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기적, 그리고 서툰 외할머니의 첫인사
새벽빛도 차지 않은 네 시 서른일곱 분, 조용한 머리맡에서 휴대폰이 나직하게 울렸다. 이불 속에서 눈을 비비며 확인한 화면에는 딸아이가 보낸 베이비북 앱의 링크가 걸려 있었다. 세상에 나온 지 겨우 사흘째 되는 날. 그 보드랍고 여린 핏덩이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를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밤을 지새웠을 초보 엄마의 극성이 눈에 선했다.
요즘 세상은 참 무섭도록 좋아져서, 딸애가 최신식이라며 사준 AI 탑재 휴대폰 덕에 거리며 시간 같은 건 아무런 방해물도 되지 않았다. 딸아이가 올린 사진들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며 조잘조잘 댓글을 달 수 있는 세상이라니.
나는 다봉이의 서른여덟 장 사진마다 내 마음을 스친 뭉클한 감정들을 디카시처럼 말풍선으로 달아놓았다. 날이 밝자마자 딸아이에게서 연거푸 연락이 왔다. 내가 쓴 글들을 지우기가 너무 아까우니, 설명글 칸은 나중에 책으로 만들 때를 위해 비워두고 전부 '댓글'로 옮겨 적어달라는 주문이었다.
> "근데 내가 댓글을 마음대로 달아도 괜찮은 거니?"
> "응응, 당연하지! 설명은 나중에 책자 만들 때 안 예쁠까 봐 최소한으로만 쓰는 거야. 댓글은 엄마 마음대로 해."
> "그래, 그럼 내가 고쳐놓으마."
>
수술 후 아직 몸조리도 끝나지 않았을 텐데, 하루 단 10분의 면회 시간에 찍어온 동영상과 사진을 들여다보며 추억을 박제하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 "엄마가 그 여러 번 보았다는 영상, ㅋㅋ 나랑 세욱이도 백 번쯤은 본 것 같아."
>
딸아이는 내가 지우려 했던 글귀들이 못내 마음에 남았는지, 마음에 드는 몇 개를 다시 골라 내게 보내왔다. 그 문장들을 하나씩 댓글창으로 옮겨 심으며, 나는 다봉이의 우주에 내 흔적을 남겼다.
* **댓글 1:** 아빠의 넓고 넓은 품, 다연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아빠.
* **댓글 2:** 방긋 웃는 아기 천사, 다연이 모습에 참말로 반하였다네.
* **댓글 3:** 아가, 우리 곁으로 와줘서 고마워. 눈물이 날 정도로.
* **댓글 4:** 한시도 너에게 눈을 뗄 수가 없구나. 너무 경이롭고 사랑스러워.
* **댓글 5:** 태어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이 귀염뽀짝을 어찌할꼬.
"번지 잘못 찾은 설명글을 댓글로 다 옮겼다. 오늘 신작 다연이 동영상이랑 사진이 몹시 궁금하구나." 내 말에 딸아이는 "잘해떠영" 하며 애교를 부렸다.
"수많은 사진에 댓글을 달려면 엄마가 책을 더 많이 읽어야겠어. 순수한 감정과 유머를 겸비하려면 말이야."
"다연이가 참 좋아하겠다."
"엄마 댓글 중에 마음에 드는 게 또 있니?"
"다 마음에 들어. 그나저나 앱, 아빠도 가입 좀 시켜줘 봐."
## 친할아버지의 시심(詩心)과 외할아버지의 베짱이 타령
오후 무렵이 되니 다연이의 사진방이 한층 시끌벅적해졌다. 사돈댁 어른들이 입장하신 것이다. 시어머님은 쑥스러우신지 그저 귀여운 이모티콘만 연신 날리시는데, 시아버님의 글솜씨가 대단했다. 마치 청년 시절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신 듯, 사랑이 가득 묻어나는 축하 글을 남기셨는데 영락없이 나태주 시인의 서정적인 시 한 편을 보는 듯했다.
그에 반해 우리 집,신랑의 첫 댓글이라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나 다봉이 할아버지닷!"**
이게 전부였다. 사돈 할아버지는 5연 행간마다 찐한 사랑을 숨겨놓아 빛을 발하고 있건만, 이 양반은 베짱이처럼 떵떵거리기만 하니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났다
평소에 "다봉이만 태어나봐라, 내가 서열 1순위다"라며 본인만의 거대한 착각에 빠져 살던 사람이라, 나는 그모습이 우스워서 그 착각 속에 푹 빠져 살게 내버려 두었었다. 거실을 다닐 때마다 나는 사돈어른의 시에 밀린 남편을 놀려대며 서동요처럼 후렴구를 흥얼거렸다.
>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밀렸다! 우리 신랑 어쩌나
밀렸다.밀렸어!"
>
그러는 사이, 딸아이에게서 기분 좋은 속보가 날아왔다. 시댁에서 출산 지원금으로 무려 천만 원을 사위 편에 보내오셨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카톡방에 "히히 죠앙" 하며 방실방실 웃었다.
"그동안 출산 비용 마련하느라 애썼는데 다 조달되었네. 다들 사랑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가족들이구나." 내가 안도 섞인 글을 남기자 딸아이는 "다연이는 좋겠다" 하고 답했다.
"다연이 엄마는 더 좋지. 병원, 조리원, 산후도우미 비용까지 친가 외가에서 다 해결해 줬으니. 이제 다연이 통장 만들어서 차곡차곡 투자해 주거라."
