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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쿠바에 대한 강경한 태도 유지하는 트럼프에 의해, 사라져 가는 ‘쿠바 혁명 전설’의 불빛

작성자お持て成し|작성시간26.06.07|조회수38 목록 댓글 0

쿠바에 대한 강경한 태도 유지하는 트럼프에 의해, 사라져 가는 ‘쿠바 혁명 전설’의 불빛 / 6월 6일(토) / 뉴스위크 일본판

 

생명줄이던 베네수엘라를 잃고, 쿠바는 이제 파산 직전. 피델 카스트로가 만든 반미 국가의 이상과 현실은

카리브해에 떠 있는 작은 섬나라 쿠바의 독재 정권은 언제, 어떻게 끝날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와 원하는 호텔을 최고의 리조트 지역인 바라데로에 짓게 하는 계약을 체결한 날일까. 하바나에 상륙한 미 해병대원을 환희에 찬 군중이 맞이하는 날일까.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군대가 자국민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는 날인가. 아니면, 오래 기다려온 민주적인 정치와 경제 개혁으로의 평화적 전환이 진정으로 시작되는 날일까. 

물론, 서툰 예측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1959년 혁명 이후에도 과거에 많은 예측이 있었지만,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 드디어 쿠바의 마지막 날이 다가온다. 그런 예감이 든다. 그 나라의 경제는 이제 완전히 붕괴했다. 이제 베네수엘라에 의존할 수 없고, 미국의 압박은 아직도 계속된다. 당연히 국민의 불만과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간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67년 전 쿠바 혁명의 이상과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미친 파격적인 영향력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 나라와 뛰어난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반세기 동안 국제 사회에서 한 단계 높은 경쟁을 펼쳐 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미국 정부와 교묘히 맞서는 지혜와 강렬한 과대망상을 겸비한 카스트로는 자신의 혁명의 충격파를 바다 건너까지 퍼뜨려 왔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도 동료를 늘렸다. 물론 소련(현 러시아)은 마지막까지 쿠바의 수호자였다. 그 정도 규모(인구는 파리 대도시권과 비슷한)에서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나라는 이스라엘뿐이다(참고로 양쪽 모두 강력한 군대와 정보기관을 보유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사라진다

쿠바 혁명 기념식에 참석한 게바라(오른쪽)와 젊은 시절의 라울 카스트로(1964년) LEE LOCKWOOD/GETTY IMAGES

쿠바 혁명의 매력에 종지부를 찍은 직접적인 원인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실각한 점과, 그 정권에 쿠바가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올해 1월에 마두로를 구속하기 위해 전격 작전을 펼친 미군 특수부대는, 처음으로 그의 신변을 경호하던 쿠바 군인들을 무력화했다. 

그 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운영한다’고 선언했지만, 국무장관 마르코 루비오(쿠바 이민자의 아들)는 단언했다. 본마루는 쿠바다, “마두로를 지키고 있던 것은 쿠바인이다”라고. 

베네수엘라 정권은 거의 살아남았지만, 미국에 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25년 동안 쿠바의 체제를 지탱해 온 라이프라인(저렴한 원유와 무역을 통한 외화 제공 등으로 연간 40~60억 달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끊어졌다. 

2024년 이후 쿠바에서는 정전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지만, 이제는 발전용 연료가 다 떨어졌다. 올해 1월 이후로는 섬 전체의 절반 이상에서 하루에 약 4시간 정도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차를 움직이는 디젤 연료도 완전히 고갈. 유엔은 인도주의에 중대한 영향을 경고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구호 물자의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2월에는 1962년 쿠바 위기 이후 처음으로 강경한 해상 봉쇄를 시행. 석유 탱크선을 포획하고, 공급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또한 쿠바 경제의 40~70%를 장악하고 있는 군사 기업 관리 그룹 ‘GAESA(가에사)’를 경제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쿠바의 후원자였던 소련은 이미 붕괴했고,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손이 바쁘다. 물론 베네수엘라에 의존할 수는 없다. 중국도 쿠바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설 기미가 없다. 그래서 “다음은 쿠바다”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3월 마이애미에서 열린 투자 포럼에서 선언했다. 

