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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 이야기

수국이 필 때

작성자김낙영|작성시간26.06.14|조회수25 목록 댓글 1


수국이 필 때

김낙영


수국이 피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넉 달이 지나
약속은 계절처럼 돌아왔고
수국도 어김없이 피었다.
나도 그녀에게 갔다
그녀는 어릴 적
전교 일등이었다.
선생님의 칭찬이 먼저 그녀를 찾아왔고
친구들의 부러움이 뒤따랐다.
오래도록 가장 높은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높이를 자신의 키로 착각하기도 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똑똑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 속에 그 사람만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수많은 지식이
손바닥만 한 화면 속으로 들어왔고
예전에는 높은 산처럼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ai의 등장으로
어느새 낮은 언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릴 적 교실의 맨 앞줄에 서 있었다.
누군가의 다른 생각은 틀린 것이 되었고
작은 상처 하나는
오래된 장부를 뒤적이는 손이 되었다.
어제의 잘못이
그제의 잘못을 불러냈고
그제의 잘못은
처음의 잘못까지 끌고 왔다.
나는 늘 설명하는 사람이었고
늘 미안한 사람이었고
늘 죄인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날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맑다가 흐려지고
흐리다가 비가 내리고
갑자기 눈보라가 치고.
또 맑고 따뜻하고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당신이 틀렸다고도
당신의 자존심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고도.
그저 조용히 앞세운 그녀의.등을 바라보았다.
수국이 피면 만나자던 약속은
수국이 피는 날 끝이 났다.
오늘 돌아오는 길가에 수국이 보여
잠시 걸음을 멈춘다.
오늘 수국은 승가사 비구승의 승무를 보는 듯 하다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만으로는
서로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늦게 배웠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수국은 핀다.
수국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다만 어떤 꽃은
피어나는 순간부터
이별의 계절을 함께 데리고 온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노트북처럼 우리들에게도 엔터 키가 있었으면.
그리고 다시 시작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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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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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낙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4 아 힘들어
    오래된 연애는
    엔터 키가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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