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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숨어 있는 "겸손"의 아름다움

작성자아름드리.|작성시간23.04.28|조회수62 목록 댓글 0

한옥에 숨어 있는 ‘겸손’의 아름다움

한옥에 숨어 있는 ‘겸손’의 아름다움


충남 논산시 교촌리 명재고택 안마당에 가야금 병창 '사랑가'가 울려 퍼졌다. 가야금을 뜯는 양효숙 명창과 장구를 치는 서은기 고수가 앉은 곳은 안채의 대청마루. ㅁ자 안마당을 구성하는 툇마루와 댓돌은 청중석이 됐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여름 낮 햇살은 처마 끝에 튕겨 마당 가운데로 떨어지고, 대청마루에서 시작된 노랫소리는 ㄷ자 안채와 한 일(ㅡ)자 문간채 흙벽에 부딪쳐 사방으로 번졌다. 삼백 살이 넘은 한옥 안에서 사람들은 장단에 맞춰 손발을 까딱거렸다.


↑ 한옥은 본 건물과 마당, 담, 외부의 산과 들, 그곳에 살거나 지나가는 사람까지 모두 긴밀하게 얽히는 유기적 공간이다.
↑ 경주시 양동마을 향단의 안채 마당. 향단은 복잡하고 오밀조밀하게 지어진 한옥으로 유명하다.
↑ 한옥은 본 건물과 마당, 담, 외부의 산과 들, 그곳에 살거나 지나가는 사람까지 모두 긴밀하게 얽히는 유기적 공간이다.
↑ 한필원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는 건축의 역사문화적 맥락을 연구하는 로버트·린다 교수(왼쪽부터)를 초청해 답사를 진행했다.
명재고택 공연은 한남대 건축학부 ATA(아시아건축연구실)에서 주최한 답사 학술 행사 '한옥을 보는 서구의 시각'의 한 부분이었다. 한옥과 전통 마을을 연구하는 한필원 교수(한남대 건축학부)가 "한국의 전통 가옥을 궁금해하는" 린다 시니클로스·로버트 시블리 교수(뉴욕 주립대학 건축·도시계획대학)를 초청해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건축을 공부하는 대학·대학원생들을 비롯해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 건축사와 인테리어 회사 대표, 목수와 한복 디자이너 등 한옥에 관심을 가진 내·외국인 30명도 행사에 참여했다. 이들을 태운 전세버스는 8월9일부터 3박4일 동안 충남 논산과 전북 전주, 경북 경주·안동을 돌았다. 모두 오래되고 잘 지어진 한옥이 있는 곳이다.

잘 지어진 한옥에는 빛과 바람이 적절하게 흐르고 차단됐다. 답사 첫날 들른 명재고택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선생의 둘째 아들과 제자들이 힘을 모아 세운 이 한옥에는, 안채와 곳간채 벽 사이 특이한 '길'이 배치돼 있다. 두 건물이 나란하지 않고 삐딱하게 마주 본 탓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은 다섯 자에서 두 자로 폭이 좁아진다. 여름 남풍을 최대한 이용하고 겨울 북풍을 되도록 막으려는 시도이다. 또 더운 날 오후, 서쪽에서 떨어지는 여름 햇살이 "주인마님이 낮잠 주무시는" 안방으로 대책없이 쏟아져 들어가는 것도 막기 위함이다. 윤증 선생의 12대 종손 윤완식 부회장(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은 명재고택을 서울 도심의 타워팰리스와 비교했다. "거긴 빛과 바람 배치를 막아놔서 집이 볼품이 없지 않느냐. 아무리 건축 기술이 발전했다 해도 자연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한다."