쿠바 혁명은 무엇이었을까?


5월에는 CIA(미국 중앙정보국) 국장인 존 라트크리프가 하바나로 날아가, 전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의 손자이자 일가의 GAESA 관련 이권을 관리하는 라울 기제르모 로드리게스 카스트로를 만나 트럼프의 요구를 전달했다. 추가적인 압박을 가하듯, 미국 법무부는 1996년 미국 민간기 격추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라울 카스트로를 살인죄로 기소했다. 

이제 쿠바 혁명의 전설은 색이 바래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그 매력적이지만 대부분은 헛된 노력으로 끝난 거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기회에 차근차근 검증해 보자. 

★ ★ ★

원래부터 카스트로는 혁명 초기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중남미 각지에서 혁명 운동을 지원한다면, 미국도 1961년 피그스 만 사건과 같은 무모한 군사 침공이나 맹구스 작전 같은 파괴 공작에서 물러날 것이고, 한편으로는 혁명 쿠바의 고립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시 미국 정부는 멕시코와 캐나다를 제외한 서반구 대부분 국가에 대해 쿠바와의 무역·여행·외교 관계 단절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멕시코를 제외한 중남미 각국에서 게릴라 조직을 육성하고 무장 투쟁을 지원했다. 

중남미 무장 혁명 노선의 이론적 기둥을 제공한 사람은 젊은 프랑스 지식인 레지스 도브레다. 그의 저서 『혁명 속의 혁명』(일본어 번역·성문사)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직접 서문을 기고했다. 

카스트로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과테말라, 니카라과, 아르헨티나, 도미니카공화국, 페루, 그리고 나중에 볼리비아와 브라질에서 젊은 전사들을 모아 하바나 인근 훈련 시설에서 훈련시켰다. 그곳에는 ‘혁명 장관’ 마누엘 피니에이로가 있었으며, 그들에게 무기와 사상을 제공하고 각국의 산악 지대로 파견했다. 

성공 사례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1979년에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제외하면,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많은 청년들이 쿠바 혁명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잘못된 투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목숨을 잃었다. 게릴라와 함께 싸운 카미로 트레스 신부의 유골은 사후 50년이 넘은 뒤 콜롬비아에서 발견되었다. 전 세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은, 사후 30주년인 1997년에 쿠바 산타클라라 영묘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브라질, 베네수엘라, 페루, 우루과이 등에서 싸운 게릴라들의 패배는 참가자들의 죽음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었다. 게릴라가 존재하고 때로는 체제에 대한 위협이 되었던 것은, 많은 국가에서 군부의 잔인한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60~70년대 남미에서 빈번히 일어난 군사 쿠데타가 모두 혁명을 막으려는 의도였던 것은 아니다. 군부는 혁명 세력 배제를 명목으로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를 살해·납치·고문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다만 70~80년대 중미에서는 다른 전개가 나타났다.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는 수준이 낮지만, 과테말라에는 예전부터 무장 세력을 포함한 대중운동이 존재했으며, 쿠바는 그곳에 무기를 공급하고 지원했다.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에 대량의 무기를 보내고, 칠레인 고문단을 니카라과에 파견했으며, 이 세 나라와 쿠바 정부를 연결하는 통신망을 통해 지원 활동을 조정하기도 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는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약 10년 동안 정권을 유지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이 지원하는 반정부 게릴라 ‘콘트라’에 맞서는 쿠바의 수천 명의 치안 인력이 파견돼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수출은 이제 한계


엘살바도르에서는 파라분드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 1989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대와 대등하게 싸우고, 1992년에 평화를 맺었으며,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두 차례 승리했다. 그 과정에서 쿠바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후에는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다. 2019년에는 반FMLN의 나지브 부케레가 대통령이 되어 강권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쿠바는 아프리카 대륙에도 혁명을 수출했다. 먼저 대륙 서남부의 앙골라부터. 1975년에 정예 부대를 앙골라에 대규모 투입해 MPLA(앙골라 해방 인민운동)를 지원하고, 조나스 사빈비가 이끄는 친미파 UNITA(앙골라 전면 독립 민족동맹)와 중국 편인 FNLA(앙골라 민족해방전선)와 패권을 다투었다. 

