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백제인들이 와서 쌓은 성터인 국지성(기쿠치성 가는 鞠智城 )터으로 갔다.
구마모토는 백제가 멸망하면서 망명한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을 하여 살았기 때문에 백제의 유적지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구마모토성에서 한 시간 정도를 간다.
기쿠치 성으로 가는 길의 가로수 나무꽃이 피어 있는데...
한 참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여섯시가 되었는데 성터에는 목탑과 백제 옷을 입은 청동조각 동상과 몇 채의 건물들이 성터에 남아 있고 주춧
돌 자국들만 보인다.
이곳에 일본천황이 직접 와서 기념식수(紀念植樹)를 하였다고 하며 천황이 기념식수를 한 것은 이곳이 자신들의 조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
이라고 한다.
이곳의 성은 백제가 멸망하면서 백제의 유민과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당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쌓은 후방지원을 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라
고 하며 남아 있는 몇 개의 건물은 나중에 세운 것들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숙소로 향했는데 이곳 국지성 말고도 백제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팔각지붕 망루: 팔각 고루(八角鼓樓) ...국지성의 마스코트이자 일본 고대 산성 중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된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라고
한다.
높이 15.8m에 달하는 거대한 3층 규모의 누각으로, 지붕에는 약 76톤 무게의 기와가 얹어져 있으며, 높은 곳에서 사방을 감시하는 망루의
기능과 함께, 내부에 커다란 북을 설치해 두고 군사들에게 소리로 시간을 알리거나 비상 상황을 전파하던 종루(고루)의 역할을 겸했다고 한
다.(복원된 건물)
8각고루
내부
기쿠치성 온고창생의 비(鞠智城温故創生之碑)
기쿠치성(鞠智城, 국지성) 터에 세워진 야외 동상은 '방인(防人, 사키모리)'과 그 가족을 형상화한 동상이라고 한다.
중앙의 남성은 고대 일본의 변방을 지키던 군인인 방인(防人)이고 아래의 여성과 아이: 먼 곳으로 전장을 떠나는 남편(아버지)과 이별하며
손을 잡고 있는 방인의 아내와 자녀라고 한다.
방인 동상이 있는 역사적 배경으로는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야마토 정권은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규슈 지역에 거대한 방어 기지인 기쿠치성을 축조했다.
이때 백제에서 망명해 온 귀족과 기술자들이 성의 축조를 지도했으며, 전국의 젊은이들이 '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징집되어 고향을 떠나 이곳
기쿠치성을 지켰다.
즉, 이 동상은 가족과 이별하고 타향에서 성을 지켜야 했던 고대 군인들의 애환과 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정면에서 본 비
이곳은 성터이기 역사적 의미는 있지만 볼만한 것은 없는 곳이다. 주변을 둘러보거나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성터 주변의 경치
좌측의 건물은 미창/米倉 (고상식 창고)로 유적지 발굴 당시 건물 터 주변에서 불에 탄 쌀(탄화미)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군량미를 저장하
던 창고였음이 증명된 건물이라고 한다.
가로 7.2m, 세로 9.6m 크기의 건물로, 땅바닥에서 띄워 기둥을 세운 고상식(高床式) 구조이며 통나무를 삼각형 모양으로 깎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짜 맞춘 '아제쿠라 공법(校倉造り)'이 활용되었다.
습기를 차단하고 환기가 잘되도록 설계되었으며, 기둥 위에는 쥐가 타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는 '네즈미가에시(쥐막이 판)' 장치까지 고대
지혜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미창/米倉
병사들의 숙소..복원된 건물
기쿠치 성터의 주춧돌...
팔각정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가 기쿠치 성에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늦어서 온고창생관은 들어갈 수 없었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고 저녁식사와 잠을 잘 수 있
는 화부정(花富亭)이라는 곳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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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구글의 국지성에 대한 내용이다.
일본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역사공원 기쿠치성(鞠智城, 기쿠치조)’과 그 부설 전시관인 ‘온고창생관(温故創生館)’은 한반도의 고대사, 특히
백제의 멸망 및 유민들의 역사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뜻깊은 유적지입니다.
