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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무뎌질때, 문득 내게로 왔다

작성자아름드리.|작성시간23.03.11|조회수32 목록 댓글 0

세월이 무뎌질때, 문득 내게로  왔다

 



세월에 무뎌질 때, 문득 내게로 왔다
철 조각가 김효경 씨의 손길이 닿은 한옥 두 채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늘 하던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의미 없이 느껴질 때.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그저 묵묵히 참아 내거나 모든 것을 단숨에 멈추고 움츠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철 조각가인 그녀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겠다고 느꼈을 때 선택한 방법은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2012년 겨울, 그녀는 한옥 작업실 ‘채운(彩雲)’과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채의 한옥을 고치는 일에 매달렸다. 그로부터 1년 반 만에 말갛게 단장한 모습을 드러낸 곳이 전주한옥마을에 자리한 게스트하우스 ‘단경(端暻)’이다.


13년 동안 함께해 온 작업공간 채운. 특유의 정겨움과 편안함이 있는 곳이다. 마당에는 효경씨의 작품들이 가득하다. / 직접 만든 철 장식물이 대문에서 반겨준다.




철 조각가의 한옥 작업실, 채운(彩雲)
김효경 씨는 18년 가까이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철 조각가다. 13년 전, 그녀는 전주향교 근처 조용한 골목 안에서 채운을 만났다. 이 소박하고 아담한 한옥을 발견했을 때, 어찌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1940년대 지어진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는 물론, 정돈되지 않은 마당에도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편안함이 있었다.
“철 조각 작업은 소음과 먼지가 많아서 보통 외곽에 작업실을 둬요. 아무래도 작가분들 중 남자가 많은 편인데, 저는 여자라 그런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작업하는 일이 무섭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향교의 돌담과 마주한 이 한옥을 봤어요. 서예 하는 분이 살던 곳이라 들었는데, 조용하고 수묵화 같은 집이었죠. 더 고민할 것도 없었어요.”
그녀는 한옥마을에 작업실을 꾸린 1호 작가가 됐다. 마당에는 함석으로 된 허름한 창고를 헐어 작업을 위한 새 건물을 짓고, 손수 고친 한옥의 한쪽에는 통유리로 된 갤러리도 꾸몄다. 차 한잔 하러 채운에 드나들던 동료들이 근처 한옥으로 조금씩 모이기 시작해 이제는 꽤 많은 작가들이 이 동네에 산다. 작업 특성상 용접 소리가 이웃집에 피해를 줄 수 있어 지금은 작품 구상을 위한 스케치나 동판을 오리는 정도의 작업을 하지만, 여전히 채운은 그녀에게 안식처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다.


채운은 고즈넉한 돌담길 안에 자리한다.


마치 오래된 할머니 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드는 아담한 방들. 찾는 이가 있으면 여행자에게 방을 내어주기도 한다. / 그녀가 작업하곤 하는 방. 머리맡으로 창 너머 마당 풍경이 그림처럼 담긴다.




밝음의 시작, 단경(端暻)
4년 전 개인적인 일과 함께 찾아온 슬럼프로 작업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산책하다 만난 또 한 채의 한옥.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의 집이었는데, 낮고 긴 일자형 한옥과 마당 한편에 있던 부실한 가건물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될 인연이었는지, 그녀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집을 덜컥 인수했다. 이 집이 침체된 삶에 전환점이 되어 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그녀를 강하게 이끌었다.
“직영으로 집을 고치면서 작업자들과 의견 충돌이 많았어요. 여자가 건축 일에 관여한다는 데서 생기는 편견들이 힘들었죠. 그렇게 부딪힐 때면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그냥 쭉 쉬었어요. 그러다 보니 몇 개월이면 끝날 일이 저는 1년 반이나 걸렸죠(웃음).”


멀리 군산까지 가서 구해온 나무문에서 전통미가 물씬 풍긴다. 싱그러운 커튼은 동료작가가 만들어 준 것. 단경의 방들에서는 세련된 감각이 더해진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 이곳이 1943년에 지어진 한옥임을 알 수 있는 온돌방 천장의 상량