1988년 쿠이트쿠아나바레 전투에서, 카스트로가 직접 하바나에서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쿠바 병사 부대가 남아프리카 군대를 격파하고 앙골라의 독립을 지켰다. 

한편, 70년대 후반 에티오피아 독재자 멘기스츠 하이레 마리암을 지원해 오가덴 지방에 개입한 것은 안타까운 결말을 맞았다. 멘기스투스는 1991년에 실각했으며, 이후 ‘레드 테러’ 시기의 인권 침해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레이건 미국 행정부의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은 과거 쿠바 정치인 카를로스 라파엘 로드리게스에게, 오가덴 상공에서 러시아산 미그 전투기를 조종하는 쿠바인 조종사가 스페인어로 비행 지시를 내린 사실을 미국 당국이 포착했다고 전하며 항의했다. 이는 카리브해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미친 쿠바의 국제적 영향력 확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쿠바에 대한 거대한 지원이 끊기면서, 이러한 모험의 대부분은 끝을 맞이했다. 카스트로는 스스로 혁명의 수출을 지속할 여유가 없었다. 

※ 이 글은 전편입니다. 후편 “왜 쿠바 혁명은 지금도 살아남고 있는가?” ‘영웅적 신화’와 ‘의료 외교’에 의해 뒷받침된 67년의 생존 전략은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호르헤 G. 카스타네다 (전 멕시코 외무장관, 뉴욕대 특별 영예 교수)

 

キューバに対して強硬姿勢を崩さないトランプによって、搔き消える「キューバ革命伝説」の灯

キューバに対して強硬姿勢を崩さないトランプによって、搔き消える「キューバ革命伝説」の灯 / 6/6(土) / ニューズウィーク日本版


命綱の同志ベネズエラを失い、キューバはもはや破綻寸前。フィデル・カストロがつくった反米国家の理想と現実とは

ILLUSTRATION BY LISA SHEEHAN

カリブ海に浮かぶ小さな島国キューバの独裁政権はいつ、いかにして終わるのか。お好みのホテルを極上のリゾート地バラデロに建てさせる契約をドナルド・トランプと結んだ日か。首都ハバナに上陸した米海兵隊員が歓喜の群衆に迎えられる日か。民衆の蜂起を鎮圧すべく動員された軍隊が自国民への発砲を拒む日か。あるいは、待ちに待った民主的な政治と経済改革への平和的な移行が本当に始まる日か。

【動画】水も電気も逃げ場もない…アメリカの「兵糧攻め」に遭うキューバの今

むろん、下手な予測はしないに限る。1959年の革命以来、過去にもたくさんの予測があったけれど、どれも当たらなかった。しかし今度は違うかもしれない。いよいよキューバ最後の日が来る。そんな予感がする。あの国の経済はもはや崩壊している。もうベネズエラには頼れないし、アメリカによる締め付けはまだまだ続く。当然、国民の不満と怒りは高まる一方だ。

だから、何が起きてもおかしくない。しかし1つだけ確かなことがある。67年前のキューバ革命の理想と、それが今日に至るまで世界に及ぼしてきた破格の影響力が、もはや死んだという事実だ。

あの国と、卓越した指導者フィデル・カストロが半世紀にわたり、国際社会で1ランク上の戦いを繰り広げてきた事実は否定しない。米政府と巧みに渡り合う賢さと強烈な誇大妄想を併せ持つカストロは、自らの革命の衝撃波を海の向こうまで広げてきた。中南米やアフリカでは攻めまくり、欧州やアメリカでも仲間を増やした。もちろんソ連(現ロシア)は最後までキューバの守護者だった。あんな規模(人口はパリ都市圏と同じくらい)で、あれほどの影響力を持ち得た国は、ほかにはイスラエルだけだ(ちなみに、どちらにも強力な軍隊と情報機関がある)。

