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새벽.
난 아직도 그 광폭한 바다 한 가운데를 떠가는 크루즈선 침실에서
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잠들어 있는 듯한 착각.
길이 333미터.
폭 41미터의 거대한 트루즈선도
시애틀을 떠나 몇 시간이 되어도
육지의 집안 침대에 누워있는 듯 미동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북태평양 그 거친 바다에서는 요람처럼 기분좋게 흔들렸다.
알래스카를 떠나 캐나다의 빅토리아섬이 가까워지자
바다는 다시 온순해졌다.
많은 해외여행을 했고,
그 해외여행에서 동남아가 아닌 유럽이나 이집트에서
패키지 상품에 선택관광으로 포함된 크루즈선을 타고 일박을 한 적 더러 있었다.
온전한 크루즈 여행은 이십 여년 전 친구들과 동남아 크루즈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유럽의 지중해가 부드럽고 아름다운 귀족 여인이라면
알래스카의 북태평양은 거칠고, 광폭하고, 분노한
사슬 풀린...... 노예였다.
내, 오래 전에 거친 인도양을 직접 마주한 적 있었지만
그 거친 인도양도 알래스카에 비하면 순하디 순한 양.
이 지구의 북쪽 어디엔가 그토록 광폭하고 거친 세상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가 알래스카를 벗어나자 지옥에서 탈출한 느낌이었다.
춥고, 거친 바람이 불고, 일 년에 반쯤은 비가 오는 땅.
안개가 자욱하고, 꽃이 거의 없는 황폐한 땅.
나무도 수종이 단 한 가지 뿐이라고 해도 무방할, 삼나무만 빽빽한
과일도 열리지 않는 땅.
낮과 밤이 뒤틀리어 구분도 없이 낮이 한참 길거나, 밤이 한참 긴 땅.
나처럼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부드럽고, 맑은 날이 많은 동아시아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에겐
봄이 시작되는 계절, 5월임에도
도무지 민들레를 제외한 꽃을 보기 힘든 땅.
그곳이 바로 지옥은 아니었을까?
아아, 그러나 연어가 여정의 끝에서 머무는 바다.
동계에는 빙하가 있고,
하계에는 오로라가 있는 땅.
광폭한 바다와 기름기 없는 거친 육지뿐인 땅, 알래스카.
지난 몇 십년 동안
그 많은 여행사들이 그 많은 여행 상품들을 새롭게 출시하고 있지만
배낭여행이나 자유여행을 제외한
알래스카 패키지 상품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거칠고, 황폐하고 지옥 같은 땅이니까.....
역사란 것도 러시아가 미국에게 싼 값에 팔아넘겼다는 정도.
연어 잡고, 고래 잡아 살아가던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고립된 세상.
알래스카 패키지 크루즈 상품도 출시된 지 얼마되지 않아
알래스카 크루즈 선박이 입항한 도시 곳곳엔
이제서야 크루즈 여행객만을 위한 볼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크루즈 여행사들이 돈을 출시하여 만든 여러 관광상품들.
아직 공사 중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하여간
어렸을 때부터
금요일 오후만 되면 여행 떠나기 바쁜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이
이제 알래스카 크루즈 패키지로 몰려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다 가 봐서 더 이상 갈 곳이 별로 없으니까.....
그러나 가 본 곳이 적어,
갈 곳이 너무나 많은 나는
알래스카가 그렇게 황량한 땅과
광폭한 바다와 눈과 비로 뒤덮인 추위와 안개밖에 없는 곳임을
먼저 알았다 해도 난 이곳을 찾았을까,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알래스카 북태평양은 얼마나 낭만적이었는가?
우리 나라 하천에서 태어난 연어와 은어가 긴 여정 끝에 도달한 바다.
그곳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모천으로 회귀하는 서사적 그리움의 한 쪽.
여름엔 오로라가, 겨울엔 빙하가 있는
만년설 설산에 뒤덮인 순결한 산 봉우리들.
얼마나 낭만적이며 서사적인가?
원시의, 태동의 꿈인가?
-그 순결한 빙하의 산 봉우리들. 신물나도록 보았다.
제발 얼른 배가 알래스카 북태평양을 벗어나
저 설산의 봉우리들도 안 보이고,
광폭한 바람도 없고,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잔잔한,
<북>이란 글자가 안 붙은 그냥 태평양의 바다,
햇살에 부서지는 윤슬을 보고 싶었다.
그랬다.
지중해의 부드러운 바닷가에는
숱한 신화와 오래된 역사의 이야기가 전해지기에
모래밭을 구르는 조개껍질 하나에도 담겨 있을 것 같은 유럽과 달리
북태평양,
그곳에는 광폭한 바다와 날뛰는 바람과
눈과 비와 추위 밖에 없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대부분 해안가 황량한 육지에는 몇 개의 집들이 흩어져 있을 뿐.
내가 돌아가면 우리 카페에 절대로 알래스카엔 가지 말라고
회원들에게 알려야지, 생각했다.
많은 돈 들여 큰 맘 먹고 떠난 여행.
쌩고생하러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미친, 길들여지지 않은 남자같은 야성 범벅의 땅이라고.....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히드클립처럼 광기 어린,
그리고 외로운......
불안하고 어두운 꿈처럼 불길한 땅이라고.....
그런데 그곳을 다녀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일주일 동안 몸서리쳤던
광폭하고 미친 그곳의 바다가 그리워진다.
마치 거칠고 엉망인 마초 남자가 지긋지긋하여
그를 떠난 여자가
이내 그 남자의 광폭한 폭력과
들짐승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언행과
공허한 뒷모습과
외로운 눈빛을 그리워하듯이.....
그 품을 그리워하듯이......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5.06 네, 북태평양 먼 바다.
알래스카에도 다녀 왔노라.
인생에 한 획을 확실하게 그었습니다. -
작성자오빈(양평) 작성시간 26.05.05 보통 사람들은
선뜻 떠날수없는
알래스카 구루즈여행
잘 다녀 오셨습니다ㅎㅎ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세요^-^ -
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5.06 승선하기 위해 오가는 길이 워낙 멀기 때문에.....
아이고, 이제 긴 시간 비행하는 곳은 못 가겠더군요.
정말 죽을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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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제이정 작성시간 26.05.05 멋진 여행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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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5.06 네, 선생님.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