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조선시대 왕과 중전은 목욕과 생리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요즘에야 샤워시설이 있어서 하루에도 맘대로 씻을 수 있지만, 옛날에 서민들은 TV에서 보듯이 무슨 둥그런 나무통 안에서 씻는것 같더군요. 그리고 개울가 근처라면 거기서도 밤에 몰래 씻을수야 있을것 같습니다만,
왕과 중전을 비롯한 지체높은 궁녀들은 어떻게 목욕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옷차림이 무지하게 복잡한데 그거 다 풀고 다시 입으려면 한세월일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욕들을 자주 안했을것 같은데, 이들은 목욕을 며칠에 한번씩 했을까요... 그리고 욕탕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그들 모두 노팬티였나요? 그렇다면 궁녀분들이 생리를 하게되면 무척 피곤해질 것 같은데, 그 시대에도 생리대 비슷한 보조기구가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여성의 이런 비밀스러운 부분에 대해 옛날과 같이 유교사상이 뿌리깊었던 선조들은 어떻게 처리 했을지 무척 궁금하군요.
A :
1. 목욕부분...
왕과 왕비는 일반적으로 궁내의 일정한 (비밀스런)장소에서
시녀나 나인들에 의해 벌거벗지 않고 목욕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다만 특별한 의식이 있거나 건강이 안좋을 경우
특별히 왕은 '온양행궁'이라는 목욕궁으로 행차하여
목욕을 했던것으로 알려집니다.
'온양행궁'이란 왕의 전용 목욕궁으로
유일하게 '온궁사실'이란 역사책에 전해내려오고 있는데요.
왕은 목욕을 하기 위해 별궁으로 온양행궁을 만들고
행궁내에서 온천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또한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5명의 왕과
사도세지가가 이 온양행궁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 온양행궁은 전체 면적이 6000여평으로 일반 궁궐의
20~30분의 1정도에 불과했고, 별궁임에도 불구하고
홍문관과 사간원등을 갖추고 침실과 집무실까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왕과 왕비들은 이 온양행궁의로의 행차가 잦았고
실제로 나이가 많고 심약했던 왕과 왕비들은
거의 온양행궁에서 살다시피 하며 온천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온양행궁에서 승하한 왕과 왕비가 꽤 많더군요.
또한 양반들은 '정방'이라는 공간을 따로 두어
나무로 만든 큰 통(함지박)에 들어가 씻었다기 보다는
통 근처에서 물을 이용해 닦아내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즉 통에 들어가 씻은 것이 아니라 통 밖에서 씻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조선시대엔 유교가 강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의관을 정제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여
왕과 높은 양반들은 목욕시에도 벌거벗기를 꺼려했다는 군요.
또한 궁녀나 나인들은 따로 목욕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부엌과 창고같은 곳에서 문을 닫고
물을 끼얹거나 젖은 수건으로 닦는 방식으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창덕궁 연경당 별채에 '북수간' 또는 '목간통'이라고 하는 이름의
목욕시설의 흔적이 남아있답니다.
이는 궁궐내 사람들의 뒷물 및 목욕을 위한 방을 따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증거이죠.
2. 생리대 부분...
조선시대는 '개짐'이라고 칭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월경포, 월경대 또는 달거리포, 가지미, 개지미, 서답이라고도 불려졌다고 하는군요.
개짐의 재료는 질 좋은 광목천이였는데
그당시에는 생리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딸이 생리를 시작하면 어머니가 딸에게 몰래 하얀 광목천을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번 받은 광목천은 사용 후 계속 해서 몰래 빨아 썼다고 합니다.
이는 조선후기를 비롯해 근대초에까지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 개짐은 끈으로 묶어놓아도 흘러내리기가 좋고
밖으로 번져나올 수가 있어
개짐 밖으로 또는 개짐의 대용으로 '다리속곳'이라는 속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 다리속곳은 매우 불편한 옷이지만 현대의 '거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매우 불편하여 생리때 이외에는 거의 입지를 않았다고 하더군요.
다리속곳은 긴 감을 허리띠에 달아 바싹 붙여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짐'은 오래사용하면 오래사용한 것일 수록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도는 위급한 상황에서
부적처럼 사용되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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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목욕 역사]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고대부터 대중목욕탕이 있었다. 대체로 동양에서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목욕이 종교의식으로 승화되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서양과는 다르게 제의를 위한 자기 정화의전신적 성격을 더 많이 지녔던 것.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에 목욕제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목욕이 습관화되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때 특히 혼례를 앞둔 규수는 살갗을 희게 하기 위해 인삼탕, 창포탕, 복숭아잎탕, 쌀겨와 쌀뜨물, 밀가루 등을 세정제로 썼다. 이처럼 시대와 종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한 우리의 목욕 문화는 단순히 몸을 청결히 하는 것 이상의 의미(의식과 청결)를 가지고 있다.