頼れる味方がいなくなる

キューバ革命記念日の式典に臨むゲバラ(右)と若き日のラウル・カストロ(1964年) LEE LOCKWOOD/GETTY IMAGES

キューバ革命の魅力に終止符を打つ直接の原因となったのは、ベネズエラのニコラス・マドゥロ大統領の失脚と、その政権にキューバが密接に関与していたという点だ。今年1月にマドゥロを拘束するために電撃作戦を仕掛けた米軍特殊部隊は、最初に彼の身辺警護をしていたキューバの軍人らを無力化した。

その後、トランプ米大統領はベネズエラを「運営する」と表明したが、国務長官のマルコ・ルビオ(キューバ移民の子だ)は断言した。本丸はキューバだ、「マドゥロを守っていたのはキューバ人だ」と。

ベネズエラの政権はほぼ生き延びたが、アメリカに従順になった。そして四半世紀にわたりキューバの体制を支えてきたライフライン(格安の原油や貿易による外貨の提供などで年間40億〜60億ドルはあったと推定される)は断ち切られた。

2024年以降のキューバでは停電が頻発しているが、もはや発電用の燃料は尽きた。今年1月以降は、島全体の半分以上で1日4時間程度しか電気を使えない。車を動かすディーゼル燃料も完全に枯渇。国連は人道上の重大な影響を警告した。

それでもアメリカ政府は救援物資の搬入を許さない。2月には1962年のキューバ危機以来となる強硬な海上封鎖を実施。石油タンカーを拿捕し、供給国には高率関税を課すと脅した。さらにキューバ経済の40〜70%を支配する軍事企業管理グループ「GAESA(ガエサ)」を経済制裁の対象にした。

キューバのパトロンだったソ連は既に崩壊し、今のロシアはウクライナ戦争で手いっぱいだ。もちろんベネズエラには頼れない。中国にも、キューバ支援に本腰を入れる気配はない。だから「次はキューバだ」。トランプは3月にマイアミで開いた投資フォーラムで宣言した。

キューバ革命とは何だったのか?
5月にはCIA(米中央情報局)長官のジョン・ラトクリフがハバナに飛び、元国家評議会議長ラウル・カストロの孫で一族のGAESA関連の利権を管理するラウル・ギジェルモ・ロドリゲス・カストロに会ってトランプの要求を伝えた。追い打ちをかけるように、米司法省は1996年の米民間機撃墜事件に関与したとして、ラウル・カストロを殺人罪で起訴している。

もはやキューバ革命の伝説は色あせ、いよいよ最後の日が近づいているようだ。いったい、あの魅力的だが大半は徒労に終わった壮大な物語は何だったのか。この際だから、じっくり検証してみよう。

★ ★ ★

そもそも、革命当初からカストロはこう考えていた。中南米の各地で革命運動を支援すれば、アメリカも1961年のピッグス湾事件のような無謀な軍事侵攻やマングース作戦のような破壊工作から手を引くだろうし、一方で革命キューバの孤立を解消できるだろうと。

実際、当時のアメリカ政府はメキシコとカナダを除く西半球のほとんどの国に対し、キューバとの貿易や渡航、外交関係の断絶を迫っていた。だからカストロは、メキシコを除く中南米の各国でゲリラ組織を育て、武装闘争を支援した。

中南米における武装革命路線の理論的支柱を提供したのは、若きフランスの知識人レジス・ドブレだ。彼の著書『革命の中の革命』(邦訳・晶文社)にはフィデル・カストロ自身が序文を寄せている。

カストロはベネズエラやコロンビア、グアテマラ、ニカラグア、アルゼンチン、ドミニカ共和国、ペルー、後にはボリビアやブラジルから若き闘士を集め、ハバナ近郊の訓練施設で鍛えた。そこには「革命大臣」のマヌエル・ピニェイロがいて、彼らに武器と思想を与え、それぞれの国の山岳地帯へ送り込んだ。

