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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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에이~ 설마” 하는 반응을 보인다. 돈도 없고, 얼굴도 별론데 뭐가 그렇게 행복할까 싶다. 그런데도 행복하다니 그 비결을 들어볼 만하다. 대체로 그들은 소소한 행복을 자주 느낀다. 가족과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퇴근해서 아이들과 포옹할 때, 동네사람들과 소주 한잔할 때…. 그렇다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까.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리추얼’을 만들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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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반지하 작업실이 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새벽에 피아노를 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난한 계절병을 앓는 나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틀어놓고 목이 쉬도록 따라 부른다. 가끔 브람스 교향곡을 귀가 얼얼하도록 볼륨을 높여 듣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한다. 출력이 떨어지는 빈티지 진공관 오디오지만 바닥으로 전해지는 베이스음이 장난이 아니다.
어두운 지하방에 앉아 작은 백열등만을 켜고 앉아 창밖만 보고 있는 나를 아내는 매번 못마땅해 한다. “도대체 그놈의 생리는 한 달에 몇 번이나 하는 거냐! 이젠 폐경기가 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그런다. 그렇다. 남자에게도 나이가 들면 폐경기가 온다. 영혼의 폐경기. 크흐, 영혼의…. 창밖으로 모과나무와 새가 보이는 집 내 아내는 몸도 튼튼하지만 마음은 더 튼튼하다. 도무지 계절과는 관계없는 동남아시아적 삶을 산다. 가끔 몬순바람이 불며 세찬 소나기가 올 때도 있지만 그건 잠시다. 그때만 피하면 된다. 바로 그친다. 그러다 보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매번 우울하다며, 인생이 허무하다며, 입맛이 없다며, 쫓아다니면서 맛있는 저녁 해달라는 나를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그러나 계절은 타라고 있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사계절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함께 아침방송에 출연한 후, 커피를 마시며 천하장사 이만기가 그랬다. 자기는 가을이면 낙엽 타는 냄새를 꼭 맡아야 한다고. 차 몰고 볏단 타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닌다고 했다. 안 그러면 부인에게 꼭 짜증내게 된다고 그랬다. 세상을 뒤집어엎던 천하장사도 그러는데, 소심하고 귀 얇고, 뒤끝 긴,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계절 변화에 무심하겠는가. 이런, 이야기가 딴 데로 샜다. 좌우간 우리집은 남 눈치 안 보고 음악도 듣고, 아이들이 쿵쿵거리며 뛰어도 돼 좋다. 가을 햇살 좋은 날은 정말 예쁜 새가 날아와 창밖의 모과나무 위에 앉아 있기도 한다. 그 뒤의 작은 언덕에는 꿩 식구가 자주 놀러 온다. 후다닥거리는 소리가 나 올려다보면 어미 꿩이 새끼들을 데리고 언덕을 기어올라간다. 우리집은 아주 먼 시골의 전원주택이 아니다. 우리는 분당과 용인 사이에 있는 산언저리에 산다. 다들 우리집을 부러워해, 서울의 30평대 아파트를 포기하면 언제든지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면 다들 당장 이사 올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할 자신이 없는 거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등하굣길이 문제다. 고속도로 때문에 분당에 있는 학교에 가기가 쉽지 않다. 매일 아침 우리 부부가 번갈아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줘야 한다. 내 아침 강연과 아내의 1교시 수업이 겹칠 때면 상황이 아주 복잡해진다. 처남이나 장인이 출동하기도 한다. 밤에 큰아이가 학원에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다. 매번 데리러 가야 한다.
