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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고향 삼석사 ( 부석사, 유석사, 흑석사) 방문 순례기 -

작성자이두창|작성시간26.06.15|조회수124 목록 댓글 0

고향시리즈  사찰 탐방순례기는  나름대로  많은 의미를 함축한  기획에 의해서

비롯된 방문기라 할 수 있겠다.

 

풍불회에서는  고향산천과 함께 고향의 버팀목을 하고있고,  또한 역사를 메워놓은

곳이라 할 수 있는, 고향사찰의 맥을 짚어보고, 사찰과 사찰로 연결된 태백 소백의 

지형적인 안배로 둘러쌓여 포진된 산세의 의미와 함께  풍기고향인의 특징적인 정서에 많은

영향을 준 배경은 무엇인지 탐구해나가면서 고향의 질적인 품성도 한번 헤아려 보자는

취지인데, 우리들의 생명지락을 품고 있는 본질처가 우리로서는 풍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풍기인이고, 풍기에서는 특징적이며 다른 지방에서는 찾을 수 없는

희소성의 농산품과 산업기반의 본색에 대한 얼굴을드러낸  기풍이 흐르는 산천이다.

풍기인삼인 태극삼, 풍기인견, 풍기도라지, 풍기사과, 풍기바람, 풍기군, 희대의 선비사상을

집성한 "교촌(校村), ...  모두다 어디갔는가?

 

풍기를 대변하는 이 이름됨의 고유한 기풍은 ?

지역적 정서를 내세워 반골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명사가

전부 영주로 탈바꿈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

나의 소견으로서도 보게되면 이미 풍기는 풍기인의 정신이 희석되고 사라져버린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문화의 상실은 족적의 상실을 행함과 같다.

 

지금 풍기는 풍기인으로서는 그 정신이 사라지고 맹맹해진지 오래다.

이것은 위의 모든 특산물과 지형적인 산세에서 움집된 천혜의 특징적인 가치를

스스로 소멸되고  있음에도 스스로 구경꾼 자세로 일관하는 안이한 발상으로

연연하는 것은 이미  그 정신이 죽은것과 같다.

 

풍기?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고향 풍기의 정신은 이미 와해되고 풍기라는 그 기풍의 덕과, 정신줄은

다 사라진지 오래됨을 볼때 나름 마음이 아쉽기만 하다..

 

이것은 행정적인 요소의 불가피한 변형에서 오는 변명거리 이야기가 아니다.

영주라는 행정개편은 그대로 수용하더라도

풍기 아이콘의 특징까지 복속될 필요는 없지 않는가 이 말이다.

아마 곧 있으면 풍기인견이 영주인견으로 탈바꿈 할날도 머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풍기인들은 그냥 밥먹고 등 뜨시면 되는 구태연한 발상에

휘들려지고 오로지 내 밭그릇 개주는 식으로 , (토지의 소설 대화중을 인용)

영주인삼, 영주사과  영주사찰, 영주백도라지,,,,  

고향을 아에  영주로 바꾸지던지 말이다, 안그런가?

 

풍기역사 를 서기로 친다하여도 2,000년 역사가 그냥 죽어버리고

2000년 된 나무를 베어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정신이 메몰되는 과정을 겪는것인데  , 마치  일정시대때  조선이 일본제국으로 바뀐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말이다. 딴은 비유하면 그러하다 이말이다.

우리가 닛본 게다인가?

 

주섬 주섬 먹고 살다가 자식 외지에 보내고 외지에서 자식이 출세한다 하더라도

풍기를 되 돌아볼 필요도 없이 입신으로 지향하여 출세가도를 향했다 하더라도

그대들의 고향은 어딘가를 묻는다면, 무엇이라도 대답하겠는가.

"눈물의 씨앗이라고만 남긴 그대들의 행적" 으로서  고향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말이다.

기껏 객지에서 출세를 해 본다 하더라도 , 지금 무엇이 되어 객지에서 서성이고 있는가

이말이다. 

풍기인 모두는 전부다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사람은 죽으면  돌아가신다고 했다.

외지에서 돈벌고 잘 산다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임과 같다.

 

입신출세를 한 그대들은 말만 고향 고향따지고  노바닥 자기 입신에만

정신을 내놓고 살았기에 지금 현 주소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반문해 볼 일이다.

