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꾸오까 여행(18)...구마모토성(熊本 城)(2)...가등청청과 그리고 사무라이 시대를 끝낸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이야기

작성자뿅망치(신현준)|작성시간26.06.20|조회수34 목록 댓글 2

구글로 본 구마모토성의 청수각

천수각...구글...관광의 중심이 된 일본의 성은 천수각이 성의 중심이고 관광의 중심이다.

우리는 동선으로 들어가서 천수각만 보고 나오고 말았는데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이 코스로 관광을 진행하게 된다.

천수각 내부를 잠시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고...천수각 앞 광장

버스를 타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다.

나오는 길 주변...  

구마모토성 공원에서 본 천수각

버스를 타러 가는 길...벚꽃이 다 졌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4시 경으로 다음 일정 때문에 성을 자세히 둘러보지 못하고에  천수각에 올라가서 경내와 구마모토 시내를 둘

러보고 성 관광이 끝난다.

 

구마모토성을 축성한 사람은  가등청정(加藤淸正, 카토 기요마사)으로 한국인들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장 중 한 명으로 매

우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어 어린 시절부터 그를 모셨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제2군 사령관으로서 조

선을 침략했다.

한양을 거쳐 함경도까지 거침없이 북진했으며,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더 나아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부

락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울산성 전투 (1597년 정유재란)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당한 채 울산왜성에서 농성전을 벌였으나. 당시 식수와 군량이 끊겨 말의

피를 마시고 흙을 파먹는 등 극한의 상황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이 끔찍한 경험은 그가 후일 구마모토성을 쌓을 때 독특한 설계를 도입하

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

 

카토 기요마사는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일본 역사상 최고의 '축성(城을 쌓는) 전문가'로 손꼽히는데  성을 쌓을 때 조선에서 끌고온 축성기술

자들로 하여금 축성을 하게 하였으며,  울산성 트라우마를 반영하여 성내에 우물을 무려 120개 이상 파서 식수를 확보했고, 성벽 내부의 벽

지(다다미 속)를 고구마 줄기(토란줄기임)로 만들어 비상시 식량으로 쓸 수 있게 조치했으며, 무사 가에시(武者返し)라는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위로 갈수록 수직에 가깝게 가팔라지는 독특한 곡선의 석축 기술을 적용했다. 이 탄탄한 석축들 덕분에 구마모토성은 후대인 1877

년 세이난 전쟁 때도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입증했다고 한다. 

 

그리고 구마모토성은 전쟁과 수많은 지진으로 인하여  불에 타기도 하고 몇 번이나 무너져서 보수를 하고 새로 건축하였다고 하며 2016년 4

월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진도 7)으로 인해 성 전체가 심각한 파손을 입는 큰 재난을 겪었다. 당시 구마모토성은 천수각의 기와가 무너져 내

리고, 곳곳의 석축(이시가키)이 붕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었다.

특히 지진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상징적인 장소가 바로 '이누이 야구라(戌亥櫓, 이누이 망루)'였다.

위의 모습처럼 망루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석축이 지진의 강력한 진동으로 대부분 무너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모퉁이의 돌 한 줄(一

本石垣, 잇폰 이시가키)만이 기적적으로 남아 건물 전체를 지탱했다. 아슬아슬하게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이 모습은 당시 일본 재해 극복의

상징이자, 에도 시대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전 세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고 한다.

지진으로 무너진 모습들

모퉁이 돌 한줄로 버텨낸 이누이  망루... 아 사진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해 졌다고..

 

대천수각과 소천수각은 지진 발생 후 약 5년에 걸친 집중적인 노력 끝에 2021년 봄, 외관과 내부 복공사를 모두 마치고 전면 개방되었는데

최신 내진 설비를 내부로 보강하였다고 한다.

 

무너진 석축(이시가키)을 복구할 때는 원래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해체 전 원래 위치의 돌을 그대로 찾아내어 그대로 짜 맞추는 방

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지진 전 촬영된 사진과 3D 스캔 데이터를 비교해가며 수만 개의 돌을 마치 거대한 퍼즐처럼 하나하나 맞추다 보니 엄

청난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고 하며, 구마모토성 전체 구조물과 성벽, 망루들을 완벽하게 지진 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최종 복구 작업은

2052년경까지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 

관심있는 분만 세이난 전쟁에 대해서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서남전쟁)은 1877년 일본 규슈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 역사상 마지막 내전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며 시대를

바꿨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자신을 따르는 하급 무사(사족)들을 이끌고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든 대규모 무장 반란이었습니

다.

