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에는 고려산, 혈구산, 진강산, 마니산 등 400m 이상의 4개산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솟아 있는데 그 중 제일 높은 산이 강화군 화도읍에 위치한 마니산(摩尼山,469m)이다.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태종실록> 등 조선 초기에 발간된 문헌에는 머리산, 우두머리산이란 뜻의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頭嶽)으로 쓰여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산이라는 이름을 혼용하고 있는데 오랫 동안 마니산이라 불러왔으니 새삼 마리산이라고 하여 혼동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니산은 해발이 낮더라도 주능선이 암릉으로 되어 있어 등산의 묘미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동남으로 가느다랗게 뻗은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망망한 서해를 조망할 수 있다. 외침을 자주 받았던 고려가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 보려고 강화도에서 크게 불사를 펼쳤던 까닭인지 강화도에는 내력 있는 절이 많다.
전등사,정수사외에 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등이 있으며, 어부가 건져 올렸다는 나한천진석상을 모신 석모도의 보문사와 목은 이색 화개사, 선원사도 그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중 전등사 대웅전을 눈여겨 볼만 하다. 대웅전 처마를 받들고 있는 네귀퉁이에 여인의 나체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억울한 목수와 관련한 전설이 담겨 있다.
조각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자면 고구려 소수림왕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마니산에는 전등사 건립 공사가 한창이었다. 십여명의 전문공들이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정성껏 사찰을 짓고 있었다. 공사를 시작하는 아침에는 양 손을 정화수에 깨끗이 씻고, 승려들과 함께 간단한 예불을 드렸다. 그리고 공양을 들때도 승려와 마찬가지로 육류와 술 등을 일체 금하였다.
이렇게 까다로운 지침에도 불구하고 사찰 공사에 참여한 목수들은 규범에 순응하며 심혈을 기울여 공사에 임했다. 그러나 힘이 생명인 목수들에게 제한 금식이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이 공사의 책임을 맡은 도편수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도편수는 눈에 띄게 손놀림이 노련한 재주꾼으로 손재주 못지 않게 주색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런 술꾼에게 사찰의 규율 따위는 대수가 아니었다. 공사에 착수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도편수는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동료들 몰래 산 아래에 있는 주막으로 내려갔다. “주모, 여기 술 한잔 주게.” 술을 주문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요염한 여인이 술병을 들고 나타났다. 그동안 술에 굶주려 있던 터라 목수는 단숨에 술병을 비웠다.
그리고 살갑게 달라붙는 여인을 꼬옥 끌어 안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목수는 공사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현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어젯밤에 처사를 눈치챈 이가 없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 후 목사는 틈 날때마다 주막을 찾았다. 그리고 첫날 술 시중을 든 여인과 술 마시기를 즐겼다. 시중을 드는 요부 역시 까슬까슬한 목수의 구레나룻 감촉과 걸걸한 목소리에 매력을 느껴 둘은 거리낌없이 친해 졌다. 서로간의 애정을 확인하자 자연스럽게 만나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러나 만남이 길어질수록 목수의 모습은 초췌해져 갔다. 밤잠을 설치며 주막을 드나드는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등을 치며 한마디씩 건네 주었다.
“이 양반, 절을 혼자 짓나? 너무 무리하지 말게.”
“고만고만, 쉬었다 하게나.”
작업시간만큼은 일에 열중했던 성실한 목수였으니, 그러한 격려를 받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의 신망과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도편수였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술집 요부와 내통하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비가 와서 하루 종일 야외공사를 못하게 된 그날도 목수는 주막을 찾아갔다.
“날씨도 축축한데 막걸리 한잔 주게“
여느때처럼 술을 주문하자, 또발이 머리를 한 아낙이 술을 내왔다.
“아이구, 나으리가 이뻐하던 계집이 아니어서 어쩌나. 어제까지 멀쩡하던 기집이 글쎄, 웬 사내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 했지 뭡니까.”
주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목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난 수개월동안 쌓아온 정과 쏟아온 정성이 분노로 치밀어 올랐다.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목수는 그길로 곧장 공사장으로 가서 그녀와 흡사한 모습의 나체 여인을 깍아 추녀 밑에 달았다. 그녀를 향한 부끄러운 형벌의 징표였다. 그 조각은 예술로 승화되어 전등사 대웅전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