반성 반성을 넘어서 진짜 풍기인들은 긴장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불교의 이치대로 본다면 고향에서 태어나 어디 살다가 죽어도 고향생각을

단 한순간도 잊지 못할 인연이라면 다시 고향으로 태어나 돌아온다는 여래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내일 안먹겠다고 말을 막 뱉고, 꾸정물에 뭘 배리는 현실을 비겁하게 포기 하거나 아무렇게나

가치를 유기해서는 아니된다.

같음으로 오늘 여래사상으로 그 꾸정물을 자기가 스스로 먹어야 한다는 소식처를

돌아온다, 돌아가신다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뜻을 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인간은 뭔가가 줏대가 있어야한다.

바람도 줏대가 있는 넘만 넘어오라 하여  죽령이다, 대나무처럼 곧은 영 이 넘어온다 라는

것을 죽령이라 한다.

풍기는 그러한 곳이다. 돌이많으니 금진이라 금계동이 그렇게 유명하고

금계포란형으로 봉황의 새가 금계가 되어  봉현을 마주하고 금계가 앉아 있는 곳이 풍기이다.

 

이렇게 무엇이든지 소백인들의 강건한 죽령의 줄기로서 맺어진 정신들이

전부 돈 몇푼에  기강이 흩어져서 아무 짝에도 쓸수가 없는 정신으로 자기도 모르게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아쉬운 현실로서 기가맥힌 일이아닐 수 없다.

전부들 자기들만 똑똑하고 영악하고 자기들만 정의로워서야 무엇이 유지되겠는가

이말이다.

풍기에 살면서 풍기인의 공감력이 없고 공존성의 중차대한 가치를 모르고 

타방에 팁 주는 것도 아닌 그런 포만감에 사로잡힌 것인지 말이다.

 

고향인으로서 고향의 특징을 살피고 지킬때 풍기문화는 스스로 유지되는 것이고

풍기문화는 그 자체로 정신으로 되어 풍기인의 가치가 드러내는 양태가

지속될때 풍기는 발전하고 풍기인의 목소리로서  모든 풍기인의 사회력이

집중되어지고 집약되어 그것으로 주변 지방인들과 서로 개성을 달리하며

발전을 경주하는 의지가 주어져서 함께 발전하는 것이 덕목아닌가 싶어서 해보는

소리다.

나 역시 허겁지겁 사는데 정신만 팔린  같은 속죄인이기때문에 나에대한 스스로 욕을 포함함과

같으니 내 잘났다고 하는 것은 아닌 회심의 반론이다 라고 이해해주는 것을 전제하고 깔아놓은다음

하는 말이다, . 기가맥히다.

 

일딘 고향인으로서 고향에 대한 자아비판을 차치하고....

 

부석사 입구에 자미가 라는 식당이 있다.

紫味家(자미가) ! 이 식당 주인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

식사의 품질을 논하기전에  점심을 먹으면  "자미" 이름에 취해보았다.

 

이 세상의 사물의 이치는 본래의 면목을 다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고작 이름을 지어 사물을 형용하고 명사화 하여

사물의 격물을 정형화 한 이름뿐이니. 실제의 사물의 원래의 모습을

알 길이 없이 만들어버렸다.

 

그런고로 사물의 이치인 理 와 사물의 氣 를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지대의 바람과 물길의 흐름으로 맥을 짚는 동양의 거성 풍수가 있음인데

기초는 알고 가야만 지대를 안배할 수 가 있겠다.

 

풍수지락을 논한 중화의 지형학인 청낭경을 보게되면

 

좌청룡 우백호 그리고 현무 와 주작이라는 사방의 지형구조가 전개된다.

 

좌 청룡이라는 방향은 동남지간이고  코를  의미하고 후각에 민감한 지형이고

우 백호라는   방향은 서북지간을 끼고 도는 방향인데 입이라 입에도 이빨이다.

현무 라는 북쪽 방향은  귀 를 상징하고 들리는 것을 잘해야 한다.

그리고 남쪽 주작 의 자리는  舌(설)이라 혀를 의미한다. 혀는 무엇인가

말을 하고, 맛을 음미하는 방향이다 이말과 같다.

 

맛은 불맛이다. 보는 맛도 불맛인데 보는 것은 밝음이니 빛이요 불이다.

불타는 맛에 코는 움직인다, 불고기 냄새는 일급공해아니던가?

돈 냄새 잘 맞는 자 들은 장삿꾼이고.

