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잘못이 아니며. 틀림없는 것이다 그랬기에 대중부나 초기 대승불교는 상좌부를 비판하였으나 이렇다할 비판다운 비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용수 보살이 나오면서 부터 정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하여 용수 보살님은 대승불교에서 제2 부처님으로 존경받지만.. 상좌부에게는 데비닷다 보다도 더 미운 털이 박혀 있다. 심지어 상좌부에서는 용수 보살이 강조한 공은 석게세존의 가르침이 아닌 용수 논사가 발견한 것으로 폄하하려 한다. 그리고 그 반대 입장에서 공을 으뜸으로 여기는 대승불교에서는 공 개념은 차라리 용수 보살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공에 대한 가르침은 마지마 니까야 "공에 대한 짧은 경" 이 나오고, <잡아함경>에는 공이 여기저기에 나오다 <335경> 에서는 공은 제1의(第一義) 곧 최고의 진리라고 까지 한다. 물론 <잡. 335경>은 <니까야>에는 전하지 않는 경이다. 그럼 공이란 무엇인가?..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업보는 업에 의해 생기는 것이요, 업은 짓는 주인이 있기에 업에 대란 보는 당연히 업의 주인이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악은 멀리 하고 선은 열심히 행하라" 누가?.. 바로 당신이라는 주인이.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업을 짓는 작자인 주인이 없단다. 따라서 업보를 받는 주인 역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나는 5온 존재다. 5온 외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런데 <잡, 1-1. 무상경>을 보면 색(수상행식) 5온은 항상하지 못하며, 나는 없다[무아] 임을 관찰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설사 5온이 무아임을 관찰하지는 못했어도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한다면.. 업보의 주인인 나는 없음이 금방 이해되지 않는가?.. 나가르 주나, 용수 보살님이 설파한 공은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