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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야기

안동

작성자그림9|작성시간08.02.21|조회수8 목록 댓글 0

안동의 역사와 문화

경북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안동은 동쪽의 태백산맥, 북서쪽의 노령산맥이 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저산성 구릉지로 중앙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안동은 조선 중기 이래로 내내 유학의 중심 고장으로 자리잡았다. 퇴계학파의 중심이었고 남인 학맥의 가운데에 서 있었다. 우리 역사 속에서 한 지역이 수백년 동안 학문의 중심성을 꾸준히 유지하였던 경우는 안동을 제외하곤 찾아볼 수 없다.


삼한시대에 진한에 속해 있던 안동시는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군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757) 고창군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건국 때 삼태사가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930년 안동부로 승격되면서 이때 처음 안동으로 불리워 졌다. 이후 영가, 길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명종 27년 안동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362년 공민왕이 홍건족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몽진하였을 때 부민이 정성을 다한 공로로 또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안동대도호부가 경상도 북부지역을 관할하며 병마절도부사를 두었다.

 

선비와 양반의 고장
또한 선비?양반문화로 지칭되는 독특한 안동문화를 창조해 냈다. '朝鮮人才 半多嶺南, 嶺南人才 半多安東' 이라는 말과 같이 조선시대 안동이 819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해 팔도에서 첫째를 차지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건립되어 뿌리깊은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정신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고장이다.
안동에는 의(義)와 예(禮)를 중시하며 대쪽같이 꼿꼿한 절개로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옛 선비들의 생활과 정신이 그대로 배어 있다. 동방의 주자라 불리울 정도의 대학자 였던 퇴계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서애 유성룡(柳成龍) 등 명현 거유가 배출되어 영남학맥의 연원지가 되었다.

 

민속의 고장
민속문화의 보고로 불리는 하회(河回)마을은 한국 전통의 멋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다.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이 마을은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형으로 굽어 흐르며 이 마을을 감싸 돈다고 하여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리운다. 하회마을은 대대로 풍산유씨(豊山柳氏) 가문이 살아온 동성마을로 조선시대 대학자인 서애 유성룡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 양반문화를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 마을은 조선 전기 이래의 건축물과 하회 별신굿탈놀이, 선유줄불놀이 등의 민속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불교문화의 중심지
안동이 꼭 유교문화의 본 고장만은 아니다. 안동은 한국정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불교문화의 중심지이다. 안동지역 불교의 특성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불교의 이상사회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한데 있다.
안동시 태후면에 있는 봉정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국보 제16호인 신세동 7층 석탑도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벽돌탑)으로 유명하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산 가진 곳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통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마치 고건축물의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지정문화재 245점, 비지정 문화재급 250여점이 이 지역에 산재하고 있다. 발 닿는 곳마다 문화유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안동 하회마을

하회의 풍수-물이 돌아나간 물동이동 하회(河回)마을
안동시 풍천면 낙동강변에 자리한 하회마을은 현재 풍산 류씨들이 모여 살고있는 전통 마을이다.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이곳에 이르러 여러 번 크게 휘돌아가는데, 하회(河回)는?물이 빙 돌아나간다?는 뜻으로?물도리동?이라고도 한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이며, 이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과 산줄기가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화산이, 서남북쪽으로는 낙동강이 굽이돌아 마을을 감싸고 있어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여러 차례의 외침으로부터 온전히 보호되어 전통문화와 주위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명당으로 보는 관점에서 하회마을은 물이 삼면으로 흐르고, 물로 뒤가 닫힌 막다른 골목 같아서 마을터로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다. 그러나 하회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마치 연꽃이 물 위에 뜬 형상 같다)으로 인해 특별한 길지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마을 중심부에 류씨들의 집인 큰 기와집이 자리잡고, 그 주위를 원형이 잘 보존된 초가집들이 둘러싸고 있다. 물줄기 형세에 따라 둥글게 자리 잡은 가옥의 앉음새는 전통적인 배산임수와 남향을 고집하지 않고 대체적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188가구 중 양진당과 충효당이 보물로, 북촌댁과 원지정사 등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하회마을의 역사 -풍산 류씨(豊山 柳氏)들의 동족마을
하회마을의 역사를 이르는 단적인 말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반(배반이란 알의 노른자 위에 희게 보이는 원형질로서 조류나 파충류의 몸체를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김해 허씨(金海 許氏)가 마을을 처음 개척하고, 광주 안씨가 뒤이어 일가를 이루었으며, 풍산 류씨는 그 앞에서 잔치판을 벌일 정도로 가문이 흥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 성씨가 잡았던 터는 하회 안에서도 서로 좀 다르다. 고려말 하회탈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허씨들은 꽃뫼 남쪽 기슭의 거묵실골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뒤이어 들어온 안씨는 꽃뫼 북쪽 기슭인 행개골에 삶터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의 지방관리인 풍산 류씨는 풍산 상리에 대대로 살고 있었는데, 류운룡과 류성룡의 6대조인 류종혜 대에 길지를 찾아 지금의 하회로 이주하였다. 이미 허씨와 안씨가 전통적으로 마을 입지로서 적당한 꽃뫼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피해 낮은 지역인 지금의 하회에 터를 닦게 되었다.


