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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부터 낙동강까지, 6·25전쟁 초기 전투 이야기
6월 25일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날입니다. 6·25전쟁일을 맞아 주요 전투들을 살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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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6월 25일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날입니다.
6·25전쟁일을 맞아
주요 전투들을 살펴보며,
오늘의 자유와 평화가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 봅시다.
전쟁의 향방을 바꾼 3일,
춘천지구 전투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춘천대첩이라 불리는
춘천지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입니다.
북한군은 춘천과 가평을 점령한 뒤
서울 동남부로 진출하여
국군 주력 부대를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은
춘천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끈질기게 저지했습니다.
특히 심일 중위는
북한군 자주포를 향한
육탄 공격을 감행해
전과를 올렸습니다.
국군은 비록 서울 함락에 따라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3일 동안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며
중대한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그 결과 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최초의 유엔군 전력이
한반도에 도착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습니다.
춘천지구 전투는
전쟁 초기 북한군의 계획을
무산시킨 중요한 전투로 평가됩니다.
50m
© NAVER Corp.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근화동 8-6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첫 지원군,
오산 죽미령 전투
유엔군초전기념관
오산 죽미령 전투는
1950년 7월 5일
경기도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벌어진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입니다.
당시 북한군은
수원을 점령한 뒤
대전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죽미령에 배치되었습니다.
유엔군초전기념비
병력과 장비 모두 열세였지만
유엔군은 북한군 전차부대를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약 6시간 15분 동안 이어진 전투 끝에
유엔군은 철수했지만,
이 전투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습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오산 죽미령 전투는
유엔군이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실제로 전장에 투입된
첫 번째 전투였습니다.
또한 유엔 창설 이후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집단적 안보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집니다.
30m
© NAVER Corp.
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
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600-1
대한민국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 전투
낙동강승전기념관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칠곡, 영천, 포항 등
낙동강 유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방어전입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당시 왜관과 다부동은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있던
대구로 향하는 길목이었습니다.
북한군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연합작전,
그리고 대규모 공중폭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공격에 실패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 전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했고,
후방이 차단된 북한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동강승전기념관
9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하며
대반격에 나섰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대한민국을 지켜낸
최후의 방어선이자,
전세 역전의 발판이 된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10km
© NAVER Corp.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순환로 574-110 낙동강승전기념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석적로 226
전세를 뒤집은 기적의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흐름을 바꾼
가장 결정적인 작전으로 꼽힙니다.
전쟁 초기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전세를 뒤집기 위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구상했습니다.
|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좁은 수로를 가진 지역으로 상륙작전에 매우 불리한 곳이었지만, 북한군이 예상하지 못할 장소라는 점에서 선택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 제1해병사단과 대한민국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며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엔군은 월미도를 확보한 뒤 인천 시내와 인천항으로 진격해 상륙 거점을 구축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의 보급선이 끊기고 후방이 위협받게 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후 유엔군은 서울로 진격했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5km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38 인천상륙작전상륙지점(녹색해안)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문화로 30 인천상륙작전상륙지점(적색해안)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1가 6-176 인천상륙작전상륙지점(청색해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627-24 팔미도등대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대한민국이 6·25전쟁일을 맞아 전쟁의 역사와 영웅들의 헌신을 기억하며, 호국영령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해보시기 바랍니다. #국가보훈부 #625전쟁 #호국보훈의달 #호국보훈 #참전용사 #유엔참전용사 태그#국가보훈부#625전쟁#호국보훈의달#호국보훈#참전용사#유엔참전용사 공감 3 이 글에 공감한 블로거 열고 닫기 댓글 쓰기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블로그 보내기카페 보내기Keep 보내기메모 보내기기타 보내기 펼치기 인쇄 |
| 보훈 뉴~스 2026년 6월의 6·25전쟁영웅 <김광수 육군 대위, 밴 플리트 부자(父子)> URL 복사 이웃 https://blog.naver.com/mpvalove/224300007732 2026년 6월의 6·25전쟁영웅 <김광수 육군 대위, 밴 플리트 부자(父子)> 국가보훈부는 6·25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김광수 육군 대위, 밴 플리트 미 ... blog.naver.com 국가보훈부는 6·25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김광수 육군 대위, 밴 플리트 미 육군 대장과 그의 아들 밴 플리트 2세 공군 대위를 2026년 6월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북진능선을 사수하고 전사한 (1931.07.06.~1953.06.13.) 을지무공훈장(1953) 김광수 대위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1951년 12월 육군 소위 (갑종장교 제8기)로 임관했습니다. 이후 1953년 3월 중위로 진급한 뒤 제9사단 제30연대 제11중대 선임 장교로 보직되어 강원도 김화지역 북진능선 방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53년 6월, 중공군은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중부전선에 대규모 공세를 단행했습니다. 당시 김광수 대위는 선임장교이자 화기 소대장으로서 오성산 인근 북진능선 K고지를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파상공격*으로 중대의 주진지가 적에게 점령되는 위기 상황에 놓였지만, 김광수 대위는 부대원들과 함께 결사적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되풀이하여 하는 공격 그 결과 K고지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김광수 대위는 이후 적의 수류탄에 중상을 입었음에도 끝까지 북진능선을 사수하다 전사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아버지 (1892.03.19.~1992.09.23.) 미국 수훈십자훈장(1953) 밴 플리트 장군은 1892년 3월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벌지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1951년 4월 11일에는 미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한국 도착 후 승산이 없으니 철수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하며 전선을 지휘했습니다. 특히 중공군의 공세를 막고 여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전선을 38도선 북쪽까지 북상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출처] 춘천부터 낙동강까지, 6·25전쟁 초기 전투 이야기|작성자 전북서부보훈지청 아들 밴 플리트 2세 미국 공군 대위 (1925.12.28.~1952.04.04.)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밴 플리트 2세도 6·25전쟁에 자원하여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1952년 4월 4일, 서해 연안 해주 인근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습니다. 외아들의 실종 소식을 접한 뒤에도 밴 플리트 장군은 1953년 2월까지 제8군 사령관으로서 임무를 계속 수행했습니다. 한미동맹의 토대를 남긴 밴 플리트 장군은 전쟁 중이던 1951년 10월,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로 다시 개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정예 장교 양성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953년 2월 제8군 사령관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돌아간 장군은, 1957년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한 비영리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를 설립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한미동맹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장군의 이름을 딴 밴플리트상이 수여되고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6·25전쟁영웅들의 숭고한 희생과 공헌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출처] 2026년 6월의 6·25전쟁영웅 <김광수 육군 대위, 밴 플리트 부자(父子)>|작성자 전북서부보훈지청 |
인천상륙작전을 도운 팔미도 등대
[출처] 춘천부터 낙동강까지, 6·25전쟁 초기 전투 이야기|작성자 전북서부보훈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