무엇보다 먹는것이 최고의 당상인데 이는 혀가 담당한다.

혀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인데  부석사는 바로 이 혀 자리위 위치해있다.

남쪽 방향 의 주작인 자리를 말하므로 이 火 의 기운으로  가벼운 봉황좌에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고향에 가면 이러한 말의 풍습이 있다.

 

"설설 끓는다"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면 혓바닥이 뜨거워질 정도로 (舌舌:설설) 끓어 오니

말이라도 상대방에게 막 하고 싶은 심정을 설설 끓는다 라고 한은 속어를 말함이

이것이다.

 

혀가 가볍게 춤을 추면 이미 속내는 난리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남녁의 

봉황은 아무런 땅에 앉지 않는다. 귀한 터가 봉황산의 터 부석사가 되었다.

봉황새는 너무나 커서 사람눈으로는 볼 수 가 없을정도로  온 공간을 날개한번으로도

다 덮어버리기 때문에  실제모습을 볼 수 없는 상상의 새를 봉황이라 하는데.

 

이와 반대로 용은 너무 길어서 청량국사가 長也(장야) 라  길어서 사람눈으로는 볼 수 가

없이 길기 때문에 상상의 동물로 형용화 한 것이 용이되어  봉황과 용이 온 우주를 덮은데

봉황은 불의 기운이고

용은 물의 기운이니   이를 하락정수라 이름하고  온 우주 기운의 이치로서 점유하는 양태로서

역을 관하는 관법이 있으니  맥락만이라도 이 역시 이해해야 한다.

 

 

여기부석의 봉황터에  맞게 누가 자미가라는 식당을 열었으니  지금 내가  감탄 하는 말이다.

 

남쪽은 붉고 불이며 가벼우며 6 양이 꽉찬 주작의 자리로서

풍수로 음택을 논 할때 주작이 열리면 그 집안의 여성이 잘 되고

미모의 여성이 나온다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자미가 식당은 여성이 주도한다라는 의미가 숨어져 있다.

자미가 는 혀의 맛이 감돌게 하는 식당이라는 상을 내걸은 자미원을 상징하기에

참으로 봉황산 터전의 기슭에 알맞게 이름을 지어 문패를 내건 식당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우에 이러한 이름을 지었는고?  보통 안목이 아니니 식당주인 할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태백의 자락인 봉황산에 부석사가 용을 휘감고 틀고 있음이니 수화기제라 

봉황이 주작터니 여주인이 복이 많다.. 

 

사실 우리나라 태극사상은 계룡산을 기점으로  동서로 갈라지는데

계룡 동쪽인 소백 태백 준령을 봉황자라 하고  불이 성성하고

서인 호남준령을   용왕 지라 하여    물이 성성하다고 했다.

물불은 사실 반대쪽을 끌어 안고 돌아가니 태극이라 한다.

 

물이 극에 다다르면 불이되고  불이 극에 다다르면 물이된다.

그러므로 태극이다.

시뻘건 용암의 불은  물처럼 녹아 흘러 물을 동반하여 용암이듯이

물이 압축이 강하면 불이 생성된다. 

 

불은 물을 만들고 물은 불을 만드는 아이러니 하는 창과 방패로서

모순율을 안고 세상의 이치와 지형은 돌고 도는 것이니.

얄팍한 이성론으로 무엇을 안다고 자부하지 말라.... 업장만 받는다.

 

 

봉황은 날개짓을 하고

용은    물의 조화를 끝없이 부리는데 용트림한다라고 하였는바

 

항상 말썽은 호남세력이다, 물이란 지략이다, 지략의 조화를

지니는 곳이 호남이다, 지형적으로 그렇다 이 말이다.

물론 그것도 역사적인 한 단위로서 섞임이니  필요한 것이고  태극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과불이 서로 섞이여 잡아당기며 원운동을 하는 것이 태극도 가 됨인데

건곤감리  4 방향에  작대기 부호 3 개의 각 괘 가 걸려있으니 3의 승 4 방은 12 진으로

펼치는  땅위의 소식을 말한다.