풍산 류씨는 조선 중기 이후로 인물이 여럿 나서 마을의 중심이 류씨 쪽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허씨와 안씨는 점차 세력이 약해져서 마을을 떠나게 되어 18세기 이후에는 오로지 류씨 동족마을로 남게 되었다. 곧 안씨와 허씨들이 마을의 기초공사를 했다면 그곳에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씨족은 류씨라는 말이다.

 

하회별신굿과 하회마을의 전통성
하회마을이 지닌 수려한 자연환경은 이 마을사람들에게 풍부한 감성을 지니게 하여 화회별신굿 탈놀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별신굿을 비롯해 조선시대의 가옥구조와 제례 등의 전통문화 또한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회마을이 이렇게 오랜시간 동안 그 전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지형적 특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즉 마을 전체가 흐르는 강물에 휩싸여 하회에서 외부로 통하는 길은 뱃길을 제외하면 육로로는 안동 풍산이나 예천 호명의 큰 고개를 거치는 길밖에는 없다. 하회를 거쳐 다른 마을로 가는 길은 없으며 굳이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한다. 이처럼 강에 의해 마을이 고립돼 있어 가옥의 배치구조와 각종 전통문화가 외부와 섞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번도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회별신굿 탈놀이
그리고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서낭제 탈놀이에 속하는 것으로 별신굿은 마을에 우환이 있거나 돌림병이 발생할 경우 당제와 함께 행해지던 것이다. 하회별신굿놀이는 하회마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 69호로 춤사위나 의상이 과시적이지 않으면서 풍자와 사실묘사가 매우 독특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회별신굿놀이에 쓰는 하회탈은 국보 121호로 원래 12개였으나 현재는 9개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조형성을 지니고 있는데 탈 속에서 양반을 향해 내뱉는 해학적인 욕설과 풍자. 양반에 대한 억눌린 마음들을 놀이굿으로 승화시켜 허허로이 웃어넘긴 선인들의 지혜와 너그러움을 느낄 수 있다. 매주 토.일요일 오후 3시에는 탈놀이전시관 상설무대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열리고 있다.
 
 
탈놀이는 총 10개 마당으로 구성돼 있는데 별신굿은 1928년 마지막으로 열렸으며 1970년대 하회가면극연구회에 의해 재현돼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별신굿놀이는 대강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허씨 집안의 도령이 마을의 액운을 막기위해 아무도 모르게 움막에서 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를 사모하는 마을의 처녀가 탈막을 엿보는 바람에 허도령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처녀도 자결을 했고 마을사람들은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화산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 (冬祭) 를 지냈다. 이때 허도령이 만든 탈은 14개로 3개가 분실돼 현재 10종 11개가 국보 제121호로 지정돼 있다. 하회마을에서 다시 풍산쪽으로 되돌아나가는 길목에는 하회별신굿놀이에 쓰이는 각종 탈들을 전시하고 있는 탈박물관이 있어 한 번쯤 들러 볼만 하다. 하회마을 뒷 켠 쯤에 있는 병산서원은 하회마을 입구에서 풍산으로 나가는 길로 되돌아 나가다가 하회탈박물관을 지난 후 왼편 비포장도로를 따라 약 5㎞정도 들어가야 한다.

 

하회마을의 중요문화유산
우선 전체가 중요민속자료(제 122호)로 지정된 마을 안엔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 임진왜란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쌍벽을 이루는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국보 제132호) 같은 국보가 있고, 보물만 해도 류성룡종손가문적(보물 제160호), 서애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보물 제460호), 풍산 류씨의 대종택으로 현재 54칸이 남아 6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양진당(입암고택?보물 제306호), 서애가 세상을 떠난 후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하며 청백하게 지내던 그의 덕을 추모하여 문하생과 유림에서 건립한 충효당(보물 제414호) 이렇게 네 점이나 된다. 또한 북촌댁, 남촌댁, 작천고택 등 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가옥들이 두 손으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즐비하다.


