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소설가 박완서의 문체는 **일상의 아주 작고 세속적인 풍경 속에서 인간의 깊은 내면과 심리적 갈등을 포착해 내는 날카로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따뜻하고 유려한 입말(구어체)의 미학**에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쓰신 글 속에 담긴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은 은근한 자존심', '딸의 주머니를 걱정하는 애틋함', 그리고 '내리사랑의 대물림'이라는 주제를 박완서 소설가의 특유의 서사적 호흡과 세련된 문체로 보완·수정해 보았습니다.
### ## 박완서 문체로 재탄생한 <을지로의 하루>
만삭인 딸아이가 사위와 함께 찍었다며 보내온 네 컷짜리 만삭 기념사진은 묘한 물건이었다. 타임랩스인지 뭔지 하는 요령 피우지 않는 기술 덕에, 낱장의 사진들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처럼 왔다리갔다리 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참 영악하기도 하지. 굳이 비싼 전용 사진관을 찾지 않아도, 길거리 셀프 사진관에서 단돈 4만 원이면 저들만의 알뜰한 추억을 저토록 생생하게 박제해 둘 줄을 안다.
마침 며칠 전부터 눈여겨보았던 을지로 PJ호텔에서 월요일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 날이었다. 네이버라는 신통방통한 요술 주머니에 사전등록을 하고, 인현동 푸르지오 주민이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서울 한복판에서 대형 뷔페를 1인당 2만 원 안팎으로 즐길 수 있다니, 대처(大處)치고는 제법 수지맞는 장사 같았다. 평소 같으면 ‘호텔 뷔페’라는 이름의 허세가 가당치 않아 짐짓 외면하며 지나쳤을 길이었지만, 만삭인 딸아이의 영양 섭취를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명분이 서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침 그곳은 결혼식이 열리는 뷔페라 음식의 가짓수가 풍성했다. 외국의 뜨내기 투숙객들로 특수를 누리는 호텔답게 음식 맛은 딱 중간 지점에 걸쳐 있었으나, 메뉴의 분포도가 좋아 우리 모녀는 나름대로 알찬 포식을 즐겼다. 먹고 나면 늘 ‘차라리 제대로 된 단일 메뉴 하나를 먹을 걸 그랬나’ 하는 해묵은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지만, 오늘은 이 많은 가짓수의 음식으로 딸아이의 태중에 영양을 가득 채웠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만족감이 밀려왔다.
“엄마, 배도 부른데 조금 걸을까? 내 폰 수리 맡긴 게 있어서 찾으러 가야 해.”
딸아이가 제 배를 쓰다듬으며 슬쩍 운을 뗐다. 멀쩡히 제 손에 들린 전화를 두고 무슨 수리를 또 한다는 건지 속으로 뜨아했지만, 다봉이를 품은 산모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빌딩 숲의 대기업 직원들이 썰물처럼 쏟아져 나온 서울 한복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길가에 늘어선 옹색한 쪽카페들마다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쳐났다.
을지로4가에서 을지로입구까지. 날이 적당히 풀렸다고는 하나 만삭의 산모에게는 여간 유별난 거리가 아니었다. 내가 참다못해 “야 , 택시나 타고 가자”며 사정을 하였건만, 딸아이는 초행길인 듯 짐짓 딴청을 피우며 을지로입구 하나은행 건물 2층에 있는 삼성전자 서비스센터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넓적한 대기실 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비스 수리뿐만 아니라 시퍼런 신형 휴대폰들을 늘어놓고 파는 전시장도 겸한 곳이었다. 그런데 수리 접수처로 갈 줄 알았던 딸아이가 뜬금없이 매장 직원에게 다가가더니 뭔가를 건네받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녀석은 이미 인터넷으로 내 새 휴대폰을 주문해 두고, 오늘 나를 이곳으로 유인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안겨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야! 돈 없다고 매번 엄살을 부리면서 나한테 무슨 이런 거금을 쓰고 그래!”
놀라움보다 미안함이 앞서 나도 모르게 왈칵 퉁명스러운 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러자 딸아이는 지지 않고 제 엄마를 향해 눈을 흘겼다.
“엄마 폰이 그게 뭐야. 별푼이나 한다고 시댁에서는 두 분이 세트로 최신폰을 척척 바꾸는데, 우리 집은 맨날 아빠만 새 거 쓰고 엄마는 내가 챙기지 않으면 도통 바꿀 생각을 안 하잖아. 속 터져서 내가 새벽에 그냥 질러버렸어.”
“고맙기는 하다만, 내 폰도 아직 멀쩡하고 난 딱히 기계 쓸 일도 없다.”
“갑자기 폰이 덜컥 고장 나서 그 안에 있는 엄마 기록들, 정보들 다 날아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니까 줄 때 군소리 말고 받아.”
