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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목에서

겨울 강가에서

작성자종이등불|작성시간26.01.06|조회수94 목록 댓글 9

다른 여자의 남자를 가슴에 담은 여자가

그 남자의 여자 앞에서 짓는 웃음같은 햇살.

얼어 붙은 강물 위에서 창백하고 불안하다.

얼음 위에 눈이 쌓여

강물은 순백의 명주천같다.

 

겨울 내내 강물이 얼어 있다면 좋겠다.

겨울 강을 마주할 때면 난 가끔 생각한다.

 

배를 띄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을 테니까.

너를 실은 배가 나의 언덕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희망 따위는 간직하지도 않을 테니까.

 

겨울 내내 강물이 얼어 있다면 좋겠다.

지난 며칠 내내 강이 얼었다.

얼어 붙은 강.

 

강둑으로 난 짧은 도로를 천천히 달리면서도 내 눈은

얼어붙은 강물 위로 아득하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저녁 강 위로 힘 없이 내려 앉는 푸석한 햇살.

다른 여자의 남자를 가슴에 담은 여자가

그 남자의 여자 앞에서 짓는 웃음처럼 창백하고 불안한 햇살.

 

오래도록 그 강가에 서 있다.

겨울 내내 강물이 얼어 있다면 좋겠다.

 

슬기로운 생활 시간에 동물들의 겨우살이를 공부할 때,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

곰, 다람쥐, 개구리, 뱀 등등.

겨울이 되면 나도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처럼 길고 긴 잠을 자고 싶었다.

난로가 쌔액 쌕 불꽃을 내면서 타오르는 따뜻한 교실에서

난로의 불꽃보다도 더 따뜻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겨울잠을 자고 싶은 내 눈꺼풀은 자꾸만 무거워진다.

겨울잠은 이렇게 따뜻하게 행복할 것 같다.

 

-선생님.

강물에 얼음이 얼면요.

물은 하나도 없이 모두 얼음이 되면 물고기들은 모두 얼어 죽어요?

 

무거워지던 눈꺼풀이 확 밀려 올라간다.

 

물고기가 얼어죽지는 않겠지만......

한 사발의 물도 아니 남기고 그 물이 모두 얼어버린다면.......

밑바닥의 물까지 모두 얼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첫 발령을 받았던 지리산 밑의 학교.

우리 교실에 작은 어항 하나 있었다.

유리로 된 동그란 어항이었다.

복주머니처럼 생긴 어항.

입구의 주름 모양 부분에는 푸른 색 테가 둘러져 있는 어항.

유년의 우리집에도 똑같은 모양의 어항이 있었는데.......

동그란 복주머니처럼 생긴 어항의 모습은 이미 잊어 버리고

직육면체 모양의 어항만 기억하고 있던 나는

그 오래된 모양의 어항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어항에는 누가 넣었는지 모르지만 붕어 두 마리 들어 있었다.

섬진강에서 누군가 잡아 왔을 게다.

내 기억 속에는 처음부터 있었고, 마지막까지도 있었기에

그 교실, 그 창가에 지금도 있을 것 같다.

그해 겨울 방학을 마치고 개학했을 때......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항이 꽁꽁 얼었심더, 붕어도 꽁꽁 얼어 죽었심더.

 

어항 속의 얼음을 꺼내려고 했지만 입구가 좁았기에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얼어 죽은 붕어 두 마리의 모습은 차마 바라보기 힘들었다.

묻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항을 깨지 않은 한 붕어를 꺼내서 묻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얼음이 녹아서 어항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음이 녹으면 바로 꺼내서 붕어를 묻어 주어야지.

 

그런데 난 너무 게을렀다.

처음에는 매일 얼음과 붕어의 시신을 어항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만큼

얼음이 녹았나 확인했다.

얼음은 낮에는 꺼낼 수 없을 정도로만 녹았는데, 이튿날 출근하면 다시 얼어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항을 잊어 버렸다.

.

.

.

수업 중에 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선생님, 붕어가 붕어가 살아서.....

 

아이는 창가의 어항을 가리키면서 연신 고함을 지르면서 말을 더듬었다.

언제였을까?

어항의 물이 모두 녹고, 두 마리의 붕어가 언제 얼음 속에 갇혀 있었냐는 듯이

느긋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경이로웠다.

충격이었다.

 

 

 

- 강물이 강바닥까지 꽁꽁 얼어도 물고기는 얼어 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난 아이들에게 자신있게 말했다.

그 정확한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자신의 체온을 얼음과 같은 온도로 낮추면서

그 엄청난 불행에 적응하면서 생명을 부지하였을 게다.

자신의 체온을 낮추어 온도에 적응하면서 일체의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다가

물이 녹기 시작하면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아닐까?

 

강물이 강바닥까지 얼어도 봄이 와서 물이 풀리면

다시 생명을 얻는 물고기처럼 나도...... 겨울잠을 자고 싶다. 

 

겨울 내내 강이 얼어 있다면 좋겠다.

강이 얼어 있는 동안만은 나는 너를 기다리며 나의 언덕에 서 있지 않을 테니까.

잘 가꾼 초여름 텃밭의 아침.

이슬을 털면서 싱싱하게 일어서는 상추와도 같은

푸른 희망을 아니 간직해도 좋을 테니까.

때론 체념이 희망보다 얼마나 인간적으로 우리를 배려하는지

너는 알고 있는가?

 

봄이 오고, 강물이 풀려서 부질 없는 희망 하나 다시 꿈꾼다 해도

나는 겨울 내내 강물이 얼어 있다면 좋겠다.

얼어 붙은 강 가에서 너의 배를 아니 기다릴 수 있다면 좋겠다.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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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7 고마워요, 언니.
  • 작성자지은이 | 작성시간 26.01.06 강물이
    꽁 꽁 얼어도
    붕어는 죽지아니 합니다
    (우리네도..)


    이슬을 털면서
    싱싱하게 일어나는
    상추 처럼
    어여
    쾌유 하소서
  • 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7 고맙습니다, 언니.
  • 작성자산월 | 작성시간 26.01.07 물은 얼지만 낮은 곳은 절대 다 얼지 않습니다
    물고기 얼어죽는 것 못 봤시유 ㅎ
  • 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7 호호호,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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