 

12 진의 삼성각인 삼승을 승하며 36 방이라 십방의 360 도 원율을 굴러가는 현상이

바로 진리의 그림처라 할 수 있으며 빛은 항상 원운동을 한다 라고 하는 요지가 이 뜻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라는 지대는 파이라 3,14 로서  타원형의 마늘쫑아리 처럼 생겨났는데, 마늘 뾰족한

부분이  바로  봉황좌표가 된다라고 이해하기만 하면된다

구르니까 원형이지 지구를 세워보면 마늘 쫑다리 같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석사는 봉황터러 지기가 너무 가벼워  돌이 떠 있다,

돌이 움직이며 날개짓 할 정도로 말이다. 

이말처럼 봉황의 火 기가 강해서 그 가벼움의 조화가 있으니

돌이 뜰 정도로 불기운의 에너지가 아주 강한 지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부석사는 옛 사찰의 이름으로는 선달사(善達寺)라 했다.하늘의 공간과 같다는 의미로

진리의 근저에 있는 봉황새의  날개짓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모든 생명들은 서로  같음을  지닌  마음자리를 보는 사찰이라는 뜻인데 (착할 善 은 모두가 같음을 의미한다)

의상조사는 양양의 낙산사라 해가 떨어지는 바다의 물을 끼고 관음지의 소리를 관하는

낙산사를 왕명으로 사찰을 건립하고

의상은 낙산사에서 푸른새를 보게 되는데 , 관세음보살을 본 것을 말하는데

그러므로 낙산사는 관음성지의 사찰이 된다.

 

이러한 곡절은 어디에서 찾는가. 새는 운다, 공명의 파동이다, 푸른새라함은 청정함을 말함이니

소리로서 진리를 펴는 세계를 주관하는 청정한 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관한다" 이를 한자어로 직역하면 "관세음"이다.

그런고로 관세음보살님을 발원하는 것이 바로 주문이며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이라는 사실도

함께 이해하기로 하자.

 

신화나 설화라 할 지라도 다 그 직관의 묘미가 성성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암시하므로

푸른 새를 본 의상조사는 이미 도인이다.

 

 

이어 문무왕의 왕명을 받아  부석에  봉황산 불의 지기가 강한 곳에 무량수전을 건립하게되는데

부석사라 이름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의상조사는 푸른새를 모시고 

부석사를 중수하게 된다.   푸른새가 봉황자락으로 변하여 화엄종찰을 열게 되는 것이니

부석사의 대웅전은 무량수전이라는 이름을 단다,

 

아미타불께서 서쪽을 보면서 좌정하고 계시는바, 아미타불을 무량수 무량광이라

한없는 수명을 지닌 극락을 관리하시는 부처님이신데, 이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생명의

본래 나이를 말함이니, 우리들의 생명나이는 영원하여 영생하므로 무량수라 이름한다.

설설 끊은 말 안하고 침착하고 탐진치를 여의는 말을 잘 하면 그 임계치의 극으로서

전개되는 생명의본자리를 보는 것이니 이를 아미타불이라 이름한다.

 

 

우리들의 모든 일체의 생명은 수명이 한이 없이 영생한다는 뜻을

아미타불이라 함임을 이해하기로 하고  아미타불을 봉안한 대웅전, 즉 무량수전에 아미타불을 봉안하였기에

무량수전이라는 사실도 함께 이해하기로 하자.

 

물 불 바람, 석  금 등의 오행에서  지수화풍으로 따진다면 石 은 바로  금진이다.

특히 봉황지대는 부석은 아주 가벼운 공간처럼 물위에 떠 있는 금진이라는 말과 같다.

우리들이 밟고 있는 흙은 바로 금진이니 이 금진에서 나는 우리들의 생명은 역시 금진이다.

무량수전이나 다름없다 이 말이 된다. 바로 서방정토로 좌정하신 아미타불은 바로 우리자신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를 증득하는 수행을 하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니 , 일단 그렇게 믿기로 하자.

 

부석에는 돌이 뜰 정도로 가벼우니  사찰이 떠 있다,

그러므로 부석자의 무량수전은 떠 있는 배로서 천축인 극락정토를 아미타불이 승선하여

바로보고 서쪽 정토를 가고자 항해하는 반야선으로  표상을 전제해야 부석사가 보인다..

위도 경도를 잡으면 인도로 그 시선을 향하고 있음으로 상징하는데 서산으로  반야선이

넘어설때 서산의 부석사에 도달하여 곧장 서해바다 인도 . 천축국으로 향하는 코스를

신라시대때 이미 의상조사가 조성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 하다.