왈가왈부 이어지는 실랑이 속에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는 딸아이가 옷 한 벌 안 사고 대충 걸치고 다니면 내가 속이 상해 억지로 옷가게로 끌고 가 옷을 사 입히고, 내 분수에 넘치는 명품 가방도 턱턱 사 안겨주지 않았던가. 그 시절 나의 내리사랑이, 이제는 부모가 될 준비를 하는 딸아이의 손을 통해 고스란히 역전되어 내게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내 세속적인 현실로 돌아와 짐짓 꼿꼿한 자존심을 세웠다.
“엄마가 원룸 사업 정리하고 나선 예전처럼 꼬박꼬박 떨어지는 수입원이 없어서 그렇지, 나 나름대로 쓸 돈은 쥐고 있어. 그러니 너한테 이런 백만 원이 넘는 돈을 홀라당 받아먹으면 이 엄마 마음이 편하겠니? 네가 뼈 빠지게 번 귀한 돈인 걸 뻔히 아는데, 자식 돈을 막 쓰는 부모가 되고 싶진 않다.”
내 가당찮은 자존심을 딸아이는 말없이 새 휴대폰 속에 담아 주었다. 귀갓길은 지하철을 타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을지로4가로 이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만삭의 산모는 고단했는지 침대에 쓰러져 단잠에 빠졌고, 나는 나대로 딸아이의 살림 구석구석을 살피며 밀린 집안정리를 해 주었다. 내 새끼의 공간을 정돈하는 손길에는 피로 대신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잠에서 깬 딸아이의 부스스한 얼굴을 보며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다봉이가 배고파서 어지럽겠다. 저녁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니?”
우리가 향한 곳은 평소 내가 눈여겨보아 두었던 골목 안의 작은 식당, ‘우동키노야을지’였다. 바삭한 돈까스 한 접시에 뜨끈한 우동 두 그릇, 그리고 달콤 짭조름한 불고기 규동을 시켰다. 정갈하고 아늑한 식당 분위기가 맛을 돋우었는지, 낮에 느꼈던 그 아까운 돈 걱정은 간데없고 저녁 식사 비용만큼은 단 한 푼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늘 보니, 내가 매번 타던 지하철 4호선 대신 집 앞에서 좌석버스를 타니까 서초역까지 한 번에 가더라. 거기서 2호선으로 갈아타니 너희 집 을지로4가까지는 아주 금방이던걸?”
내 호들갑스러운 발견에 딸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강남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거리가 장난이 아닌데, 버스로 그렇게 오니까 훨씬 편했나 보네.”
식탁 위로 어제오늘 있었던 자잘한 이야기들이 반찬처럼 오갔다. 딸아이가 건넨 최신형 휴대폰으로 시험 삼아 찍어본 사진은 그야말로 국보급 화질이었다. 작년 12월, 쓰던 폰이 말썽을 부려 딸아이가 쓰다 준 낡은 중고 폰으로 겨우 연명하다가 아예 폐기 처분할 지경에 이르렀던 내 사정을, 녀석은 줄곧 마음에 걸려 하며 큰맘을 먹었던 게 분명했다.
다시 내가 사는 안산 건건동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두 시간이 족히 걸리는 먼 길이었지만, 산모인 딸자식을 위해 어미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오는 길이라 그런지 이상하게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의 자가운전이나 지루한 전철 대신 좌석버스를 타고 서울의 밤 풍경을 바라보는 이동길은 내게 전혀 색다른 해방감을 선사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2호선 지하철의 한산한 좌석에 몸을 싣고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우리 딸이 어미에게 과분한 선물을 주었네. 나중에 너희 식구들 엄마 집에 내려오면, 내 이 고마움을 두 배, 세 배로 갚으마. 2호선 널널해서 편하게 앉아서 간다.]
이내 휴대전화가 징 소리를 내며 딸아이의 답장을 토해냈다.
[히히, 엄마. 예전부터 꼭 좋은 폰으로 바꿔주고 싶었어. 엄마는 맨날 자신을 위해서 돈을 잘 못 쓰니까, 앞으론 내가 채워줄게. 그걸로 우리 다봉이 사진이랑 영상 많이 찍어줘!]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래도 너무 무리했어. 하지만 네가 나에게 참 좋은 딸이었듯이, 곧 태어날 다봉이는 너에게 세상을 살아갈 가장 큰 힘이자 복이 될 거다.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건, 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될 게야. 친구들한테 청탁 삼아 자랑 쬐금만 하고, 저번에 네가 용돈 준 거 남은 걸로 친구들 커피나 한 잔 사야겠다.]
[응응 ㅋㅋ 친구들한테 자랑하면 커피 쏴야 하니까 적당히 해! ㅋㅋ]
나는 답장 대신, 군복을 꼿꼿하게 차려입은 어린 소녀가 ‘옛썰!’ 하고 우렁차게 경례를 붙이는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왕년의 내 젊은 날을 기억하는 딸아이에게 보내는, 나만의 유쾌한 투항이자 고마움의 표시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꼬박 12시간 동안 딸아이와 동행한 그 하루는, 그 어떤 화려한 이국땅의 해외여행보다도 내 삶의 가장 밀도 높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자식의 사랑을 확인하는 일만큼 노년의 삶을 황홀하게 보듬어주는 묘약이 또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