리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한 줌의 젤리 빈(콩 모양의 사탕과자)을 가지고 소란을 일으키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시끄러운 교실에 교사가 들어선다. 순간 한 아이가 잠깐 조용해진다. 그리고 그에게 젤리 빈 한 톨을 건네준다. 이 행위가 그의 정숙을 더욱 북돋운다. 그리고 뒤따라 나머지 아이들도 조용해지다가 마침내 반 전체 어린아이들은 선생의 통제에 순순히 응하게 된다! 이 이론은, 만약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면, 그 선생은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신경질환 병자나 정신지체 아동에게 적용하고 있는 행동수정기술은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그리고 쥐와 비둘기에 대한 조사에서 발견된 내용들이 교생실습 중인 예비교사들을 위한 교재에 포함되었다. 행동은 어떤 경우에는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총체적 연속성에 대한 가정은 억지 가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것을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쥐와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Skinner의 상자 안에 든 쥐에 관해서 농담 하나를 만들었다. 쥐 한 마리가 다른 쥐에게 말을 건다, '어이, 이거 봐, 내가 Skinner 실험에 길들어졌나봐! 저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는 내게 먹이를 주거든!' 이 농담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언가 하면, 사람들이 쥐를 '생각하는' 동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물 실험 모델을 얼마나 빨리 인간의 사고 행동에 사용하는가를 알면 진정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만치, 우리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야만 하겠다. 즉, '이러한 실험결과를 이성의 범위 안에서 어디까지 적용하려 하는가?' 라고.
과학(science)이 반-하나님적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의식 또는 무의식적인 골격 안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하면, 더 이상 '이성'에 대한 수긍할 만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그리고 우리 생명을 유지해주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서 인정하고 영접할 때만,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고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지 않는가에 대한 유효한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Creation 3(4):28–37, November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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