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미 8군사령관 워커(왼쪽) 장군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전선을 시찰 중이다. |
 |
|
킨 특수임무부대의 작전 상황도. 지도 윗부분의 미 35연대는 진주 고개까지 진출하고,
아랫부분의 미 해병5연대도 사천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지도 중앙의 봉암리 일대에서
미 육군5연대 전투단은 포위 공격을 당해 치명적 피해를 입었다. (그림 군사편찬연구소 작성) |
1950년 8월 한 달 동안 북한군이 가장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공세를 가한 곳은 바로 대구였다.
당시 대구 북쪽에서 공격해온 북한 사단은 1ㆍ13ㆍ15사단 등 3개 사단이었고, 대구 서쪽에도 북한군 3사단과 10사단 일부가
공격을 해 왔다. 후방의 김천 일대에는 북한군 2사단까지 포진하고 있어 이 지역에 배치된 북한군 사단은 총 6개에 달했다.
이 많은 적을 상대하는 아군은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등 2개 사단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병력을 집중한 곳은 대구가 아니라 마산이었다. 미 25사단을 주축으로 한 미군 병력과 북한 6사단을 주축으로 한
북한군 병력 비율은 3대1로 미군이 절대적 우위를 자랑했다. 미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만4000여 명에 달하는 데 비해
북한군 6사단의 전력은 7500명 내외였다. 여기에 제공권과 제해권까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역습 결정
일반인의 상식에서 본다면 이런 상황이라면 8월 초 마산에 급하게 투입된 미군 전력 일부를 다시 빼서 대구에 투입하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8월 6일 병력 배치를 그대로 두고, 마산에서 진주 방향으로 역습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당연히 미군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방어하기 급급한 마당에 역습은 시기상조라는 반대 의견도 나왔다.
일부 참모들은 장비가 부실한 한국군 쪽을 증원하지 않고 마산에 미군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이미 위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대구에 병력을 더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온갖 반대 주장에도 불구하고 워커 장군과 미 8군 작전참모 대브니 대령은 진주와 사천 방향으로 역습을 감행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워커 장군은 “방어밀도가 약한 곳에다 증강하고 싶은 생각은 태산 같지만, 그것은 결국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과 같다”며 “최후에 공세로 이전할 때를 대비해 사전에 공격 경험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 같은 워커 장군의 결심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미8군은 두 개의 작전계획을 검토했다. 1안은 8월 초순에 미25사단을 투입,
진주를 향해 공격하는 방안이었다. 2안은 미 본토에서 전개되는 미 2사단이 도착하는 8월 중순에 진주를 공격한 후,
전남 순천을 거쳐 전북 전주, 충남 논산으로 계속 공격하는 야심만만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8월 중순까지 기다리기에는
무언가 당장 전쟁 흐름에 변화가 필요했다. 또한 과연 미군 2개 사단만으로 이 정도의 대규모 공세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1안이었다.
▶공격 vs 공격
워커 장군은 8월 6일,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25사단에 미 해병1여단과 전차대대를 배속시켜 킨 특수임무부대(TF)를
편성했다. 미 육군 25사단을 토대로 전력을 강화시켜 병력만 2만4000여 명에 달했던 킨 특수임무부대의 주임무는
진주와 사천을 향해 공격해 진주 입구의 진주고개~사천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부산 교두보를 보다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또 북한군 6사단이 수세에 몰리면 대구 주변의 북한군이 마산 방면으로 이동해, 대구 방면 북한군 압력이
약해질 가능성도 작전의 기대 효과 중 하나였다.
8월 7일 아침 6시 30분 킨 특수임무부대는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킨 특수임무부대 예하 5연대전투단 2대대는
공격하자마자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미군이 역습하는 상황에서 북한군도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으로 나온 것이다.
그때부터 마산과 진주 사이에서는 어느 한쪽이 공격을 하고, 한쪽이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모두 공격에 나서
정면 충돌했다.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가(Who attacks Whom)’라는 의문이 나올 만한 기묘한 상황이었다.
전투 초반 미 육군 5연대전투단이 잠시 고전을 했지만, 상황은 그럭저럭 아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8월 11일 무렵 전반적인 전투 상황이 호전되는 기미가 뚜렷해졌다. 고성을 거쳐 사천을 향해 공격하고 있던 미 5해병연대는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부터 공중지원을 받아 8월 11일 고성 서쪽 7㎞ 지점까지 진출했다. 미 육군 35연대도 이날 진주의 문턱인
진주고개에까지 진출, 진주 점령을 코앞에 둔 상황처럼 보였다.
▶포병의 무덤
그러나 마산과 진주 사이의 봉암리에 위치하고 있던 미 육군 5연대전투단의 상황이 문제였다. 8월 11일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포진한 북한군은 미군을 점점 옥죄어 왔다. 5연대전투단은 킨 소장에게 주변에 북한군 대부대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킨 소장은 미군이 주요 교통로를 장악한 상황에서 주변에 북한군 대부대가 있다는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 저녁 무렵 킨 소장은 5연대전투단 주력 부대에 봉암리 계곡 일대의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지시했다. 연대장은 사단장의
지시대로 이행할 경우 포위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단과 통신이 잘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단장이 전체 작전 상황을 고려해 지시한 것으로 생각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8월 12일 한밤중 북한군의 총성이 봉암리 일대 계곡에 몰아쳤다. 완전히 포위됐음을 깨달은 미 5연대전투단은
새벽 4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 육군 5연대본부, 90포병대대, 159포병대대, 555포병대대와 근무ㆍ의무중대 등
근접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포병부대들이 적의 포위망을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연대본부 병력들은 간신히
고개를 넘었으나 포병부대가 출발하자 3개 방향에서 북한군 6사단 예하부대가 집중 공격을 가해 왔다.
결과는 참혹했다. 미 555포병대대는 사상자 180명과 105㎜ 곡사포 8문, 미 90포병대대는
사상자 190명, 155㎜ 곡사포 6문을 잃었다.
미군들은 미 포병 3개 대대가 큰 피해를 입은 봉암리 계곡을 ‘포병의 무덤’ ‘피의 협곡’이라 부를 정도였다.
마침 포항 방면에서 격전이 벌어져 예비대가 필요했고, 공격도 순조롭지 못하자 마침내 워커 장군은 킨 특수임무부대의
역습작전을 중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했던 미군의 최초 공세는 이처럼 작전 성공의 문턱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 성공인가, 실패인가
킨 특수임무부대가 전체 병력 규모와 장비에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봉암리 등지에서 북한군에 포위를 당했던 이유는
냉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미군의 전술적 실패는 산악지대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은 훗날 반격작전 시에도 도로 위주의 기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다 비슷한 방식으로 중공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킨 특수임무부대는 7일간에 걸친 공세작전으로 목표 중 하나인 진주고개를 탈환했으나,
작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정면의 북한군을 완전히 돌파하지 못했고, 방어선을 진주고개~사천선으로 추진시키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미 육군에서도 전통적으로 킨 특수임무부대의 작전은 실패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연구원 등 우리나라의 전사 전문가들은 킨 특수임무부대의 작전을
단순히 실패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마산 방면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시켜 마산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장병들에게는 공격전투의 경험을 쌓게 해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전술적인 수준에서는 실패한 작전이지만 작전적 수준에서는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