> 고조선
우리나라 민족의 청결사상과 흰 피부에 대한 숭상은 다른 민족에 비해 유난히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단군신화>를 보면 우리나라 한민족의 첫 주거지가 향나무의 일종인 박달나무 근처라고 전해지며, 이것은 고조선 사회의 한국인들이 향유, 향료를 애용하여 희고 아름다운 피부를 숭배한 사상을 뜻한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목욕에 관한 역사는 지금 전해지지 않아 추측할 뿐이다.
> 삼국시대 (신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동천(東泉)에서 그의 왕비 알영이 북천(北泉)에서 목욕했다는 것이 우리나라 목욕 역사에 있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 중 신라가 목욕 문화가 가장 발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불교의 전래로 향 문화가 발달했고 목욕재계를 중시하여 목욕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절에는 대형 공중 욕조 시설이 생겨났고, 가정에도 목욕시설이 구비되었다. 목욕이 신체를 깨끗이 하는 단순 청결 개념에서 마음의 죄를 씻어내는 신성한 의식 수단으로 이용되어 사찰행사 뿐 아니라 엄숙한 행사 등에는 반드시 목욕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 고려시대
고려인들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 이상 목욕을 즐겼으며 남녀의 혼욕과 향 목욕이 발달하였다.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던 고려 시대에는 여자와 남자가 난초탕, 또는 복숭아 꽃물 등의 목욕을 같이 즐겼으며 온천요법도 즐겼다고 전해진다. 난초를 삶은 물이나 복숭아꽃물은 피부 미용에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 난(蘭) 목욕
지나치게 뜨거운 물은 난이 갖고 있는 향을 없애버리므로 따듯한 물에서 한 번 우려낸 후 20분 이상 입욕을 한다. 이 때 얼굴과 머리에도 같이 사용해주면 난의 은은한 향취가 배어 향기로워진다. 은은하고 품위있는 향을 느낄 수 있다.
> 조선시대
고려의 성문화를 퇴폐시하는 시대로 유교사상이 중시되었던 조선시대에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동일시하는 이념으로 청결을 중시하였으므로 목욕 문화가 발달한 시대다. 특히 세수를 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가장 수치로 여겨 신분에 관계없이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행위가 세수였고, 치료 목적인 온천욕과 한증욕도 많이 즐겼다. 그리고 제례 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해서 몸을 깨끗이 했다. 목욕을 하더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하였으며, 서민들은 냇가 등의 장소에서 목욕을 하였으나 양반들은 목욕통을 준비하여 헛간 또는 부엌에서 하거나 '정방'이라는 목욕소를 실내에 설치하였다.
> 개항 이후
근대적 개항 이후에는 목욕의 문화 차이로 불편을 느끼는 서양인을 위하여 서양식 호텔과 여관이 생겼으며 모든 숙박업소에서는 목욕탕을 구비하였다. 또한 1900년 부산에서 온천을 개발하면서 공중 목욕시설이 생겨 오늘날 대중 목욕탕의 시초가 되었다.
> 현대
일제시대 일본인의 추진으로 1924년 평양에서 최초의 목욕탕이 생겼으며, 서울에 공중 목욕탕이 생긴 것은 1925년이다. 오늘날 같이 집안에 목욕탕이 생겨난 것은 1970년대 아파트가 대량으로 건설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독특한 때밀이 목욕문화는 1988년 올림픽 이후 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관광 상품화되었다. 때를 밀 때 쓰이는 '이태리 타월'은 1964년 일본 관광객이 부산 온천장에 버린 꺼칠꺼칠한 수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는데, 이 원단을 만드는 '이태리식 연사기'란 기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자료출처 : 이니스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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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현대식 생리대]
매달 여자들에게만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 웬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을 빼놓고는 남녀구분의 표시인 '생리' 를 금방 떠올리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남자 아이들도 꽤 이른 나이에 이 사실을 안다고 하는군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것들이 나쁠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그만큼 자신의 어머님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알게 될테니까요. 여하튼 불과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이 손님을 '기저귀'라는 원시적인 수단으로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귀찮고 짜증나는 건 둘째 치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겠지요.