앞서 이야기한 구마모토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온 세상에 다시 한번 증명한 무대가 바로 이 세이난 전쟁이기도 합니다.

 

1. 발발 배경

무사들의 몰락: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군대를 근대화하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하고, 무사들의 특권이었던 칼 차는 권리를 박탈(폐도령)했

으며, 봉록(월급)을 끊어버렸습니다. 평생 칼만 쓰며 살던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직업과 명예를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좌절: 사이고 다카모리는 몰락한 무사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했으나, 내치(국

내 개혁)가 먼저라던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 정부 주류파에게 밀려 정계에서 사퇴하고 고향인 가고시마로 내려갔습니다.

사학교(私学校) 설립: 가고시마로 돌아온 사이고는 무사들을 모아 사학교를 세우고 군사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가고시마는 사실상 메이지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독립국처럼 변해갔고,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가고시마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빼돌리려 하자 이에 분노한 사

족들이 사이고를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2. 구마모토성 전투: 격돌과 반전

사이고의 군대(살마군)는 도쿄로 진격하기 위해 북상을 시작했고, 그 길목에 있던 구마모토성에서 정부군과 치열하게 맞붙었습니다.

최신식 소총 vs 전통 검술: 정부군은 징병제로 징집된 평민 출신 군인들이 중심이었고, 반란군은 평생 검술을 닦아온 베테랑 무사들이었습니

다. 초기에는 무사들의 무시무시한 백병전(발도대)에 정부군이 크게 밀렸습니다.

성벽을 넘지 못한 무사들: 그러나 카토 기요마사가 270년 전에 쌓아 올린 구마모토성의 가파른 석축(무사 가에시)은 강력했습니다. 반란군

은 성을 포위하고 수차례 돌격했으나 기어오르지 못했고, 성내의 우물과 비상식량 덕분에 정부군은 50일 가까이 버텨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한탄: 결국 대포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증원 부대가 도착하면서 반란군은 패퇴했습니다. 이때 사이고 다카모리

는 "우리는 정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카토 기요마사 공에게 진 것이다"라며 구마모토성의 견고함에 감탄 섞인 한탄을 남겼습니다.

 

3. 전쟁의 결말과 역사적 의미

구마모토성에서 발이 묶여 전세를 역전당한 반란군은 고향인 가고시마 시로야마까지 밀려났습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사이고 다카모리

는 총상을 입고 할복(할복을 도와주는 가이샤쿠를 받음)하며 생을 마감했고, 전쟁은 정부군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무사 시대의 종말: 이 전쟁을 끝으로 일본에서 '칼을 찬 무사(사무라이)' 집단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징병제 군대의 승리: 평생 싸움만 하던 무사들이 글만 읽던 평민 출신 징병 군대에게 패배하면서, 근대식 군대 시스템의 우수성이 증명되었

습니다.

중앙집권 체제 확립: 메이지 정부는 국내의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확고한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

니다.

 

세이난 전쟁은 사무라이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사건이었다.

 

https://youtu.be/Qa-y68XACwA?si=ura7ePVTg_pqlxKQ...구마모토성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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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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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종이등불 | 작성시간 26.06.20 참으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두 번이나.....
    동영상도 두 번이나......

    에도 시대의 몰락과 함께 사무라이들의 운명도 몰락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 거리의 부랑자로 떠돌 수밖에 없었던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사무라이는 길거리에서 아무나 죽여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고기등 육류도 사무라이들 계급 까지만 먹을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사무라이 몰락과 함께
    일본 평민들의 삶의 질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하더군요.
  • 답댓글 작성자뿅망치(신현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0 우리가 여행을 가서 그곳의 역사난 사연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알 수만 있다면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즐기는 것도 있지만 견문을 넓힌다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런 내용들은 정작 여행당시에는 알 수가 없는 것들이고 여행 후기를 작성하면서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게 되는 부분들이 많지요...

    내가 여행기를 쓰는 목적도 내가 가 본 곳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이기도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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