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각을 하는 마지막세대가 될지 ‘한 걱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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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신문이 만난사람] 성학십도 복사본 판각한 서각가 백랑 이 정 환 선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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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돼 닳고 마모된 성학십도 판각 복원 영주시장에게 건의
선비문화축제장에서 10년 만에 서각가(書刻家) 백랑 이정환 선생을 만났다. 먼저 알아본 건 선생이다. 10년이란 세월의 무게만큼 선생도 본 기자도 변했을 터였다. 먼발치임에도 서각을 해서 일까? 선생의 눈썰미는 여전했다.
“성학십도(聖學十圖)판각이 남아 있는 건 영주 소수서원(소수박물관) 밖에 없지요. 우리지방의 귀중한 문화재인 성학십도 판각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글자가 닳고 마모돼 성학십도 판각 복제가 시급해 지난 2010년 봄에 김주영시장을 만나 성학십도 복원을 건의 했어요.”
5일 영주선비문화축제를 알리는 테이프커팅 직후 ‘성학십도 복사본 판각 고유제(聖學十圖 複寫本 板刻 告由祭)’를 올렸다. 이 성학십도 복사본을 판각한 분이 본 기자가 10년 만에 조우한 백랑 이정환 선생(64.백랑 서각연구소)이다.
‘성학십도는 경북도 지방문화재 417호로서 본 이름은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라고 하며, 현재 소수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경북도는 2006년 10월 17일 소수박물관에 소장된 ‘성학십도 판목’을 ‘해동명적’과 함께 보물로 지정·신청할 만큼 귀중한 유산이다.
성학십도는 퇴계가 68세 때 평생의 학문을 정리해 새로 등극한 어린 선조에게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가의 도설 가운데 10도를 택해 그림마다 의견을 붙인 것으로 병풍용과 서적용의 두 종류로 판각돼있다.
성학십도 판목(병풍용)은 원래 이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로 대원군 때 서원이 훼철되자 서원을 관리하던 문중이 돌아가며 관리하다가 괴헌고택에서 영주시에 기증했다.
“소수서원 성학십도(병풍용)판각에 은행나무를 사용했어요. 은행나무는 마르면 견고하고 잘 틀어지지 않고 금 가지 않아 많이 사용하죠. 원 목판은 은행나무와 함께 돌배나무가 사용됐어요. 글자가 깨지고 균열이 있어 못 알아보는 것은 성학십도 목판 인출본을 보고 했구요. 과정은 글씨를 각을 한 뒤 방부·방충처리를 하고 판(板)이 돌아가지 않도록 마구리를 하는 과정이에요.”
선생은 오래전 한 달 동안 해인사 장경고에 들어가 팔만대장경의 목재와 서각을 연구하기도 했다. “지금은 입적하신 해안 종정이 계실 때 장경고 안에서 살기도 했어요. 해안 스님은 춘양 각화사에 딸린 암자에 수도하고 계실 때 알고 지냈죠. 그 인연으로 못 들어간다는 장경고에 들어가 연구한 결과, 팔만대장경의 80% 이상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며 밀물과 해수가 교차하는 지점에 침수시킨 나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선생은 또 팔만대장경의 조성 경로와 규모의 정도 등을 연구하기 위해 97년 말에 남해에 가서 2000년 3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 결과 팔만대장경의 판각장소가 강화도가 아니라 남해 선운사에서 조성됐다고 확신한단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경영학과를 나와 고시공부를 하던 중 서각을 접하게 된 게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40년이 됐네요. 서각은 한문을 알아야하고 서예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힘이 드니까.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아요. 지금은 서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다 60, 70대죠. 우리세대가 서각을 하는 마지막세대가 될까? 걱정입니다.” 라며 상처와 굳은살로 가득한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쥔다.
영주가 고향인 백랑 이정환선생은 서체는 추사체를 좋아하고 서각의 음각, 음양각, 양각, 음평각 중 글씨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음양각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동안 남해, 영주, 경주를 거쳐 현재 대구에서 ‘백랑 서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안동에서 1회 서각전을 시작으로 한 국내 전시뿐 아니라 일본(나고야) 민단회관에서 4회, 미국 LA한인회관에서 5회 등 수차례 서각전(書刻展)을 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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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363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