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전차 서문구 역을 지나 온천장 종점으로 향하던 이 길은, 지금처럼 반듯하게 닦인 길이 아니었습니다. 덜컹거리는 전차의 리듬을 따라 창밖으로 펼쳐지던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미나리밭의 파도였습니다. 습지의 기운을 머금고 자란 미나리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은빛 속살을 드러내며 춤을 추었고, 전차는 그 초록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한 척의 배처럼 느릿하게 항해하곤 했습니다.
그 길의 끝자락, 전차의 경적 소리가 점차 잦아드는 곳에는 ‘국민주택 200호’라는 이름의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힐스테이트’라는 이름의 콘크리트 숲이 그 땅을 점령하여 높은 하늘을 가리고 있지만, 나에게 그곳은 여전히 낮은 담벼락 너머로 저녁 짓는 냄새가 피어오르던 정겨운 골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이 나의 마음을 아련하게 붙드는 것은, 그 낮은 지붕 아래 나의 아내가 단발머리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그녀의 시간들이 그곳엔 화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어느 맑은 날, 우리는 함께 이 길을 걸었습니다. 아내는 빛바랜 풍경 위로 기억의 조각 하나를 꺼내어 놓으며 수줍게 미소 지었습니다. "나 이곳에서 전포초등학교까지 통학할 때요, 교통비를 만화책 보는 데 다 써버리고 여기까지 걸어온 적이 있어요." 그 고백 끝에 매달린 그녀의 웃음소리는, 그 옛날 미나리밭 위로 쏟아지던 햇살처럼 맑았습니다.
책가방을 메고 만화책 속 주인공이 된 양 미나리밭 사잇길을 달려가던 소녀의 가쁜 숨소리, 전차 선로를 따라 걷던 위태롭고도 씩씩한 발걸음, 그리고 해 질 녘 국민주택 골목 어귀에서 친구들과 나누던 재잘거림들….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힘든 그 굽이진 선로의 모양새는, 어쩌면 그녀가 가졌던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의 곡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재개발의 거센 파도는 미나리밭의 물기를 말리고, 낡은 주택들을 허물어 수직의 도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견고한 지표면 아래에는 여전히 초록색 습지의 기억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를 보석처럼 뛰어다니던 한 아이의 소중한 세계 또한 그곳에 숨 쉬고 있습니다. 비록 풍경은 변했어도, 아내의 숨결이 닿았던 그 길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미나리밭으로 푸르게 일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