천축국은 부처님께서 탄신하신  인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반야선이 있고 천축을 향하는 배를 띄어

석양이 질때  배홀림기둥에서 산천을 두루 바라보게되면 모든 산세가 파도처럼 바다를 상징하는

그 미학의 절정은 세계어디에서도 볼 수 가 없는 진락의 극략을 향하는 서방정토의 뱃길을

조성했다 이렇게 이해할 수 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부석사는 모두 목조 건축물이다, 쇠가 없는 것이니

하나의 배이기 때문이니 이를 표상하기도 하는 건축물이라는 사실로 이해해야 한다.

 

"자미가" 식당은 여기에 겉맞은 이름을 내 걸었으니 이 식당의 주인 낮짝 한번 보고싶다고 

내가 이야기 한 것이니  달리 광고한다고 이상한 눈초리 주지 말기 바란다.

자미가 식당을 나는 오늘 난생처음 봤기 때문이다.

 

나는 한편으로 석양진 오후녘에 낙조현상의 부석사경치를  탐방하기 희망했는데 

우에 되어서 대낮에 방문하는

스케즐에 메여져서 참으로 아쉬웠지만은 달리 미감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혀만 내 미는 더위를 내 체력으로는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려오다가 옛날 빙수집을 발견하고 그 곳에 들어가서  팔이 듬뿍 들어있는 팥빙수를 먹고

더위를 가시며 청량미를  만끽할 수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주인아저씨 눈매가 시원했다. 

"나이 들수록 먹는것이 일이다."  주작의 혈봉자리에서 혀의 감미를 느낀 부석사로

오늘의 빙수맛으로 청정미를  자미가 터에서 함축하여  명명하고자 한다.

 

흑석사에는 일주문에 간판이 없다.

무엇을 내밀만한 것이 없다는 명패로서  아직은 부처님께서 생각중인 사찰이였다.

사찰뒤가 검은색을 띄고, 아주 큰 검은바위가 있어 흑석사라고 명명한 사찰인데

예전에는  김용사 (문경) 말사로  신라시대때  혜통이 건립한 사찰이라 하였다.

이 사찰은 후에  태종의 후궁 의빈권씨가   세종의 손자 단종을 페위하고 세조가

구테타로 왕위를 찬탈할 당시  태종이 나타나 호통을 치고 세조를 때려죽일넘으로

강한 분노를 표효하며 나타났는데, 이 꿈을 세조도 동시에 꾼 사건이 계기로

되어, 세조는 쫄았다.

그 다음부터 온몸에 종기가 돋아나고 곪아지는 병을 앓게 된다.

 

이에 단종복위를 꿈꾼 세조의 여섯째 동생 금성대군을 세조가 사사한 것을 포함하여

사육신의 원혼과  세종의 윗형 효령대군의 출가, 의빈권씨의 출가 등을 종합하여

의빈권씨가 왕족의 역사적 빌미사건을 

속죄양으로 하여  의빈권씨가 세조의 허락을 당연히 받고  흑석사에  사육신, 단종, 금성대군, 효령대군 등의

복장을  소장하게 한 곳이 흑석사라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나중에 곪아터진 등창의 종기는 오대산 상원사 기슭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개우 참회진경으로 목욕하였던바 등창이 나았다는 실화는 바로 영주 흑석사의

속죄양의 복장헌납으로 계기를 이룬 것이니 흑석사는 가히 영끼가 서린 사찰임은

틀림이 없다.

 

금성대군은 소수서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단종복위운동을 위해 자기 형인 세조를 죽이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세조는 자기 동생을 죽여야했다.

 

풍기터는  이렇게 반골기질의 정신이 성성하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흑석사는 우리나라 국보급 목조아미타불 부처님이 계시는데

초암사에서 수행하시던 러시아의 유학파이기도 한  지식인 성호스님께서  초암사에 안치된

목조아미타불부처님을 이 흑석사에 안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명해진 사실이 있는데

이것을 누가 훔쳐갔다가 다시 시련을 겪는등  흑석사의 검은돌 사찰지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여기에다가 의빈권씨가 조성한 복장 역시 누가 훔쳐가서

흑석사는 믿지 못한다고 대한민국 유물박물관에서 깊숙히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고향사찰은 죽은 영가가 우굴 우굴하다는 사실이니 노바닥 아미타불이다, ㅎ  - 죄송- 

 

흑석사는 이미 세조의 분위기상 죄인의 고아사찰이 되어 페사되게 이른다.