또 고샅길 한쪽엔 아름드리 노거수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같은 흥겨운 춤판에선 이 마을에 살던 이들의 낭만과 여유를 되짚어볼 수 있다. 이런 유?무형 유산과 물도리동이란 지형이 어우러져 이 나라 최고의 전통 마을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회마을의 주요 살림집
하회마을의 주요한 살림집들로는 대종택이자 류중영과 류운룡을 *불천위로 모시는 양진당이 있고, 류운룡의 동생인 류성룡의 종택으로 소종택인 충효당이 있으며, 그밖에 하동고택?북촌댁?남촌댁 등도 있다. 또한 기와집이 즐비한 가운데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는데 이는 종가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이나 소작인들이 살던 살림집이다.
<※불천위 : 보통 4대조까지만 제사를 모시지만 나라에 공을 쌓거나 가문을 크게 빛낸 이들의 경우 계속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나라에서 불천위를 정해주기도 하고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하기도 하였다. >

 

충효당
충효당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던 서애 유성룡의 고택. 충효당의 솟을대문을 넘어서면 헌칠한 기상의 사랑채가 손님을 맞는다. 재상까지 지낸 서애였지만 생전에는 20여리나 떨어진 풍산군 서미동의 한 초가 삼간에서 살다 청빈한 삶을 마쳤다. 이 사랑채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기려 유림의 제자들이 세웠다. 충효당내 영모각에 들어서면 서애 류성룡선생이 지은 징비록과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이 보관돼 있다 하회마을 중앙에 위치한 양진당은 서애의 형인 겸암 유운룡의 종택으로 풍산 유씨의 큰 종가. 겸암은 퇴계 문하의 초기 문인으로 원주목사를 지냈다.

 

남촌댁
남촌댁은 별당의 규모는 작으나 사랑채의 동편 후원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별도의 담장을 둘러서 외부와의 공간을 차단하고 있어 별당채로서는 이상적인 환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안채와 사랑채는 소실되고 사랑채 터 앞에 옛 정자 한 채만 복원되어 있다.

 

양진당
550여년 전에 지은 양진당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가운데 하나다. 일자행(一字行) 구조의 유시주씨(50) 가옥. 그 뒷집은 탤런트 유시원의 아버지 유선우씨 소유인 담연재. 충효각과 양진당, 담연재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찾은 집들이다. 양진당은 입암고택을 전수하여 서애의 형님인 겸암이 거처하던 종가 사랑채이고,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이 낙향하여 양진당의 앞쪽에 따로 지어 분가한 살림집이다. 현재의 모습은 서애공의 사후 흠모하던 문하생과 사림이 모금하여 지었고, 그 증손자가 다시 확장하여 지어진 것이다.


병산서원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서원의 기본 배치는 성균관 문묘나 고을의 향교들처럼 남북 일직선상에 외삼문,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을 놓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놓으며, 강당 뒤쪽에 전사청과 장판교를 두었다. 그리고 외곽에는 이 모두를 감싸는 낮은 돌담을 두르고, 사당공간에도 특별히 담을 둘러 출입을 엄히 통제하였다. 병산서원은 이 기본 배치를 충실히 살리면서 살짝 축을 비껴 사당을 두었는데, 전체적인 조화로움은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다른 군더더기가 없으니 엄격하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공간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병산서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면 마주하는 문이 복례문(復禮門)이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克己復禮'에서 따온 듯한데, 세속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삼문 안쪽은 물건을 둘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서쪽 칸의 가마는 향사 때 제수를 운반하는 의례용 가마이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감으로써 마음과 몸을 다시 한번 추스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이 집은 '입교',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그 이름에 걸맞는 강당으로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 마루는 원생들??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 서재도 각각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을 들였다. 이 건물들은 남향하지 않고 동향 또는 서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강당을 향하도록 한 것이니, 서원이 지녀야 할 엄격성을 고려한 배치이다.


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빠져나가면 정면에 길고 높은 계단이 마주한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祀)로 오르는 길이다. 사당은 문과 담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데, 단청이 칠해져 있는 문은 아무 장식이 없는 다른 건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삼문으로 된 신문(神門)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음력 4월과 10월의 첫째 정일(丁日)의 향사 때에만 열린다. 존덕사 동쪽에는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서쪽에는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전사청이나 장판각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촐한 집들이다.