아무리 단단히 동여매도 흘러나오는 것은 예사였고, 동여맨 자국마저 옷 위로 표시가 나 마치 광고(?)라도 하는 것 같아 외출조차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여 지구촌 여성들을 '생리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은 일본의 '사카이 다카코 여사'입니다. 회사원이었던 사카이여사도 생리 때문에 심할 때는 출근조차 할 수 없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는군요.
'생리를 감쪽같이 치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사카이 여사는 몇 년을 끙끙 앓으며 자나깨나 이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을 들은 후배 하나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해 주었다고 합니다.
"흡수성이 강한 종이(화장지)로 만들면 흘러나올 염려도 없고 화장실에서 감쪽같이 갈아 끼울 수도 있지 않겠어요?"
사카이 여사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녀는 즉석에서 20만엔을 주고 이 아이디어를 사들였습니다. 우선 모든 종이를 모아 그 중 흡수성이 가장 강한 것을 찾아내 알맞은 크기로 접었습니다. 다음은 흘러나옴을 방지하기 위해 겉 부분에 엷은 방수막을 처리하고, 착용이 편리하도록 부위에 따라 두께와 크기를 조절했습니다.
물론, 약품을 이용한 위생처리도 잊지 않았지요. 연구는 여기에서 우선 일단락 되었습니다. 사카이 여사는 때마침 찾아온 생리를 자신의 발명품을 이용해 맞이했습니다. 사용 결과 흘러나오지 않고 표시가 나지 않는데다 날아갈듯이 편리했던 것입니다.
'이 편리함을 모든 여자들에게 나눠주자.'
그녀는 특허등록을 마친 후 서둘러 회사를 설립하고. '안네'라는 상표로 생산을 개시했습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상표명 또한 귀염성이 있고 애교가 있는 탓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여중생까지도 스스럼없이 그녀의 발명품을 찾았습니다. 어느 약국에서든 '안네'하고 속삭이기만해도 모두들 금방 알아들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매월 어김없이 5천만개 이상이 팔려 나갔고, 수출요청이 쇄도했으나 국내시장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발명품인 생리대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3년이 채 안돼 세계 여성들을 생리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안네'회사는 이 발명 하나로 거뜬히 중견기업의 대열에 올라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지요.
[출처 :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조선시대 왕과 중전은 목욕과 생리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요즘에야 샤워시설이 있어서 하루에도 맘대로 씻을 수 있지만, 옛날에 서민들은 TV에서 보듯이 무슨 둥그런 나무통 안에서 씻는것 같더군요. 그리고 개울가 근처라면 거기서도 밤에 몰래 씻을수야 있을것 같습니다만,
왕과 중전을 비롯한 지체높은 궁녀들은 어떻게 목욕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옷차림이 무지하게 복잡한데 그거 다 풀고 다시 입으려면 한세월일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욕들을 자주 안했을것 같은데, 이들은 목욕을 며칠에 한번씩 했을까요... 그리고 욕탕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그들 모두 노팬티였나요? 그렇다면 궁녀분들이 생리를 하게되면 무척 피곤해질 것 같은데, 그 시대에도 생리대 비슷한 보조기구가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여성의 이런 비밀스러운 부분에 대해 옛날과 같이 유교사상이 뿌리깊었던 선조들은 어떻게 처리 했을지 무척 궁금하군요.
A :
1. 목욕부분...
왕과 왕비는 일반적으로 궁내의 일정한 (비밀스런)장소에서
시녀나 나인들에 의해 벌거벗지 않고 목욕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다만 특별한 의식이 있거나 건강이 안좋을 경우
특별히 왕은 '온양행궁'이라는 목욕궁으로 행차하여
목욕을 했던것으로 알려집니다.
'온양행궁'이란 왕의 전용 목욕궁으로
유일하게 '온궁사실'이란 역사책에 전해내려오고 있는데요.
왕은 목욕을 하기 위해 별궁으로 온양행궁을 만들고
행궁내에서 온천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또한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5명의 왕과
사도세지가가 이 온양행궁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 온양행궁은 전체 면적이 6000여평으로 일반 궁궐의
20~30분의 1정도에 불과했고, 별궁임에도 불구하고
홍문관과 사간원등을 갖추고 침실과 집무실까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왕과 왕비들은 이 온양행궁의로의 행차가 잦았고
실제로 나이가 많고 심약했던 왕과 왕비들은
거의 온양행궁에서 살다시피 하며 온천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온양행궁에서 승하한 왕과 왕비가 꽤 많더군요.