고향사찰의 시련은 이렇게 거듭되며 생명을 겨우 유지 하고 있으니

아직 간판을 내걸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사찰 주지스님이신 동승 스님게서 그래도 아주 귀한 부처님의 전신사리를

보여주시고  풍불회 회원들엑  전람하게 해 주셨다, (합장)

참으로 신비했다, 2,500년저 부처님의 옥체 머리부분의 뼈 조각을 보았기 때문이다.

동승스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흑석사가  빨리 여명이 찿아와 밝은 사찰이 되어지기를 발원해본다.

 

흑석사에도 부석사처럼   역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 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으며.

초암사에서 모셨던 지장보살께서 석실안에 안치되어 있기도 하였는데

지장보살님은 아기를 안고 계시고, 석실위에는 사자후를 표상하는 사자가

표호하고 있었다.

성호스님께서 계셨던 초암사의 안심당을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호스님께서 흑석사에 지장을 모셨다는 것은  고향 삼석사 와 희방사 등을 연계해서 큰 연관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장전의 아이는 영가를 의미한다.

태장의 복장전까지 갖춘 희방사 , 부석사, 흑석사 유석사등은  영가의 축원으로 영험한 사찰로서

영가들이 움집하고 있다는 발견을 말한다.

 

그러므로 부석사 유석사 흑석사 희방사 등은 삼성각을 항상 친견하고 발원하며

영가를 천도하는 마음으로 대해야하는 사찰들이다.

 

이로서 풍기시내에 있는 사찰이름이 뭐라?   바로 영전사(靈田寺)이다, 영의 밭이라는

사실을 이름한다.

 

풍기고향은 영가가 많다, 아주 신령한 장소가 되기에 영전사는 이렇게 축조됨이니

이를 이해하기 바란다.

 

유석사는  수행의 도량이라기 보다, 운전을 잘 해야 하는 절묘함을 지녀야

가능한 가람터의 수장이 될 수 있었다.

도술보다  운전기능술에 능해야 이 사찰에서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니

신도가 있을련지 말이다.

얼매나 험학하고 꼬불 꼬불에 해발이 작난이 아닌데  웬만한 택시운전하시는 분도

차를 몰기가 어려울정도로 난코스를 겪으며 올라가야 사찰이 보인다.

 

풍기의 사찰은 왜 이렇게 시련의 흔적이 많은지,  사찰의 족보도

시원치 않은것을 보고 풍기인이 풍기 이름을 잃어버리는 속사정은

이렇게 유석사 한곳만 들여다 보아도 똑 같은 시련을 풍기는 이겨내고자 안간함만 쓰고 있는 양상이였다.

 

고향의 시련은 사찰에도 그 시련이 같이 동승하고 세월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회감이 든다.

 

유석사 역시 의상조사가 수행을 함에  사찰앞에 큰 돌인 반석위에서 수행했다 하여

유석사(留石寺) 이다.  돌이 머물렀다 라는 의미인데

설화에 보면 신라시대의 선덕여왕에 두운조사가 희방사에 움막을 짓고 수행을 하고

있는데  호랑이 한마리가 신음을 하여 자세히 살폈더니 입천장에 가시가 있어

이를 빼주자 마자 이 호랑이가 은혜를 아는지, 마당에 노루 멧돼지를 갖다 놓고

하여, 겨우 살려냈더니 살생을 금지하는 이 수행자에게 욕을 주는것이냐고 호통을

치자 그 다음에는 어떤 낭낭 18세 여자를 물어다 바쳤다 했다,

그 여자를 알아보니  경주의  유명한 부자인 호장의 유석의 딸임을 알고 

두운조사는 유석의 딸을 경주까지 데려다 주었던바, 호장이 감동하여  희방사를 지어주고

그 아래 수철동에 쇠로 다리를 놓아주어 수철교라 명명했고,  풍기 서문밖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주었는데 그것이 "유다리 "라고 명명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

 

창락은 비로서 이렇게 생겨났는데  영구히 즐감하고 기쁨이 번성하는 창락의 동네이름은

수철교와 유다리 의 사이는 전부 창락인 셈인데.

유석사의 삼신의 여산신 기운이 강하니, 자손이 만대에 거쳐 흥한다는 명터로서

지형이름을 올리게 된 여유가 바로 유석사의 터전과 희방사의 지기를 받아 

이어지는 명혈을 지닌 터가 된다.

