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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2026.2.10

작성자풀빛향기|작성시간26.06.09|조회수52 목록 댓글 0

( 낯선 곳에서의 작별,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집으로의 길)

새벽 공기를 가르는 새소리에 눈이 떠졌다.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마지막 산책길. 늘 걷던 길이지만 오늘은 일부러 발걸음을 거꾸로 돌려보았다. 익숙한 풍경도 역방향으로 마주하니 낯설고도 새롭다. 하늘에는 보름을 갓 지난 달이 눈썹처럼 야위어 가고 있었고, 내가 걸음을 멈추고 그 빛을 올려다볼 때면 딸아이처럼 곁에서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발치에는 밀림처럼 울창한 숲이 어둠을 머금고 있는데, 고개를 들면 곧게 뻗은 아파트 창마다 오렌지빛 불빛들이 하나둘 깨어난다. 자연과 문명이 교차하는 그 묘한 경계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지난 10월, 꼬박 이십여 일 동안 마음을 두었던 자리에 서서 마지막 독사진 한 장을 남기고 싶었다. 마침 공원을 관리하는 이가 밤새 켜두었던 가로등을 끄려 하기에, 염치 불고하고 우리 부부의 사진 한 장을 청했다. 그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꺼진 불을 다시 올리더니, 마치 도심의 세련된 사진관 주인인 양 구도와 위치를 세심하게 잡아주었다. 찍어 놓은 사진을 보니 내 키는 유난히 작게 나왔고 인물의 구도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으나, 그 낯선 이의 다정한 점등(點燈)이 고마워 우리 부부의 얼굴에는 원주민 같은 해맑은 웃음이 번졌다.

집으로 돌아와 분주하게 짐을 꾸렸다. 신랑은 아들 회사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며 서둘러 출근했고, 나는 혼자 남아 한국행 채비를 마쳤다. 아들의 귀한 시간을 뺏기 싫어 그랩(Grab)을 불러 가자고 고집을 피웠더니, 신랑은  아들의 성의를 무시한다며 기어코 서운한 기색을 내비친다.

"신랑이 이제 한국 갈 때가 되어 내 말을 안 듣는구나."

짐짓 농을 던졌더니, 곁에 있던 신랑이 분위기를 바꾼답시고 한마디 거든다.

"누가 염색을 이렇게 잘 해줬어? 이명희라는 여자가 정신이 좀 나갔나 봐."

 아들의 차 앞자리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올라탔다. 조수석 의자를 뒤로 길게 젖혀 누우라는 아들의 배려 덕에 뒤에 앉은 신랑은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은 자리에 끼어 앉게 되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우면서도 짠하던지. 마침 오후 1시 30분, 비자가 최종 승인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들이 부모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 같았다.

"아들 덕분에 엄마 기분이 참 좋다. 재윤이에게 축하금이라도 주어야 하는데, 남은 링깃이 없네."

"직원들 밥 사 먹으라고 제가 더 챙겨줬어요."

덤덤하게 대답하는 아들이 대견했다. 수십 년을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은퇴한 아버지가,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대리 사장 노릇을 하고 직원들과 눈빛을 나누며 출근하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보람찼는지 모른다. 이곳이 말레이시아인지 한국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몰입했던 날들, 25년 전 배운 수영을 매일같이 즐길 수 있었던 호사까지. 이 모든 것이 아들이 일궈낸 단단한 삶의 터전 덕분임을 알기에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고비도 많았을 텐데 잘 견뎌내고 다시 회사를 일으킨 아들이 장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와의 관계도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이겨내는 모습에서, 나는 내 아들이 한 단계 더 높은 어른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직감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아들은 타치앤고(Touch 'n Go) 카드가 없어 쩔쩔매는 앞차를 보며 웃더니 정작 본인 차례가 되자 카드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나를 앞자리에 태우느라 가방을 트렁크에 넣어둔 것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빈틈 많은 내 자식 같아 안도의 숨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바틱에어 발권을 마치고, 아들은 공항에서 가장 아늑한 자리에 우리를 앉혀두고는 뜨거운 포옹과 함께 돌아섰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신랑을 건너다보며 나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주지시켰다.

"어쩜 이렇게 모든 일이 착착 들어맞을까. 이게 다 당신이 내 말을 잘 들어서 일어난 일인 줄 아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다. 이 모든 평온함은 타지에서 꿋꿋하게 뿌리 내린 아들의 땀방울과, 그 곁을 묵묵히 지켜준 우리 부부의 시간이 맞물려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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