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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유산 소식

[인물]대한제국의 현존하는황녀 이해원 옹주

작성자쪼가리|작성시간04.07.17|조회수346 목록 댓글 2

월간화보종합 대한뉴스 www.daehannews.co.kr 2004.7

대한제국의 황녀 이해원 옹주

“곤궁한 생활이지만 황실의 품위와 기개는 지킵니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왠 황족인가?

그러나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황족이 있다. 이해원 옹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는 광무로 칭제건원을 단행한다.

하지만 황제국은 일제의 침략으로 단명을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녀는 일제에 대한 황실의 탄압과 왜곡작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산증인이다.

현재 생존한 황족 중 최고령자인 그녀는 현재 경기도 하남시의 무허가 월세방에서

둘째 아들인 이진왕씨와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운현 오빠가 오는 날이 제일 좋았습니다”


이해원 옹주는 의친왕의 둘째딸로 1919년에 태어났다.

광무황제의 아들인 아버지 의친왕은 여러 명의 부인들 사이에 12남 9녀를 두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망했다. 그나마 생존한 사람들은 미국, 남미 등지로 이민을 가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현재 그녀는 생존한 황족 가운데 어머니의 당호를 받은 자녀 중

그 서열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이해원 옹주는 의친왕이 살던 사동궁에서 자라 종로소학교와 경기고녀(현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당시 의친왕과 지밀어머니(덕인당 김씨)의 슬하에서 경제적으로는 풍족한 생활을 했다.

일제의 내선일체정책으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해원 옹주는 지금도

일제의 간악한 침략 정책을 질타했다.

“대한제국 황족의 씨를 말리려고 일본은 작정했습니다.

광무황제와 명성황후에 이어 융희황제까지 암살하였으며,

일본 황족과의 정략 결혼으로 혈통적 침략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당시 백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또한 현재 친일명단에 의친왕의 장인이 되는 김사준 선생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데 대해서도

“그분이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강제로 주는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독립운동에 계속 가담하면서 작위를 삭탈 당하고,

신한혁명당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는 등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단순히 작위 받은 것 만으로 친일파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지금도 과거 시절을 또렷하게 회상하는 그녀는 여든이 넘긴 노인이라기 보다

아직도 젊은이 같은 열의에 찬 모습을 보였다.

지금껏 小食을 통해 건강을 유지한다고 했다.

또 아무리 어린 사람에게도 ‘해라’체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

“어린 시절 궁에서 살 때 지밀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직 ‘해라’체를 하지도 않을 뿐더러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녀는 검소한 옷매무새지만 기품과 위엄이 느껴지고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어린시절 궁에서 형제, 자매들과의 생활의 중심은

둘째 오빠이자 운현궁으로 양자로 들어간 이우 황손이었다.

그는 의친왕의 후손 중 가장 확고부동한 독립의지를 갖고,

일제의 강제 혼혈정책에도 반대했다.

일본인 아내를 맞이할 수 없었던 그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 게

박찬주 여사와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할 정도로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강했다.

인물 또한 상당한 미남으로 몸가짐은 언제나 체통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이우 황손은 강제 친일 교육정책으로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방학 때마다 한국으로 들어오면 집안의 모든 형제들과 함께 일제히 운현궁으로 달려가

동기간의 정을 돈독히 했다. 이해원 옹주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님의 독립운동 때문에 궁에서의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였는데 운현 오빠가 오면 명동으로 가서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만두를 사먹기도 하고, 스케이트 장에서 놀다가 박찬주 언니가 오면

데이트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자리를 피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비운의 황실 가족사


이해원 옹주는 결혼 후 게이오 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던 남편과 함께 일본에서 생활을 했다.

당시, 일본에는 대한제국의 황족이 일제에 의한 강제 결혼 정책으로 억류되어 있었다.

영친왕은 일본왕의 왕비 간택에서 임신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고 떨어진

나시모토 궁의 이방자 여사와 대한 황실의 절통을 위해 정략적 결혼을 한 상태였다.

광무황제의 외동딸인 덕혜옹주는 일본에서도 가장 외지인 대마도주와 강제 결혼하게 되었으나

얼마 후 정신병동에 감금을 당하고 그녀의 딸인 정혜도 현해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해원 옹주의 큰 오빠인 이건 황손도 의친왕의 장남이기에 일본 귀족과 강제 결혼을 했다.