 

창락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도솔봉이 자리잡고 있다. 도를 거느리는 터다.

 

그런고류 류석사(留石寺) 의 다른이름은 당시  산신의 산신령인 호랑이가  유석의

딸을 물어서 두운조사에게 바친것을 두운조사가 자기 딸을 구해준 은혜를 위해

다시 자신의 이름을 따서 喩碩寺(유석사: 크게 깨우친 사찰) 라는 이명도 지니고

있는 사찰이다.

호랑이 산신령이 여성 산신령을 모셔온 절?  삼성각의 여자신선 모신것과

무관하지 않게 보인다.

 

우리가 대강 이렇게 삼석사를 알아보았는데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있다.

모두 아미타불 서방극락정토 를 모시는 화엄종찰이라는 것이고

그리고 모두 여성에 대한 설화가 있다는 사실을  빨리 이해를 해야 한다.

 

흑석사는 지장보살이 아기를 안고 있고

삼성각이 국내에서는 보기 드믈고 문이 없이 개방되어져서

삼존불의 마애부처님이 봉안되어있다는 사실과

아미타불 상이 앞에 주어진 희한한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삼존들은 민속신앙으로 삼신이며. 삼승이며 빛 소식을 의미한다.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야 후손을 받는다는 의미로 응용되어지는 소식을

흑석사에서는 함께 함축했다는 사실.

 

유석사는  삼성각에 여자신선이 계신다는 사실 ( 유석의 딸을 호랑이가 물어서 데려왔다는

설화와 무관치 않음).

 

그리고 부석사는 의상조사를 사모한 선묘낭자전이 있다는 사실.

 

전부 풍기고향의 사찰은 여성과 관련되어진다는 사실이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옛부터 희방사 유석사 흑석사, (의빈권씨 복장) , 부석사 , 모두

기도쳐로서  삼성각의 중요한 비중을 함게 반영하고 부처님께서 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풍기인으로서 

풍기가 발전하고 산업 ,농경, 특정약물 등의 모든 문명의 발전과 정신계승의 일환으로

후손들이 발전하고 풍기의 맥을 이으려 한다면

지형적 풍수를 담고 있는 사찰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고 사찰의 보호육성에

풍기출신 도의원 시의원 그리고 유지들은 큰 힘을 모아 해당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일언하고 싶다.

 

유석사의 이렇게 큰 대웅전과 사찰시설이 건립되기에는

풍기의 직물업체사장, 인삼경영하시는 고향선배님들이 빼곡하게 이름을

올린 비석이 주어져 있는데 , 본인이 알고 있는 어르신네의 이름이 적지 않았다.

옛 어른이 더 똑독하고 현명하시고  담대하셨다는 것을 반증한다.

 

유석사는 근대 산업화 농경특경재배로서 일익을 담당한 풍기인들이 세워놓은

사찰임을 여실하게 반증한다.

 

여성은 주작이다.  불을 품고 이 세상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바로미터의 산실로서

후손의 발전을 상징하는 삼성각의 여성의 주재는 공통적으로 풍기고향 삼석사에-

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유석사 주지스님을 모시는 견공이 한분 계시는데 이름이 구빈이시다.

구빈이라 여성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짝인 남자 견공이 함께 있었는데

요단강을 건너가셨는데 이름이 구찌 였다.

결국 구찌의 아내가 구빈인데 구빈께서는 항상 주지스님을 위해 늘 곁을

지키면서 모시고 있음을 보았다.

 

창락터는 여성의 기운이 강하다, 남자는 여성보다 일찍 졸하시는 것을 보니

삼성각의 여자산신의 기운이 이렇게도 센가 보다 싶다.

 

구빈의 아낌없는 주지스님을 수바리하시고 생을 다 하시길 빈다.

 

풍기는 이처럼  이상하에 영기가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형적인 산세의 여파도 같이

작용한다는 사실과 기풍이 그렇게 만연되어있음을  의미심장함하게  느낀 하루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당을 일면으로 소개 해 본다.

예전에 부처님 마을을 운영하시는 보현스님이 계셨다.

부처님마음전에는  지장보살님께서 아주 잘 모셔지고 있었는데

해당 부처님 마음전에 나름 공양을 하고 풍불회 기원을 빈 사실이 있었으며

풍불회 회원들도 많이도 참석한 사찰이기도 하다.