成功例はごくわずか
しかし79年に武力で政権を奪取したニカラグアのサンディニスタ民族解放戦線(FSLN)を除けば、こうした試みは全て失敗に終わった。多くの若者が、キューバ革命に関する誤った理解に基づく誤った闘争で命を落とした。

その指導者たちも同様に命を落とした。ゲリラと共に闘ったカミーロ・トレス神父の遺骨は、死後50年以上を経てコロンビアで発見された。世界中で英雄視されたエルネスト・チェ・ゲバラのものとされる遺骨は、没後30周年の97年にサンタクララ(キューバ)の霊廟に納められた。

だがブラジルやベネズエラ、ペルー、ウルグアイなどで戦ったゲリラたちの敗北は、参加者たちの死をもたらしただけではなかった。ゲリラが存在し、時に体制への脅威となったことは、多くの国で軍部による残忍な弾圧を正当化する口実となった。60~70年代の南米で頻発した軍事クーデターの全てが革命阻止を意図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軍部は革命勢力の排除という名目で無数の学生や労働者の殺害や拉致、拷問を正当化した。

ただし70〜80年代の中米では別な展開が見られた。ニカラグアやエルサルバドル、程度は低いがグアテマラには以前から武装勢力を含む大衆運動が存在し、キューバはそこに武器を供給し、支援した。ニカラグアとエルサルバドルには大量の武器を送り込み、チリ人の顧問団をニカラグアに派遣し、この3カ国とキューバ政府を結ぶ通信網を通じて支援活動の調整も行った。

ニカラグアのサンディニスタはアナスタシオ・ソモサの独裁政権を打倒し、10年ほど政権を維持した。それが可能だったのは、アメリカの支援する反政府ゲリラ「コントラ」に対抗するキューバの治安要員数千人が派遣されていたからだ。

革命の輸出はもう限界
エルサルバドルでは、ファラブンド・マルティ民族解放戦線(FMLN)が1989年にアメリカの支援を受けた軍隊と互角に戦い、92年には和平を結び、その後は大統領選で2度も勝利した。その過程でキューバは決定的な役割を果たしていたが、その後は不名誉な結果を招くことになった。2019年には反FMLNのナジブ・ブケレが大統領となり、強権的な支配体制を敷いている。

キューバはアフリカ大陸にも革命を輸出した。まずは大陸西南部のアンゴラ。1975年に精鋭部隊をアンゴラへ大量投入してMPLA(アンゴラ解放人民運動)を支援し、ジョナス・サビンビ率いる親米派のUNITA(アンゴラ全面独立民族同盟)や中国寄りのFNLA(アンゴラ民族解放戦線)と覇権を争った。

88年のクイトクアナバレの戦いでは、カストロ自身がハバナから指揮したとされるキューバ兵の部隊が南アフリカの軍隊を打ち破り、アンゴラの独立を守った。

一方、70年代後半にエチオピアの独裁者メンギスツ・ハイレ・マリアムを支援して行ったオガデン地方への介入は残念な結末を迎えた。メンギスツは91年に失脚し、後に「赤色テロ」時代の人権侵害で有罪判決を受けている。

レーガン米政権のアレクサンダー・ヘイグ国務長官はかつて、キューバの政治家カルロス・ラファエル・ロドリゲスに対し、オガデン上空でロシア製ミグ戦闘機を操縦するキューバ人パイロットによるスペイン語での飛行指示を米当局が傍受したことを伝え、抗議した。これは、カリブ海から数千キロ離れた場所にまで及んだキューバの国際的影響力の拡大を示す極端な例の1つだった。

しかし91年にソ連が崩壊し、キューバへの巨額の支援が途絶えると、こうした冒険の大半は終わりを迎えた。カストロには自力で革命の輸出を続ける余裕がなかった。

※この記事は前編です。後編「なぜキューバ革命は今も生き続けている? 『英雄的神話』と『医療外交』に支えられた67年の生存戦略」はリンクからご覧ください。

ホルヘ・G・カスタニェダ (元メキシコ外相、ニューヨーク大学特別栄誉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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