## 이름 뒤에 숨은 뒷북, 그리고 명리학 박사님의 퇴장
훈훈하게 마무리되는가 싶던 카톡방에 남편이 갑자기 '뒷북'을 치기 시작했다. 사위까지 단체로 있는 4명의 단톡방에, 이미 다 지어놓은 다연이의 이름을 두고 사주가 어떻고 한자가 어떻고 하며 장문의 훈수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 "아직 호적에 올리지 말아라. 다연이가 태어난 사주가 엄청난 불(火)의 사주라서, 잘 풀리면 크게 될 운명이지만 보완해 줄 것이 필요하다. 보통 이럴 때는 한자 이름으로 기운을 눌러줘야 해."
>
정말 짜증이 밀려올 정도로 길게도 써 내려가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어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저격 글을 날렸다.
> "아니, 여보. 당신 딸내미 이름 지을 때는 사주 보고 명리학 공부해서 지었수? 내가 이름 한자 '다' 자 지어놓고 당신 보고 완성하라고 했더니, 김홍신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예쁘다고 '다혜'라고 대충 지어놓고선 왜 이제 와서 뒷북이오? 다연이는 우리 손주이기 전에 황씨 가문에서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맞이한 손주요. 시아버님도 이름은 아이들 부부에게 일임하셨고, 당신이 고집하던 '황유지'보다는 '황다연'이 백번 천번 나소. 사진 댓글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다 만들어진 이름에 왜 딴지를 걸고 그래요?"
>
그 와중에 눈치 없는 딸아이의 질문이 기름을 부었다.
"아빠, 그럼 내 이름도 사주 보고 지은 거야? 나 '수(水)' 기운이 몰빵된 사주인데, 이름에다 또 물 수(水) 자를 쓴 거야? 사주 안 보고 지었나 봄. ㅋㅋ"
대학 토론대회에서 입상까지 한 딸아이의 예리하고 논리적인 칼날을 이 늙은 영감이 어찌 당해낼 수 있으랴. 결국 남편은 꼬리를 내리고 한 발 물러섰다.
> "黃多嬿(황다연)으로 가자. 네가 잘 정한 것 같다. 클로드 AI도 인정하더구나."
>
민망해진 영감은 슬그머니 단톡방을 퇴장하더니, 내 눈치를 보며 가까운 저수지 둘레길이나 걸으러 가자고 청해왔다. "오늘 자기가 산책 코스 짜고 저녁 먹을 집도 골라줘. 난 그냥 당신 뒤만 따라갈게." 남편의 목소리에 멋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 백운호수의 소나기, 그리고 수리산 자락의 정갈한 만찬
오후 세 시의 볕은 마치 말레이시아의 한낮처럼 뜨겁고 따가웠다. 처음 찾아간 왕송저수지는 데크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걷기가 마땅치 않았다. 우리는 다음 후보지인 백운호수로 차를 돌렸는데, 도착하자마자 하늘 구멍이 뚫린 듯 10분 동안 소나기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차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비를 피했다.
"거봐, 우리나라가 땅덩어리가 좁다 해도 우리 동네 건건동은 비가 안 내렸잖아. 다행이지 뭐야. 집에 이불 빨래 널어놓은 게 적지 않은데 말이야. 왜 비가 온 줄 알아? 반월저수지 놔두고 간만에 딴 동네로 바람피우러 와서 하늘이 노하신 거야. 반월저수지만 한 곳이 없다니까."
천수탑을 모시는 민간신앙가처럼 능청을 떠는 내 말에 남편도 허허 웃었다. 비가 그친 후, 우리는 남편이 전날 수리산 도립공원 쪽을 지나며 "참 정원 주택들이 좋다"고 눈여겨보았던 속달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시골집 도마교리'라는 생선 모둠구이 맛집이 있었다.
수리산 정상이 눈앞에 시원하게 보이고 온 동네가 초록빛 산으로 둘러싸인 곳. 불어오는 바람과 공기마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영험한 동네였다. 1972년에 할머니가 처음 문을 열어 대를 이어오다가, 원래 있던 자리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는 바람에 잠시 휴점했다가 이곳 속달동에 다시 자리를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창업주 할머니의 예쁜 손녀딸이 맑은 미소로 손님들을 맞이하며 친절하게 서빙을 하고 있었다.
"간만에 정말 맛있게 잘 먹었네. 감자조림도, 김칫국도 아주 정갈해."
남편은 시장기가 반찬이었기도 하겠지만, 다연이 이름으로 훈수 두다 본전도 못 찾은 민망함과 산책 코스 선정의 실패를 이 따뜻한 식탁이 위로해 주었기에 그토록 편안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 어느 독일식 정원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노년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도로변을 따라 자박자박 걷는데, 어느 집 안주인이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나를 보고 안으로 들어와 구경하라고 손짓을 했다. EBS의 '아름다운 정원'에 선정되어 방송까지 탄 유명한 집이었다.
12년 전에 지었다는 독일식 풍의 집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주인장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소박한 소품 하나하나, 죽어 있는 공간이 없이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연스럽게 꾸며진 마당 한구석 풀코너에는 전지작업을 하려고 세워놓은 사다리 두 개와, 50년 전 친구가 선물해 주었다는 낡은 양은 세숫대야가 장독대 옆에 정겹게 엎어져 있었다. 고개를 드니 수리산 꼭대기 군사기지의 불빛이 아련하게 등대처럼 비쳤다.
> "좋은 집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삶의 무늬가 보인다더니, 손수 마당을 가꾸며 손주와 함께 늙어가는 삶이 참으로 아름답네요. 이 귀한 정원을 나누어주셔서 눈이 호강했습니다."
>
마음 깊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길,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남편과 함께 해질녘의 반월저수지를 걸으며 하루를 고요히 마무리했다. 새 생명의 경이로움과 늙어가는 이들의 평화로움이 교차하는, 참으로 꽉 찬 하루였다.
(2026.6 24
다연이 생후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