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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빚다, 흥에 취하다: 우리동네 술도가를 찾아서·(11)] 포천 '이동막걸리' 대가 임복실씨의 보물 1호는

작성자상방|작성시간22.10.04|조회수75 목록 댓글 0

[술을 빚다, 흥에 취하다: 우리동네 술도가를 찾아서·(11)] 포천 '이동막걸리' 대가 임복실씨의 보물 1호는

가보 같은 막걸리 항아리, 손끝으로 빚어온 60년 삶이 담겼다

임복실씨가 59년간 애지중지하고 있는 항아리를 열고 있다. 포천/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


군(軍) 생활을 포천에서 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군대 이야기' 속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있다. 바로 막걸리다. 그중에서도 육군 5군단이 자리한 이동면에서 주조되는 이동막걸리는 포천을 대표하는 막걸리로 유명하다. 사실 이동막걸리가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이곳에서 복무한 군 장병들의 공이 크다.

요즘에는 각양각색의 병 막걸리가 나와 어디서든 쉽게 구매할 수 있지만 1960·1970년대만 하더라도 대량 양산되는 막걸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역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포천을 찾는 사람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있을 정도였다. 포천이 지금의 이름난 관광지가 된 데는 분명 막걸리도 한 몫을 차지한다.


이동막걸리가 처음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도 일동·이동 지역에는 막걸리를 만들던 큰 양조장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휴전을 맞고 1953년 무렵 5군단이 창설돼 포천지역에 주둔하면서 이곳 막걸리 맛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왜냐면 그 시절 여러 여건상 막걸리가 한 지역을 넘기가 어려웠다.

포천에서 생산된 막걸리는 거의 포천에서만 소비됐다고 보면 된다. 양조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전국으로 공급할 정도의 시설은 드물었고 더욱이 막걸리는 가내 소량 제조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이동막걸리 주조의 대가로 알려진 임복실(85)씨도 이 무렵인 1959년부터 막걸리를 빚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임씨는 포천 출신이 아니다. 태어나 자란 곳은 강원도 주문진으로 26세 때 결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포천으로 건너와 살게 됐다.

한국전쟁직후 육군 5군단 주둔하며
장병들 통해 지역 막걸리 유명해져
임 할머니, 1959년부터 술빚기 시작
친정서 배운 양조법과 맑은물 결합


따지고 보면 그가 술을 빚은 것은 결혼 전부터다. 당시 종종 가정에서 막걸리를 손수 빚긴 했으나 발효라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여간한 기술 없이는 제대로 된 막걸리를 만들긴 어렵다. 당대 이름난 양조 기술자들도 대개 숱한 세월을 거치며 기술이 경지에 이른다.

임씨는 "친정어머니가 집에서 막걸리를 담그는 것을 어려서부터 보며 자랐다"며 "어깨너머로 배워 만들기 시작했는데 주변에서 맛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클립아트코리아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눈으로 익힌 솜씨만으로 술맛을 인정받을 정도면 어쩌면 재능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임씨의 이런 재능이 평생을 바친 막걸리 장인의 길로 인도할 줄 그때는 본인도 몰랐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막걸리 양조에 뛰어든 건 포천에서 결혼생활을 하면서부터다. 마침 살던 곳이 물 맑기로 이름난 백운계곡이 흐르는 지역으로 그의 눈에는 술을 빚기에 안성맞춤인 곳으로 보였다.

결혼하자마자 생계를 위해 음식점을 하게 된 임씨는 이때부터 직접 막걸리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막걸리는 친정에서 배운 양조 기법에 포천의 맑은 물이 결합해 특유의 맛을 내며 이동막걸리라는 이름으로 입소문을 탔다.

한번 맛을 본 사람은 막걸리 고유의 텁텁함 없이 뒷맛이 깔끔하면서도 수수함에 매료되고 만다. 처음 맛본 사람들은 '흔히 알던 막걸리가 아니다', '이게 진정한 막걸리다', '막걸리 본연의 맛' 등 갖가지 반응을 보인다.

1963년 처음 막걸리를 팔던 그곳에서 지금까지 온갖 풍파에도 그 맛은 유유히 이어져 오고 있다. 임씨는 "그간 한 번도 방법을 바꿔본 적도 없고 바꾸려 한 적도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긴 세월 변함없는 맛을 유지해온 것도 대단하지만 혼자서 술을 빚어온 것은 더욱 놀랄 일이다. 그는 "지금껏 누구와도 술을 함께 만든 적이 없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고 덤덤히 말했다.

임복실씨가 완성된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고 있다. 포천/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


그가 설명하는 비법은 양조법으로서 그리 특별하다고 할 만한 점이 없다. 고두밥을 지어 누룩을 섞은 뒤 3~4일 발효하는 것이 전부다. 다만 발효할 때 쓰는 항아리는 항상 똑같다는 점이다.

처음 술을 빚었을 때 사용했던 항아리는 그와 막걸리 인생을 함께해왔으며 그는 이 항아리를 마치 가보처럼 애지중지 아낀다. 또 지하 150m에서 끌어 올린 암반수만을 쓴다는 점이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다. 임씨는 막걸리를 만들 때 이 물만을 고집해왔다.

임씨가 마지막으로 밝힌 결정적 비법은 바로 발효 온도다. 그렇다고 온도계를 넣어 항상 측정해 온도를 맞추지는 않는다. 온도를 맞추는 데는 그가 '보물 1호'라고 부르는 항아리가 비결이다.

그는 항아리에 손을 대고 느껴지는 온기로 발효를 결정한다. 그 감각만은 강산이 6번이나 바뀌는 세월 동안 잃지 않고 있다. 결국 임씨의 막걸리 맛은 그의 손끝에서 좌우되는 셈이다.

 

입소문 타며 재벌회장도 자주 찾아
항아리 온기 손으로 느껴 발효 결정
제조과정 감각 의존… '후계' 어려움


그의 막걸리가 얼마나 유명한지 엿볼 수 있는 일화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다들 고인이 된,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재벌 회장들이 임씨의 술도가를 자주 찾던 단골이었다.

세계적 기업의 회장들이 막걸리 맛에 반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발길을 할 정도면 그 맛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평소 막걸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막걸리가 생각날 때면 달려오는 회장도 있었다.

현재 '원조 이동 막걸리 총판'이란 이름을 내건 임씨의 술도가를 좋아하는 단골들은 그를 '주모'라고 부르는데 매우 토속적인 분위기인데다 막걸리 맛이 옛 주막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게 그 연유다. 그의 막걸리 맛을 보려는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는 김장의 양으로 가늠할 수 있다.

몇 년 전까지 매년 김장철이면 평균 700포기를 담가 배추를 옮기는 데 트럭이 여러 대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이제는 기력이 쇠해 손님을 더 받을 수 없어 200~300포기로 줄였다고 한다.

그토록 많은 손님 중에서 그를 유독 감동하게 한 손님이 있었다고 귀띔해줬다. 동네에서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아가던 아이가 장성해서 자녀를 데리고 손님으로 찾아와 "그 추억을 잊지 못한다"며 변함없는 막걸리 맛에 감사함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60여 년의 세월이 서린 임씨의 술도가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그의 막걸리 맛이 대가 끊길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막걸리 제조과정이 전적으로 그의 감각에 의존하다 보니 정량화할 수 없는 약점으로 양조법을 전수받으려면 '도제 살이'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고된 과정을 감수하고서라도 막걸리 비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는 "막걸리는 배고픈 시절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려 준 은인이지만 이제는 외롭다"며 "막걸리 비법을 알려주고 싶어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출처 경인일보 포천/최재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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