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를 뽑는다.
커피머신을 사용하는 것도 귀찮아
요즘은
늘 카누 인스턴트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오늘 아침엔 앰플도 아닌
원두를 갈아 커피를 뽑아
티룸 창가에 앉는다.
비 갠 초여름 아침이 청신하다.
박하잎을 한 잎 씹은 듯
마음이 환해진다.
우리 카페에서도,
하다 못해 가전 제품 애프터 상담원들도,
지인이나 친구들의 메시지나 카톡에서도
만나는 사람들도 행복하라고 축복의 인사를 하고,
나도 행복하라고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라는 축복의 말들은
도처에 범람하여
늦봄의 꽃들처럼 멀미를 일으키지만
난 전혀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고 딱히 불행한 것도 아니다.
커피를 마시다가
무심하게 가 닿은 눈길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어머, 백합이 피었네.
올해 첫 백합꽃이네.
뜰에 나간다.
마루 떠나고 의기소침한 하루.
나만 바라 보고 산다.
내가 밖에 나오기만 기다렸다가 현관문 열리는
소리만 들리면
숨 가쁘게 뛰어와
발에 밟힐 정도로 졸졸 따라 다니는, 혼자 남겨진 우리 하루.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목숨 하나 떠난 후에
비어 버린 공간을 견디고 있다.
그깟 개새끼 한 마리 죽었다고.....말이다.
이 글을 쓰는데 또 눈물이 쏟아진다.
해마다 노란 백합이 가장 먼저 핀다.
기왕 나온 김에 작은 뜰을 한 바퀴 돈다.
분꽃도 첫 꽃이 피었고
며칠 전부터 능소화도 피기 시작한다.
올해엔 유난히 늦게 피는 능소화.
다른 곳들은 만개에 만개를 했던데....
우리집 능소화도
올해엔 나처럼 의욕이 없는 걸까?
도처에 행복과
행복하라는 축복의 인사가 범람하고 있는데
난 전혀 행복하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불행하지도
않는 요즘.
무덤덤한 시간의 흐름에
첫 백합 꽃이 내려 앉자
물이랑이 살짝 일었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1 네, 그렇긴 합니다만 별 감흥이 없네요.
빨리 이 무력감과 우울의 사막을 건넜으면 합니다. -
작성자오빈(양평) 작성시간 26.06.21 비온뒤라 그런지
덥지도 않고 공기가 상큼합니다^^
네~노람백합이 먼저 피어요
키큰 백합은 향기도 좋습니다ㅎㅎ
오늘도 즐거운 휴일 되세요^-^ -
답댓글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1 산 밑에라
아침과 저녁나절엔 추워서
긴팔 덧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빈님 댁도 그렇지요? -
답댓글 작성자오빈(양평) 작성시간 26.06.21 종이등불 네~지기님^
아침 저녁으론 시원합니다 하하 -
작성자아르테 작성시간 26.06.21 아무 일도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 무력해 보이지만 뭔 일 있으면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실 걸요. 글구 마루를 잃은 우울감은 제 경험으로 보면 오래 갑니다. 전 3개월 동안 우울했는데 다른 강아지 데려오면서 바로 극복했습니다. 강아지 영혼이 제 주변에 맴돌았는데 새 강아지가 바로 쫓아낸 것 같더라고요. 참고로 제가 데려온 아이는 유기견이면서 라사압소 종입니다. 티벳 절간에서 귀신 쫓던 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