 

공양을 하고 난 후에

선몽을 하였는데  달발꼴 길목 비로사 로 향하는 길목에 

웬 아주머니가 아이하나는 업고 조금 큰 아이는 손을 잡고 데리고 있었는데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어디에 계시는 분이신데 이 골짜기에 계시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는 저  달발골 계곡  물이 있는 곳에

산다고 하셨다.  영가였다.

그리고 깼는데.  당시 보현스님의 영가를 천도하는 기도력이 있음은 자명하게

인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행의 인연이 되지 않아 그 이후로는 각별하였는데.

 

풍기 삼석사나, 희방사 , 비로사 등을 방문한 계기가 인연이 되어 하는 의견이지만

풍기 에는 원혼들이 많고 영가들이 이렇게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너무 많이

머물러 져 있다는 사실을 직관할 수 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풍기인들은 모든 사찰에 가서 천도제를 많이 하는 공양의식이

절대 중요하고 필연적임을 느꼈다.

풍기는 보기보다 사찰에도 시련이 많고, 많은 영가들이 움집해서 풍기의

발전을 어렵게 하는 소식을 자꾸 주는지도 모르겠다 .

 

서로 살다가 싸우고 원이 지면 풀어야 하는 것처럼

영가들의 원혼을 풀어주는 것이 상식적으로 좋은 일이다.

묭테뉴의 수상록 을 보게되면

"지극한 장례는 스스로 본인자신의 원한을 푸는 것과 같다"

라는 철학적 명제를 성립시켰다.  이해할만한 일 아니던가?

천도라는 의미행사는 종교 비종교를 따질 필요가 없겠다.

 

 

현재 풍기에는 직물업이 사양길에 들어서며 여성들의 직장참여는 사라졌고

인구감소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며 각종 산업이 사양길에 동시적으로

병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많은 여성들의 생존을 위한 노동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 것이며

임진난에 의한 비로사찰의 전소 사건 등  많은 사람들이죽임을 당하였고

6,25 사변때에도 해당 죽령 전선에는 인민과과 대치기간이 길었으며

풍기바람이 얼마나 세겠는가. 

흑석사의 문패까지없는 설음 과 단종애사와 금성대군의 국가적 사건의 영가, 사육신

영가들이 다 모여 있는 형국이고, , 유석사의 험난한 시련으로 방치된 그런

흑막의 역사지간은 많은 것을 돌이켜 보게 된다.

 

한참 여성문화의 개방으로 부모곁을 떠나 객지 풍기에서 직장생활하는 

여성들의  직조에서 생기는 생활상의 성문화역시 많은 우연곡절을 잉태하는 사연이 즐비하다

할 것이다.

항상 이러한 기운의 영가는  이 곳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나의 부모님의 살고 가족의 생계를 이으시며 많은 난관을

극복하신 부모님의 사랑으로 자라난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고향을

성전으로 기억하고 싶은것은 매 한가지의 하나의 발원이 주어지는 것 처럼

 

우리 풍기인들도 고향의 조상들과  영가들에 대하여 항상 균형을 잡아주고

서로 원한의 족쇄로서 인생을 설설 끓게 살아온 흔적이 있다면

이를 상계하는 거래를 늘 유지하면 \영을 굴려야 우리 고향은 항상 청정한

정신으로 문화를 계승 유지하고 발전하게 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하겠다.

 

이번 고향사찰 방문기에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덕목은 발견한 셈이다

왜 우리는 돌아가신 조상을.

이미 사라진 아는이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를 자주 해야 하는 가?

호흡을 하던 호흡을 하지 않던간에 생명의 모틀로서 같은 울타리이다

그러므로  영은 늘 존재한다는 의미심장한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돌이켜 그들의 원혼을 위로해주는 마음이라도 지녀야 한다.

 

그래야 미시적으로도 집안일 이 잘되고 크게 보면 지역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가와 나는 같은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결부되어졌음을

스펜서의 말처럼 명확하게 다가오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부모님이 음덕이 없으면 그 후손이 잘 될일이 없다라는

것은  명언중에 명언이다.

우리들은 돌아가셨다고 그 정신이나 흔적도 유기해서는 아니된다.

이러한 마음의 자리를  점검하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바로 불교인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풍기인으로서 풍기의 고향자락과 산천에 연결된 맥락을 살펴본 오늘이였음은

풍불회의 작금의 인연이다, 

모든 회원님께 감사함을 드린다.

무탈하시기를  -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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