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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또 카뮈의 부조리철학과 불교의 화엄경

작성자이두창|작성시간22.05.25|조회수103 목록 댓글 0

알베르또 카뮈는 1957 년 경 "단두대의 성찰" 이라는 책을 펴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문학가이면서 철학인이다.

 

수없는 창작문학을 펼쳤는데

전부 인간의 삶과 세상과의 대면에서 부조리 추론으로 형성되는 의미를 추구하려고 했다.

그의 저서는

"페스트" "이방인" . "시지프 신화" 등 절세의 명작을 남긴 문학가로서

죽을때도 아주 부조리 하게 죽음을 당했다.

 

카뮈는 어느 목적지를 여행하기로 하여 기차표를 끊고 기차교통을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카뮈의 절친한 친구가 자기도 여행 목적지 까지 갈테니 내 차를 타고 함께 가자고

제안하였으나 혼자 여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끈질긴 제의에 할 수 없이 동의하고

친구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경유하는 목적지를 향했는데

이 차가 불행하게도 고속도로 주변 나무를 들이박고 차가 전복되어 알베르또 카뮈는

그자리에서 죽고 대신 친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사건을 의미한다.

 

세상은 자기 의지의 의미그리고 가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조리 이론을 입증하고 죽은

부조리 철학자의 대 명사의 지위를 지니다가 부조리하게 죽은 것이다.

 

이러한 인과율의 모순은 부조리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알베르또 카뮈의 철학적 명제는" 세계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라는 의미를 비중있게 다루었다.

 

아주 장중하고 아름다운 산을 어떤 인간이 이를 보고 아름답고 장중하다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치자.

그 산은 인간이 그렇게 자기를 보고 산이 장중하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이

그냥 그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해가 저물어지면서 그 산은 대단히 추웠으며

심한 칼바람에도 인간은 갑자기 큰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가 황급히 그 산을 벗어나려고 하산하려는 도중 발을 헛 디뎌 그만 산 절벽에

떨어져서 죽어버렸다 치자.

그래도 그 산은 죽던 살던 좋던 나쁘던간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다 는 것을 

부조리 하다고 하는 것을 말 한다.

 

감정 정서라는 생각점으로 이어지는 의미는 세상의 객관적 대상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조리를 깨는 답안지를

찾았다면 인생은 성공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를 제시한 것인데 

 

인간은 정서와 감정이라는 의미를 세상에 부여 하며 그 의미를 느끼지만

외부의 세상은 전혀 그 의미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착한 사람이 아주 어렵고 고통스럽게 아니면 불행의 사건을 너무 많이 당하고 산다는 것과

악한 사람이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면서 평생 호화롭게 사는 것은

사실 선악의 인과관계로 본다면 세상의 진행은 아주 부조리 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념적 철학에 대하여 심취한 까뮈는

1944 년 칼리그라라는 운명의 주인공을 만들어 문학을 쓰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아무런 의미없이 게속 사람들을 살인하면서

죄악과 양심을 느끼지 않는 부조리에 대한 의미를 세상에향애 행위하는

책을 펴 낸 것이다.

 

사람의 삶의 이유는 저항이 없이는 극복하지 못하는 삶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반론되

함게 제시 하였는바, 이 저항성에 대한 선악 개념을 대입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없이 사람을 살인하며 도 죄악을 느끼지 않는 형태....

이를 세상을 향하여 꼬집어 낸 것이다.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양심선상의 선과 악의 본말적인 양심은 무의미 하거나

아니면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하여 잘 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지적하는 문학인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부조리를 설명할 수 있는 영원불사의 과정의 한 부분이 인생이므로

전생에 복을 많이 받아 현생을 잘 산다는 의미와

전생에 너무 악한 행동을 많이 하여 현생에는 착한자로 태어가 고생을 한다라는

그러한 가치를 명증하여 입증되어진 것도 아니므로

인간은 역시 혼란하다는 반증에 대하여 세상의 아무런 감정없이 그냥 있는 이

엄정한 현실에서

인간만이 유독 감정을 부여하고 정서를 유발하여 세상에도 옷을 입히고 있다는

것을 말 한다.

 

이를 불교적 관점에서 화엄경이 가르키는 것은 십덕의 의미로서 일체를

동관하는 것을 보는  시야가 열리지 않아서 그러하다고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라후라 라고 한다 반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만을 지니고 제한된 인식상태에

빠져 선악긔 개념을 초월하지 못하거나 거기에 갇혀서 온존하게 보지 못하는다는 것을

말 한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를 채증해나가는 자세와 인간의 모순률을 인정해야 한다는

인간의 모틀을 과감하게 제시한 알베르또 까뮈는 분명 천재였다는 사실이다.

 

짜라투스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이체의 변명 "신은 죽었다" 라는 의미와

함게 인생의 운명의 관점을 부조리 로 제시했다는 사실.

이 모순률을 인정할때 그 해답이나 단안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인간의 모순률에 대하여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으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양태가 인간의 문명속에 팽배하게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대한 답도 불면 불교의 철학속에 녹아있다는 것이고

이를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는 제한된 범주안에 주어졌지만

인과율을 벗어나는 물리법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부조리 개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분명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부조리라 함은 서로 서로 간섭되어 있다는 관계론 속에서 

그리고 12 인연법 속에서 이를 명확하게 체험하지 않으면

해결될 어떠한 명제도 이 세상의 이치에서는 존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 그만큼 성인들께서는 위대하다는 사실이다.

 

부조리에 대한 이 엑스같은 변수에는 반드시 인과율이 존재한다는

가치를 목도했을때 부조리는 해결 될 것이고

선악의 의미는 우리들의 시선으로는 반만 보는 소경이며 장님이여서

그 개념을 몰록 이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야를 터줄때

이를 십덕 십행 등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들이라는 사실을 몰록 볼 수 있다는

세존의 말씀은   아직도 중생인 인간으로서는  많은 숙제로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왜 사는가? 이 명제는 불교의 화두가 되고,

보편적인 인간의 입장에서도 항상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 인간에 세상을 향하여 부여하는 의미에 대하여 세상은 전혀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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