또한 양반들은 '정방'이라는 공간을 따로 두어
나무로 만든 큰 통(함지박)에 들어가 씻었다기 보다는
통 근처에서 물을 이용해 닦아내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즉 통에 들어가 씻은 것이 아니라 통 밖에서 씻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조선시대엔 유교가 강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의관을 정제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여
왕과 높은 양반들은 목욕시에도 벌거벗기를 꺼려했다는 군요.
또한 궁녀나 나인들은 따로 목욕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부엌과 창고같은 곳에서 문을 닫고
물을 끼얹거나 젖은 수건으로 닦는 방식으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창덕궁 연경당 별채에 '북수간' 또는 '목간통'이라고 하는 이름의
목욕시설의 흔적이 남아있답니다.
이는 궁궐내 사람들의 뒷물 및 목욕을 위한 방을 따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증거이죠.
2. 생리대 부분...
조선시대는 '개짐'이라고 칭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월경포, 월경대 또는 달거리포, 가지미, 개지미, 서답이라고도 불려졌다고 하는군요.
개짐의 재료는 질 좋은 광목천이였는데
그당시에는 생리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딸이 생리를 시작하면 어머니가 딸에게 몰래 하얀 광목천을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번 받은 광목천은 사용 후 계속 해서 몰래 빨아 썼다고 합니다.
이는 조선후기를 비롯해 근대초에까지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 개짐은 끈으로 묶어놓아도 흘러내리기가 좋고
밖으로 번져나올 수가 있어
개짐 밖으로 또는 개짐의 대용으로 '다리속곳'이라는 속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 다리속곳은 매우 불편한 옷이지만 현대의 '거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매우 불편하여 생리때 이외에는 거의 입지를 않았다고 하더군요.
다리속곳은 긴 감을 허리띠에 달아 바싹 붙여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짐'은 오래사용하면 오래사용한 것일 수록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도는 위급한 상황에서
부적처럼 사용되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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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목욕 역사]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고대부터 대중목욕탕이 있었다. 대체로 동양에서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목욕이 종교의식으로 승화되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서양과는 다르게 제의를 위한 자기 정화의전신적 성격을 더 많이 지녔던 것.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에 목욕제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목욕이 습관화되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때 특히 혼례를 앞둔 규수는 살갗을 희게 하기 위해 인삼탕, 창포탕, 복숭아잎탕, 쌀겨와 쌀뜨물, 밀가루 등을 세정제로 썼다. 이처럼 시대와 종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한 우리의 목욕 문화는 단순히 몸을 청결히 하는 것 이상의 의미(의식과 청결)를 가지고 있다.
> 고조선
우리나라 민족의 청결사상과 흰 피부에 대한 숭상은 다른 민족에 비해 유난히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단군신화>를 보면 우리나라 한민족의 첫 주거지가 향나무의 일종인 박달나무 근처라고 전해지며, 이것은 고조선 사회의 한국인들이 향유, 향료를 애용하여 희고 아름다운 피부를 숭배한 사상을 뜻한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목욕에 관한 역사는 지금 전해지지 않아 추측할 뿐이다.
> 삼국시대 (신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동천(東泉)에서 그의 왕비 알영이 북천(北泉)에서 목욕했다는 것이 우리나라 목욕 역사에 있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 중 신라가 목욕 문화가 가장 발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불교의 전래로 향 문화가 발달했고 목욕재계를 중시하여 목욕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절에는 대형 공중 욕조 시설이 생겨났고, 가정에도 목욕시설이 구비되었다. 목욕이 신체를 깨끗이 하는 단순 청결 개념에서 마음의 죄를 씻어내는 신성한 의식 수단으로 이용되어 사찰행사 뿐 아니라 엄숙한 행사 등에는 반드시 목욕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 고려시대
고려인들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 이상 목욕을 즐겼으며 남녀의 혼욕과 향 목욕이 발달하였다.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던 고려 시대에는 여자와 남자가 난초탕, 또는 복숭아 꽃물 등의 목욕을 같이 즐겼으며 온천요법도 즐겼다고 전해진다. 난초를 삶은 물이나 복숭아꽃물은 피부 미용에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 난(蘭) 목욕
지나치게 뜨거운 물은 난이 갖고 있는 향을 없애버리므로 따듯한 물에서 한 번 우려낸 후 20분 이상 입욕을 한다. 이 때 얼굴과 머리에도 같이 사용해주면 난의 은은한 향취가 배어 향기로워진다. 은은하고 품위있는 향을 느낄 수 있다.