‘형제약수터’에 가면 ‘행복물’이 나온다 근처에 변변한 쇼핑센터나 장볼 곳도 없다. 분당이나 용인으로 장보러 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 때문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집값도 전혀 오르지 않고, 매매도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반상회 때마다 이웃들은 걱정이 많다. 그러나 어느 광고처럼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계속 그곳에 살 생각이라면 집값이 아무리 많이 올라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최근 내게 지금의 이 집을 사랑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다른 곳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아이들과의 특별한 일 때문이다. 집 뒤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등산로가 있다. 사실 등산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다. 그렇다고 산책로라고 하기엔 땀이 제법 많이 나오는 길이다. 숲도 꽤 깊어 어두컴컴한 길이 계속된다. 가을에 송이버섯을 따러 오는 사람들 빼놓고는, 2시간 내내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작년 추석 때 아이들과 함께 그 등산로를 올랐다. 추석 음식이 소화가 안돼 산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아이들이 좋아라 하며 따라나선 것이다. 송편과 배를 싸 들고 아내까지 합류했다.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둘째아이가 병아리 오줌처럼 흐르는 아주 작은 물줄기를 발견했다. 길옆으로 올라가더니 ‘약수터’를 발견했다며 모두 와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물이 바닥에서 송송 올라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쉬며 깎아 온 배를 먹었다. 아이들은 나무로 그 물이 솟는 곳을 파헤쳤다. 좋은 놀잇감을 만난 듯, 아이들은 손으로 물구멍 주위를 넓히고, 약수터를 만든다며 한참을 헤집었다. 그러자 제법 많은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음에 정식으로 약수터를 만들자고 약속하며 산을 내려왔다. 며칠 후, 아이들과 나는 산을 다시 올랐다. 이번엔 장비가 달랐다. 고등학교 다니는 큰아이의 배낭에는 정원용 자갈과 벽돌 등을 넣고, 난 야전삽을 들었다. 둘째는 나무를 잘라 만든 ‘형제약수터’팻말을 들었다. 돌과 벽돌이 가득 든 무거운 배낭을 번갈아 메가며 그 형제약수터에 낑낑거리며 올랐다. 그리고 정식으로 약수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 나오는 구멍 위에 자갈을 올려 물이 맑게 유지되도록 했다. 물 구멍 위로는 쓰러진 통나무를 잘라 덮었다. 둘째는 물길을 만든다며 크게 도움 안 되는 작업에 나름 씩씩거리며 몰두했다. 주변을 정비하고 형제약수터 팻말을 꽂았다. 형제약수터에 오르는 일은 이제 우리식구의 정기적인 행사가 됐다. 벌써 팻말의 글씨가 바랬고, 물은 말라 있을 때가 많다. 약수터를 만들 당시에는 비가 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무늬만 약수터를 오르는 일은 우리 모두에겐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가족이 모두 약수터를 방문하는 날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족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 있으면 아무도 산에 오르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할 때, 아니 행복함을 느끼고 가족 서로에게 고맙고 감사할 때 우리는 형제약수터를 오른다. 아내는 과일을 깎고, 보온병에 커피와 코코아를 담는다. 약수터에 오르며 나는 아이들에게 계속 다짐한다. 나중에 너희들이 장가가서 아이를 낳으면 할아버지 이야기해주며 함께 올라야 한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식구가 모두 즐거울 때면 내 아버지가 했던 말씀을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 어투까지 닮아 있다. 형제약수터에 오르는 일은 우리 식구가 최근 발견한 행복의 리추얼(ritual)이다. 행복과 재미는 리추얼로 확인된다.
그토록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던 이유
그때는 그랬다. 아침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조회를 서며 우리는 우리 삶의 목적을 확인해야 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 위에 태어났다’. 그렇게 누구나 힘들게 찾아내려 하는 내 삶의 목적을 국가가 그렇게 간단히 정해준 것이다. 월요일이면 전교생이 모여 우리가 태어난 목적을 확인해야 하는 그 국민의례는 지금 생각하면 진짜 황당한 일이다. 그러나 과거를 지금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일부 페미니스트가 예수, 석가, 공자를 마초, 남성우월주의자로 비난하는 것과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집단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냄새가 가득하고,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농후한 국민교육헌장과 국민의례지만 당시 사회 맥락에서는 결정적 기능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후진적 경제구조를 벗어나 국가의 일대 변혁을 꾀하기 위해선 의식의 변화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의례, 즉 리추얼처럼 강력한 수단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아침마다 외웠던 ‘국가를 위한 내 삶의 목적’은 지금까지 입안에 빙빙 돈다. 나뿐만이 아니다. 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모든 이에게 물어보라.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느냐고. 그럼 대부분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혹은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헷갈려 하는 이들은 이렇게도 대답할 것이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리추얼은 그토록 강력한 것이다. 단순히 반복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계속해서 의미가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습관과 리추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계적인 행동의 반복은 습관이다. 