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자고새면/ 임화

작성자은하수|작성시간15.03.07|조회수324 목록 댓글 0

 

 

자고새면/ 임화

 


자고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주검에서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진 장미넝쿨 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지를 사랑하기엔

더구나 마음이 애띠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 임화 전집(풀빛,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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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코 있다’란 부제가 붙은 이 시에는 임화가 처한 개인의 비극적 상황을 짐작케 하면서 동시에 그의 굴곡진 삶을 예고하고 있다. 시에 나타난 비극적 세계관 속에는 식민지와 이데올로기라는 역사적 외피뿐 아니라 개인사적으로 어머니의 이른 죽음, 이혼, 딸과의 이별 그리고 카프 해체 등 삶의 버거운 역정이 촘촘히 박혀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그는 1920년대 중반 이래 일관되게 신봉하고 추구해 온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찬란한 무지개였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20'에서 '임화'를 '아직껏 한국문학사에는 버려둔 무덤이 있다‘ ’그 무덤 벙어리 풀려 열리는 날‘ ’임화는 오리라 아름다운 얼굴 다시 오리라‘고 그를 추모했다. 임화는 사회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카프(KAPF)의 서기장을 지낸 시인이자 평론가이고 영화배우였다. 지금 시대의 심미안으로 보아도 한눈에 ‘모던 보이’였음을 알 수 있다. 몇몇 영화의 주연을 맡기도 해 '조선의 발렌티노'라 불리던 그는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으나 1953년 '미제의 고정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함으로써 불운한 생을 마감한다.

 

 평론가 김윤식은 이상의 모더니즘과 임화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복형제'라 하였다. 이러한 이념 이데올로기는 일본제국으로 통하는 '현해탄'의 출구에서부터 잉태되어, 이상은 박제가 되고 임화는 번데기가 되어 질곡의 시대가 낳은 조선 문단의 두 사생아들이 불나비로 죽었다고 그들을 규정했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사상적이든 문학적이든 그 모두가 현해탄 때문이라며 김윤식은 이를 '현해탄 콤플렉스'라 이름 붙였다. 어쨌든 그의 삶은 불우했지만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대의 문제적 인물로서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는 게 고달프고 개 같을 때 한번 쯤 세상이 확 뒤집히는 꿈을 꾸게 된다. 몹쓸 생각으로 차라리 난리가 나면 좋겠다는 불온한 희망을 품는 사람도 보았다. 그와는 다른 동기지만 ‘자고새면 이변을 꿈꾸고’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그날 가운데’에서는 ‘찾아지지 아니할 때’ ‘그만 인젠 살려고’ 그러든지, 참혹한 현장의 네거리로 나가 서있을 수밖에 없다. 끊이지 않는 세상의 부조리와 위선, 혐오스러운 사건들, 인간에 대한 환멸 앞에서 새로운 질서를 위한 변혁만이 구원이란 생각. 무사히 살고 싶지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기댈 때도 있는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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