1. 백제 멸망과 기쿠치성의 탄생 배경 (7세기 후반)
기쿠치성의 건립은 663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왜(일본)는 우호국이었던 백제의 부흥을 돕기 위해 대규모 구원병을 파병했으나,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후, 야마토 조정(왜)은 나·당 연합군이 규슈를 거쳐 일본 본토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에 따라 규슈의 중심 행정기관이었던 ‘다자이후(太宰府)’를 사수하기 위해 주변에 오노성, 기이성 등 방어용 산성들을 쌓기 시작했는데,
기쿠치성은 이 최전방 성들에 무기, 식량, 병사를 보급하는 후방 '배후 병참·지원 기지' 역할로 지어졌습니다.
2. 백제 기술진이 주도한 축성
역사공원 내 안내문과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쿠치성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귀족과 기술자(유민)들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축성되었습니다.
성곽의 구조와 토목 기술이 당시 한반도의 삼국시대 산성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한국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성'과 구조가
매우 흡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발굴 과정에서 연꽃무늬 기와(와당)를 비롯해, 저수지 터에서는 백제계 청동보살입상과 목간 등이 출토되어 한반도와의 깊은 연관성을 실증
했습니다.
3. 역사공원의 핵심 볼거리
현재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거대한 역사공원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습니다.
팔각형 고루(鼓樓): 기쿠치성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입니다. 일본 고대 산성 유적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발견된 팔각형 건물터를 바탕으로 복
원되었습니다. 높이 15.8m의 웅장한 3층 구조로, 군사들이 북을 쳐서 신호를 보내거나 사방을 감시하던 망루 역할을 했습니다.
온고창생비(溫故創生碑): 공원 입구에 세워진 대형 기념비입니다. 비석 중앙에는 최전방을 지키던 병사(사키모리)가 서 있고, 서쪽에는 축
성을 기술적으로 지도했던 백제 귀족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米창고(식량 창고): 지원 기지였던 만큼 대규모 미창(식량 비축 창고) 터들이 복원되어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게 합니다.
4. 온고창생관 (温故創生館, 온코소세이칸)
역사공원 내에 자리한 박물관 겸 안내 전시관입니다. 공원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에 가장 먼저 방문하면 좋은 장소입니다.
전시 내용: 기쿠치성의 탄생 배경이 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발굴 조사 과정에서 나온 출토 유물(목간, 토기 등), 성의 옛 모습을 재현한 정
교한 디오라마(모형)와 영상 자료를 제공합니다.
한반도 교류 코너: 전시관 내부에는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와의 문화 교류를 소개하는 특별 코너가 마련되어 있으며, 한국어 안내도 잘 구비
되어 있어 한국인 방문객들이 역사를 이해하기에 매우 좋습니다.
온고 창생관...
온고창생관 내부
관람 정보: 공원 자체는 연중무휴 무료로 상시 개방되지만, 온고창생관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15분까지 운영하며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다음날)과 연말연시는 휴관합니다.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구마모토현 야마가시(山鹿市)와 기쿠치시(菊池市)의 경계 구릉 지대에 위치해 있어, 규슈 지역의 고대사와 한반도의 연결고
리를 탐구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역사적 명소입니다.
구글에서...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종이등불 작성시간 26.06.21 백제와 관련된 성이기에
더욱 흥미를 갖고 읽었습니다.
일본엔 백제의 아직기, 왕인 이후로
우리와 무관할 수 없는 나라지요.
우리가 문물을 전해 준 나라.
그리고 아스카 문화도
한반도 계 소씨와 관련한 문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함께 접목하며 탐독하였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뿅망치(신현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1 후꾸오까에는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성이 이곳 말고도 3개나 더 있었습니다....
가야가 멸망하면서 유민이 후꾸오까로 많이 흘러 들어갔고
삼국시대에 신라나 고구려 백제 등 정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꾸준하게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일본이 문명화가 되었고..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면서 또 많은 유민이 유입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