"잘 지어졌다"라는 말은 건축 '형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답사 기간 중 참가자들이 확인한 옛 건물의 놀라움에는, '사상의 맥이 흐른다'는 점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한옥을 지은 조상들이 추구하던 가치가 건축 양식과 재료 선택에 녹아 있되 그것이 결코 억지스럽지 않았다. 이를테면, 서쪽보다 동쪽의 위계를 인정하는 유교적 질서를 지키기 위해 ㄷ자 안채의 오른쪽 칸을 왼쪽보다 높게 짓는 대신 지붕 경사를 조정해 동쪽과 서쪽이 '대칭으로 보이게끔' 배려하는 식이다. 또 전주 한옥마을의 대문 격인 풍남문 석축을 자세히 보면, 자기 밑에 있는 돌의 모양을 살려주느라 조금씩 제 살을 깎은 탓에 온전한 네모를 유지한 돌이 거의 없다. 답사에 참가한 린다 교수는 한국의 옛 건물에서 읽히는 '겸손'을 이렇게 정의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지원'하는 겸손이다."

한옥에 흐르는 선조들의 정신은, 사실 건물 자체보다 그것이 배치된 '장소'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장소'란 곧 '마을'이다. 그래서 나흘 동안 답사팀이 경기전·서백당·양진당 같은 한옥보다 더 공들여 본 것은 그것들이 자리 잡은 전주 한옥'마을'과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이었다. 한필원 교수는 "마을과 마을 안 다른 집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한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경주 양동마을이 양성(兩性) 씨족 마을이라는 것을, 또 그 두 가문이 경쟁 관계였다는 것을 알면 그곳의 한옥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읽힌다. 사돈 관계였던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가문의 후손인 회재(晦齋) 이언적 선생의 학문적 성과를 두고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며 경쟁한 덕에, 서백당·무첨당·관가정·향단 같은 훌륭한 한옥이 양동마을에 남아 있다. 특히 월성 손씨 집안의 '관가정'과 여강 이씨 집안의 '향단'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조화를 이뤄 마을 경관을 멋들어지게 만들었다. 볼록한 지형에 앉은 관가정은 지붕을 얌전하게 낮추고, 오목한 곳에 자리잡은 향단은 처마에 멋을 부려 균형을 맞추는 식이다. 사는 곳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건 오늘날과도 닮았지만, 선조들은 지금처럼 마을 경관을 해치고 '혼자' 잘살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옥과 마을 사이를 잇고 끊는 것은 바로 '담'과 '마당'이다. 답사에 참가한 외국인들은 그 둘의 기능에 계속 호기심을 보였다. 높이가 낮고 가끔은 대문마저 없어서 도둑도 못 막을 것 같은 담은 왜 꼭 만들어놓는 것이며, 사랑채와 안채 앞에 널찍하게 펼쳐진 마당에서는 대체 뭘 하냐는 의문이었다. 한 교수는 한옥의 담과 마당을 "모든 공간을 적절히 정의하고 싶어하는 한옥 건축의 특징이 드러난 곳"이라고 설명했다. 실체와 경계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방이 열려 있어 바람과 빛, 소리가 넘나드는 한국의 정자와 대청마루처럼 "공간을 닫는 동시에 여는" 구조가 한옥에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다.

신한옥 보급 운동이 '위험'한 이유

최근 몇 년 새 한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부쩍 커졌다. 서울 북촌과 전북 전주 등 한옥이 있는 마을에 관광객이 몰리고,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신한옥을 보급한다며 예산을 책정해놓았다. 관심의 초점은 한옥이라는 '건물'이다. 한 교수는 이런 움직임이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한옥과 마을, 또 둘 사이를 구성하는 담과 마당의 관계를 무시한 채 건물 짓기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자칫 '새마을운동' 같은 한옥 운동으로 변질될 수 있다." 한 교수가 '한옥을 보는 서구의 시각'이라는 학술 행사를 꾸려, 한옥의 성급한 '보편화' 이전에 세계 속의 '보편성'부터 찾으려 한 것도 그런 염려에서였다.

마을과 마을을 이동하는 사이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 건물은 플라스틱 기와 지붕이었다. 휴게소 들머리에는 누런색 페인트 칠로 마루 흉내를 낸 '공장표' 정자가 놓여 있었다. 나흘간 마을과 담과 마당이 연결된 '진품' 한옥을 보고 난 로버트 교수는 가짜 한옥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한옥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을 둘러싼 여러 층(layer)이 단단하게 결합됐기 때문입니다. 복제해서는 아름다움이 나올 수 없어요."

출처 시사INLive 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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