별동의 카페 공간에는 그녀의 작품들이 이질감 없이 곳곳에 자리한다. 꽃과 나무 등 자연이 주로 소재가 되는데, 부드러운 것들을 단단한 철이나 동으로 표현한 데서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맨 처음 일을 맡겼던 업자가 돈만 챙겨 홀연히 사라졌을 때, 그녀는 직접 두 팔을 걷어붙이기로 했다. 서까래를 뜯어 드러난 상량을 보니 무려 1943년에 지어진 한옥이었다. 8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온 나무의 질감과 고유의 멋은 지금 새로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기둥과 보는 최대한 살려 표면만 다듬고 썩은 부분에만 나무를 끼워 넣어 보강했다. 전통미를 물씬 풍기는 창호와 방 문들은 모두 전북 군산까지 직접 찾아가 공수해온 것이다. 기와도 옛것 그대로 살려두고 싶었지만 잘게 부스러질 정도로 강도가 약해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것만 골라냈다. 공사 중 나온 자투리 나무들은 손수 다듬어 투박하지만 정겨운 문손잡이나 간이의자를 만들었다.
자취방으로 쓰였던 가건물은 H빔으로 보강하고 마감을 새로 해 갤러리 겸 카페로 구성했다.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이 이른 아침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작은 쉼터이기도 하다. 대문의 철제 장식이나 마당과 카페 곳곳에 놓인 철 조각품은 물론 그녀의 작품들이다. 저녁 어스름할 때쯤이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은 그녀의 노고가 골목을 밝힌다. 고즈넉한 한옥의 멋에 예술적 감각이 더해진 단경의 자태 앞에서는 무심코 지나던 이들도 걸음을 멈추기 바쁘다.


야경이 예쁜 단경의 모습 / 대문을 들어서면 한옥과 현대식 건물이 함께 자리한 작은 마당이 펼쳐진다.




스치는 여행자들이 일깨워주는 사소한 것들
“쉬는 동안에도 그룹전은 1년에 3회 이상 꾸준히 참여해왔어요. 그래도 게스트하우스 운영에 대해서 ‘작업에 집중하지 않고 왜 다른 데 시간과 노력을 쏟느냐’ 말하는 이들이 있죠. 그렇다고 내 속에 있는 걸 다 꺼내 보여줄 수도 없고 말이에요(하하). 남도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인생인데 작업하다가 잠시 휴면기가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단경이 완성되고도 주변에 특별히 알리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내왔다. 그래도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고, 우연히 들렀다가 마음에 들어 며칠씩 묵어가는 손님도 있다. 얼마 전엔 새로운 경험이 될까 싶어 에어비앤비에 호스트로 등록했는데, 인터넷이 서툰 데다 짧은 영어 탓에 종종 곤혹스럽기도 하지만 외국인 손님들과의 만남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건축가 백지원 씨가 영국인 아내 사라(Sarah)와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단경 전체를 빌려 놀다간 적이 있어요. 한국 여행객들은 ‘옥상 올라가도 돼요?’, ‘갤러리 들어가 봐도 돼요?’ 하며 조심스러워하는 편인데, 이분들은 너무나 자유롭고 개성 넘치더라고요. 옥상, 카페, 마당 할 것 없이 공간 전체를 내 집처럼 충분히 즐기며 어우러지던 모습이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예술 같았어요.”


단경을 만난 후, 그녀는 더 다양한 사람과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손수 만든 간판이 아기자기하다.


기존 한옥보다 1.5배 정도 더 길어 유장한 미가 있는 단경의 대청마루 / 고가구로 한옥의 멋을 더한 내부. 벽에 걸린 동양자수 액자는 병풍을 잘라 파는 것을 사다가 액자로 만든 것이다.




한옥 특유의 정서 때문인지 혼자 여행 오는 여자 손님들도 꽤 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같이 나가서 식사도 하고, 막걸리도 마시며 친구가 되어준다. 왔다 간 줄도 몰랐던 여행 작가로부터 느닷없는 선물을 받은 적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 홀로 진짜 여행>이라는 책이 집에 도착했는데, 펼쳐보니 단경이 소개되어 있더라고. 수많은 인연들과의 만남과 기억들은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 그녀의 삶에 또 다른 영감이 된다.


너무 오랫동안 함께해서 그 가치와 존재감에 무뎌질 때,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집. 그녀는 채운과 단경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이가 더 지긋하게 들면, 그때는 한옥으로 완전히 들어가 살 생각이다.“살면서 생기는 욕심들을 하나하나 비워가며 살고 싶어요. 한옥이 가진 단정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욕심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아, 또 하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각가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거든요. 그녀처럼 아흔이 넘어서도 굳건히 내 작업을 하면서 늙어간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싱그러운 솔잎 향이 나는 차를 내어오며, 그녀는 소녀처럼 자신의 내일을 말했다. 그 목소리 끝에 맺힌 여운이 오래오래 남아 단경과 채운을 채우던 공기와 질감을 자꾸만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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