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서역기 72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현장(玄奘) 한역
: 변기(辯機) 찬록
: 이미령 번역
제3권
4. 북인도
[8개국] - 16
가니색가왕은 적동(赤銅)으로
철판을 만들어서 논장의 글을
베껴 새기고 석함(石函)에
넣어서 봉하여 솔도파를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야차에게 명하여
이 나라를 호위하여
이학(異學)들로 하여금
이 논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명하였으며,
배우고 익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학업을
배우고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성공리에
마친 뒤 본국의 수도로
돌아온 뒤 이 나라의
서문(西門) 밖으로
나가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어앉으니,
다시 한번 이 나라를
승도(僧徒)에
보시하게 된 것이다.
가니색가왕이 죽고 난 뒤에
글리다 종족이 다시 스스로
왕을 칭하며 승도들을
내쫓고 불법을 무너뜨렸다.
한편 도화라국(都貨邏國)의
희마달라왕(呬摩呾羅王)
[당나라 말로는 설산하
(雪山下)라고 한다]의
선조는 석가 종족이다.
그는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6백 년째 되었을
때 크게 강토(疆土)를
장악하고 왕업을 이었는데,
마음을 부처님 땅에
심었고 정(情)은 법의
바다로 흐르게 하였다.
그런데 글리다가 부처님의
법을 훼멸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온 나라의 용감한
병사 3천 명을 모았다.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
여행하는 것처럼 속여
보배와 재물을 많이
지니고 그 속에 무기를
숨겨서 이 나라로 들어왔다.
이 나라의 군주는
특별히 극진하게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장사꾼 행렬 중에서
또다시 5백 명의 용맹하고
꾀가 많은 자들을
특별히 선발하였는데,
그들은 각자 예리한
칼을 소매에 숨기고는
귀중한 보배를 갖고 갔다.
그리하여 몸소 진상 올릴
것을 가져가 그것을
왕에게 헌상하였다.
이 때 설산하왕이 그
덮개를 없애고 곧 자리에
오르니 글리다왕이 이것을
보고 놀라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산하왕은 마침내
글리다왕의 목을 베고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바로 도화라국의
설산하왕이다.
이 비천한 종족이 공공연하게
학정을 자행하는 것에 분노하여
이제 그 죄인을 주살한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다."
그 나라의 신하들은 다른
나라로 유배를 보냈다.
이 나라가 평정되자 승도들을
불러 모으고 가람을 세워
예전과 같이 평안을 찾았다.
또한 다시 이 나라 서문(西門)
밖에서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승려들에게
보시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 글리다 종족은
여러 차례 승도들이
종문(宗門)을 뒤덮고
제사를 없애자 대대로
원한이 쌓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법을 혐오하게 되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자
다시 왕이라고 스스로
일컫는 자가 나왔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에는
부처님의 법을 숭앙하고
믿는 자가 거의 없으며
외도와 천사(天祠)에
특히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성의 동남쪽으로
10여 리 가다 보면
옛 성의 북쪽에 큰
산이 있는데 그 산의
남쪽에 승가람이 있고
승도는 3백여 명 있다.
그 솔도파 속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있는데
길이는 1촌 반은
됨직하고 황백색이다.
어떨 때는 재일(齋日)이 되면
때때로 광명을 발하기도 한다.
옛날 글리다 종족들이 불법을
파괴시키자 제각기 형편에
맞는 거처를 찾아 흩어졌다.
이 때 한 사문이 인도
곳곳을 옮겨다니면서
부처님의 유적을
참배하였다.
그는 지극한 정성을
올리다가 후에 본국이
평정되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즉시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도중에 코끼리
떼들이 늪지를 제멋대로
오가고 성난 듯이 달리거나
울부짖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사문은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가 피신하였다.
그러자 코끼리떼들은
경주하듯이 달려가 연못의
물을 앞다투어 빨아 마시고서
사문이 피신해 있는 나무
뿌리를 적시더니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계속)
(모셔온글)
부산 동래구 쇠미로
만월사 부산포교원
법천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