> 조선시대
고려의 성문화를 퇴폐시하는 시대로 유교사상이 중시되었던 조선시대에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동일시하는 이념으로 청결을 중시하였으므로 목욕 문화가 발달한 시대다. 특히 세수를 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가장 수치로 여겨 신분에 관계없이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행위가 세수였고, 치료 목적인 온천욕과 한증욕도 많이 즐겼다. 그리고 제례 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해서 몸을 깨끗이 했다. 목욕을 하더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하였으며, 서민들은 냇가 등의 장소에서 목욕을 하였으나 양반들은 목욕통을 준비하여 헛간 또는 부엌에서 하거나 '정방'이라는 목욕소를 실내에 설치하였다.
> 개항 이후
근대적 개항 이후에는 목욕의 문화 차이로 불편을 느끼는 서양인을 위하여 서양식 호텔과 여관이 생겼으며 모든 숙박업소에서는 목욕탕을 구비하였다. 또한 1900년 부산에서 온천을 개발하면서 공중 목욕시설이 생겨 오늘날 대중 목욕탕의 시초가 되었다.
> 현대
일제시대 일본인의 추진으로 1924년 평양에서 최초의 목욕탕이 생겼으며, 서울에 공중 목욕탕이 생긴 것은 1925년이다. 오늘날 같이 집안에 목욕탕이 생겨난 것은 1970년대 아파트가 대량으로 건설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독특한 때밀이 목욕문화는 1988년 올림픽 이후 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관광 상품화되었다. 때를 밀 때 쓰이는 '이태리 타월'은 1964년 일본 관광객이 부산 온천장에 버린 꺼칠꺼칠한 수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는데, 이 원단을 만드는 '이태리식 연사기'란 기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자료출처 : 이니스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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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현대식 생리대]
매달 여자들에게만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 웬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을 빼놓고는 남녀구분의 표시인 '생리' 를 금방 떠올리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남자 아이들도 꽤 이른 나이에 이 사실을 안다고 하는군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것들이 나쁠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그만큼 자신의 어머님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알게 될테니까요. 여하튼 불과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이 손님을 '기저귀'라는 원시적인 수단으로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귀찮고 짜증나는 건 둘째 치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겠지요.
아무리 단단히 동여매도 흘러나오는 것은 예사였고, 동여맨 자국마저 옷 위로 표시가 나 마치 광고(?)라도 하는 것 같아 외출조차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여 지구촌 여성들을 '생리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은 일본의 '사카이 다카코 여사'입니다. 회사원이었던 사카이여사도 생리 때문에 심할 때는 출근조차 할 수 없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는군요.
'생리를 감쪽같이 치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사카이 여사는 몇 년을 끙끙 앓으며 자나깨나 이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을 들은 후배 하나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해 주었다고 합니다.
"흡수성이 강한 종이(화장지)로 만들면 흘러나올 염려도 없고 화장실에서 감쪽같이 갈아 끼울 수도 있지 않겠어요?"
사카이 여사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녀는 즉석에서 20만엔을 주고 이 아이디어를 사들였습니다. 우선 모든 종이를 모아 그 중 흡수성이 가장 강한 것을 찾아내 알맞은 크기로 접었습니다. 다음은 흘러나옴을 방지하기 위해 겉 부분에 엷은 방수막을 처리하고, 착용이 편리하도록 부위에 따라 두께와 크기를 조절했습니다.
물론, 약품을 이용한 위생처리도 잊지 않았지요. 연구는 여기에서 우선 일단락 되었습니다. 사카이 여사는 때마침 찾아온 생리를 자신의 발명품을 이용해 맞이했습니다. 사용 결과 흘러나오지 않고 표시가 나지 않는데다 날아갈듯이 편리했던 것입니다.
'이 편리함을 모든 여자들에게 나눠주자.'
그녀는 특허등록을 마친 후 서둘러 회사를 설립하고. '안네'라는 상표로 생산을 개시했습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상표명 또한 귀염성이 있고 애교가 있는 탓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여중생까지도 스스럼없이 그녀의 발명품을 찾았습니다. 어느 약국에서든 '안네'하고 속삭이기만해도 모두들 금방 알아들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매월 어김없이 5천만개 이상이 팔려 나갔고, 수출요청이 쇄도했으나 국내시장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발명품인 생리대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3년이 채 안돼 세계 여성들을 생리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안네'회사는 이 발명 하나로 거뜬히 중견기업의 대열에 올라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지요.
[출처 : 합동특허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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