그러나 리추얼은 ‘반복되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의 맥락’이다. 그 행위를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의미가 구성된다는 이야기다. 국민의례나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국가가 갖는 의미를 재생산한다. 그 집단주의적 의미의 재생산구조 때문에 오늘날 아무도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는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일부 바뀌었다. 더 이상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라는 문장은 없다. 대신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지난해부터 바뀌었다. 미국 국가를 들으며 감동하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과연 오늘날도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국기에 대해 꼭 그런 식으로 맹세해야 하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엄숙주의, 과도한 진지함이 싫다. 국민교육헌장이나 국기에 대한 맹세와 같은 리추얼이 동반하는 그 한없이 가라앉는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언제까지나 이토록 진지하고, 무겁고, 부담스러워야 할까? 나는 지금도 애국가가 나오면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저려온다. 어쩌다 TV를 방송이 끝날 때까지 켜놓을 때가 있다. 그러면 언제나 그렇듯, 애국가가 장엄하게 나온다. 백두산이 나오고, 한라산이 나온다. 동해에서 해가 떠오르는 낙산사의 일출도 빠지지 않는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장면쯤에 이르면 난 눈물이 난다. 그러나 이건 그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국가에 대한 과도한 정서적 몰입이다. 필요 이상의 몰입은 부작용을 낳게 되어 있다. 눈물을 동반하는 애국가에 대한 내 정서적 반응이 엉뚱한 방향으로 진화해버린 것이다. 눈물이 애국가 할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나와도 눈물이 나온다. 웬 황당한 상황인가. 미국식 애국을 강조하는 할리우드 영화나 스포츠에서 봤던 장면에서 학습된 결과와 내 애국가에 대한 반응이 연합되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정서적 반응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애국가나 태극기에 대한 요즘 젊은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특히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젊은이들의 태극기에 대한 태도는 기성세대들이 당황할 정도다. 그전까지 태극기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엄숙한 것, 성스러운 것이었다. 어릴 때 우리는 태극기를 정성스럽게 다루는 법까지 배웠다. 그런 태극기를 젊은이들이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치마를 해 입고, 머리띠를 하고, 민소매 ‘난닝구’까지 만들어 입은 것이다. 엄숙하게 감동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태극기가 이제는 재미의 소재가 돼버렸다. 기성세대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당황할 것 없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사랑하는 방식이 변한 것이다. 태극기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눈물의 내용이 다르다. 젊은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더 이상 서러움과 고통을 기억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즐거움과 재미와 벅찬 감동의 눈물이다. 리추얼이 동반하는 정서의 내용도 달라진 것이다. 통제는 리추얼로 리추얼이 강력한 문화현상이 되는 까닭은 정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는 정형화된 리추얼을 반복한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문화적 특징 중에는 다양한 사회적 리추얼이 개발됐다는 점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국민의례부터 새마을운동, 여의도광장의 국군의 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다양한 리추얼을 통해 국민 정서를 통제하려 했다. 당시 국민은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묵묵히 따라 했다. 근대국가의 의미는 이젠 제발 보릿고개는 넘지 말자는 새마을운동의 리추얼로 반복됐고, 우리도 이제 제대로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벅찬 감동 또한 군사 퍼레이드나 ‘박스컵’, 심지어는 ‘김일의 박치기’와 같은 사회문화적 리추얼로 재생산됐다. 오늘날 중년들이 갖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는 모두 리추얼 때문이다. 당시의 리추얼로 경험된 정서는 종교적 체험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 리추얼은 종교적 제의, 혹은 의례에서 출발한다. 아직 국가나 민족의 개념이 없었던 고대사회에서 집단은 리추얼로 유지됐다. 대부분 종교적 의례였다. 부족의 리더는 종교적 의례의 우두머리를 겸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 종교적 의례에서 종교와 도덕의 기원을 설명한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독점한 것에 불만을 품은 아들들은 편 먹고 아버지를 살해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살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아들들은 괴로워한다. 이에 아버지를 상징하는 토템동물을 숭배하는 종교적 의례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종교의 기원이다. 또한 아버지의 여자(어머니와 누이들), 아버지의 환생동물을 독점하는 것에 대한 금지, 즉 터부에 관해서도 서로 합의한다. 아들들 중 어느 하나가 다시 강력한 아버지의 위치에 올라서,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을 원천 금지하는 사회적 합의다. 그리고 이를 정기적인 종교적 의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원시부족의 질서는 이런 식의 종교적 의례를 통해 지켜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아니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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