운현궁의 주인으로서 유일하게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대한 이우 황손이지만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의 광기어린 침략 정책 때문에 민중과 황손들에게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의 수 많은 청년과 아녀자들을 속칭,

‘황군’의 일원으로 전쟁 참여를 강요했다. 황실의 구성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우 황손도 일본의 관동군으로 배속되어 중국 태원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이우 황손은 집안의 모든 식구들을 운현궁에 모았다. 이해원 옹주가 그때를 회상한다.

“그날은 정말 비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갑자기 운현 오빠가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중대한 발표를 한다고 하길래 궁에 들어 갔더니, 갑자기 권총을 빼어 드시고는

자신이 관동군으로 배속되어 태원에서 일본군의 첨병이 되어 전쟁을 벌여야 하지만

이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일제에 의해 치욕을 당하느니 내 손으로 처와 두 아들을 모두 죽이고 가겠다’며,

총을 쏘려고 했습니다. 식구들은 모두 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렸지요.

저는 지금도 그 당시의 일들이 생생하게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운현 오빠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였는지 여실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운현 오빠는 태원에서 다시 히로시마로 발령을 받은 그날

바로 원자폭탄으로 희생을 당하는 불운을 맞게 됩니다”

해방을 맞이하자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정부에서도 외면하여

황손들은 말 그대로 길거리에 내팽겨졌다. 또한 이승만 정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아버지 의친왕(일제침략이전)2.결혼식때 황복을 입은 모습(1936년)3.사동궁시절 황손들과 함께(우측가장하단)

여인으로서 힘들었던 삶


경기여고를 졸업한 해인 1936년 이해원 옹주는 충청도 갑부의 아들인 이승규 씨와 결혼한다.

지밀 어머니(의친왕비 덕인당 김씨)의 황복을 입고 성대하게 혼례를 치렀다.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지금도 창덕궁에 남아 있는 융희황제의 다임러 차량을

웨딩카로 사용할 정도로 의친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또한 황손들은 당시 총독부에서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 받았으며,

시댁도 상당한 재력가여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생활했다.

해방 후 문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강제로 납북이 되어

지금까지도 생사가 묘연한 상황이 되었다.

북에서는 봉건 귀족이라는 명분으로 탄압 받았을 것이고,

남에서는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그녀는 힘들게 4남매를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돈에 대한 관념도 없을 뿐더러 남겨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재산을 찾아주겠다는 사람들이 빈번히 접근했지만 사기만 당하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지금 이해원 옹주는 서울 연희동의 땅 17만평을 되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1942년 남편이 선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이 땅은 전쟁을 거치면서

소유권이 전직 고위 법관인 김모씨에게 넘어가버리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녀는 청와대와 관계기관에 호소를 했으나 오히려 안기부에 불려 가

소송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내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이것을 찾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친 후에 사회에 환원할 것입니다.

위상이 떨어진 황실에 대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애에 반드시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모임과의 만남


1999년 인터넷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大韓皇室再建會 (cafe.daum.net/KoreanEmpire)라는

카페가 만들어졌다.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비영리 황실역사 연구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약 3,500여 명의 회원을 자랑한다.

이 단체는 황실의 잘못된 인식과 일제의 식민사관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이해원 옹주가 현재 경기도 하남에서 4평짜리 무허가 주택에 기거하고 있다는 사정을 들은 후

서울시청과 관계단체를 통해 서울의 북촌 마을 등에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들 단체의 운영진인 김하나, 오영임, 이세균, 이진원 씨는 한 목소리로 말한다.

“무조건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주면서 땅에 떨어진 우리의 역사 인식을 다시금 환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며, 정부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해원 옹주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대한제국의 황실은 백성들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당시의 상황이

그리 순탄하지 못했을 뿐이지 프랑스나 중국처럼 타도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500년 이상 이끌어 간 나라가 지구상에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준엄한 순리에 어긋났으면 망해도 벌써 망했을 나라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위하고 지도자로서의 본분을 다한 나라의 자존심이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짓밟힌다면,

바로 지금 우리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이들 황실단체의 회원들에게도 감사를 표시했다.

“여러 학생들이 도와주는 것에 대해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혼자 가지고 가야 할 짐을 이렇게 세상에 알려주신 것에 대해 희미한 기억이라도

역사적 사실에 흔적을 남기어 후세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이해원 옹주의 모습에서 과거 당당했던 황실의 기개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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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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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종묘 | 작성시간 04.07.17 정말 .. 마음이 짠해 오는 내용이었습니다.
  • 작성자冬天 | 작성시간 04.07.23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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