 

만대루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晩對樓)는 두보의 시 한 귀절인 "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다. 만대루를 오르자면 통나무를 깎아 걸친 나무계단이 먼저 눈에 띈다. 신을 벗은 발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만대루에 오르면 머리 위로 휘어진 굵은 통나무 대들보가 물결치듯 걸쳐 있다. 역시 자연스러움을 최대한으로 살려 편안함을 주고 있다.
만대루에 앉아 바라보는 승경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까맣게 잊게 할 만큼 사람을 취하게 한다. 휘돌아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병산(甁山)은, 『영가지』의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가까이로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원의 바깥 앞쪽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복례문에 이어진 담장 구석에는 1칸짜리 뒷간이 있는데 서원 뒷간이어선지 깔끔하다. 서원 마당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특히 복례문에 들어서서 만대루로 오르는 계단 앞의 화단과 사당 계단 양옆, 장판각 주위에 많다. 장판각 앞쪽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을 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얘기에서부터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져오던 나무이니 서원과 잘 어울린다.

 

류성룡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涯),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이다. 경북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황해도관찰사 류중영(柳仲 )공의 둘째아둘로 태어났다. 조선시대의 문신?학자로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고루 거쳤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 권율 등의 장군을 추천하여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영의정에 올랐다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나기도 하였으나, 그 뒤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만들며, 성을 쌓는 등 국방을 철저히 하였다.


징비록
1592(선조 25)~98년까지 7년에 걸쳤던 임진왜란의 원인?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전란이 끝난 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울 때 저술한 것이다. 징비록은 총 16권 7책으로, 현재 4종이 전하는데 류성룡의 필사원본인 '초본징비록', 16권으로 된 '징비록', 2권으로 된 간본(刊本), 그리고 '필사본'이 있다. 이 책의 체재 내용을 보면, 권1~2는 제목이 없고, 권3~5는 근포 집, 권6~14는 진사록, 권15~16은 군문등록?난후잡록 등으로 되어 있다.

 

봉정사

안동시 서후면 태장동 천등산 품에 안긴 고찰. 봉정사는 672년(신라 문무왕12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義相大師)의 제자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창건한 사찰로 조계종 16교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봉정사에는 재미난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경북 영주 부석사에 있던 의상이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보내니, 이 종이봉황이 앉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의상이 기도를 드리려고 이 산에 오르자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청마(靑馬)가 길을 인도하여 이 자리에 다다르게 하였으니 산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곳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봉정사 대웅전
조선초기의 불전으로 보물 제 55호로 규모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건물로 팔작 지붕에 대표 양식이다. 전면(前面) 기둥 앞으로 툇마루를 깔았다. 본전(本殿)에 이와 같은 툇마루를 시설한 예로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단청은 조선 초기 기법과 색채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고색창연하다.
 

 봉정사 극락전-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집이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대장전(大藏殿)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1972년 해체?수리할 때 중앙칸 종도리(宗道里) 밑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68년에 옥개(屋蓋) 부분을 중수(重修)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그보다 100~150년 정도 앞섰으리라 짐작된다. 건물의 전면(前面)에만 다듬질된 석기단(石基壇)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여 주좌(柱座)만을 조각하였고, 초석 위에는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극락전 전면과 측면 중앙칸에 판문(板門)을 달았고 전면 양협간(兩夾間)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며 수리하기 전에는 3칸 모두 띠살 4분(分) 합문(閤門)이 달려 있었다. 이 건물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건물로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고금당
봉정사 경내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로 보물 제 449호이다. 극락전 앞 왼쪽에 세워져 있으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동향(東向)으로 세운 건축물이다. 원래는 맞배집 건축이나 북쪽 측면은 훗날 팔작지붕으로 개조하였다. 남쪽은 지붕을 연장하여 칸을 막고 부엌을 달았으며, 내부는 온돌을 놓고 요사(寮舍)로 사용하였다. 방 앞에는 쪽마루를 깔았고 벽간(壁間)마다 외짝 띠살문을 달았으나 원래의 문짝은 아니다. 공포(包)는 기둥 위에만 배치된 주심포(柱心包)집 계통의 구성이다.

 

봉정사 화엄강당
조선후기 목조 건물로 보물 제448호로 정면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의 건물로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에 있으며, 대웅전 앞마당쪽을 향해있다.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불교학을 공부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돌방 구조를 갖춘 강당 건물이다. 그리고 1969년 해체 ?복원할 때 나타난 상량문에 의하면 1588년(선조 21)에 중수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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