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영정]
명성황후 [Empress Myeongseong, 민황후, 명성황후 민씨, 명성태황후, 민자영, 민비]
생애
책비전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생가는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은 집으로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출사하기에 앞서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 .
황후는 어려서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효경》·《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민비 탄강 구리비(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영조가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책비 후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으리라 기대한 흥선 대원군(헌의 대원왕)의 뜻에 따라 1866년 음력 3월 6일 왕비로 간택되어 별궁인 운현궁에서 지내다가, 음력 3월 20일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 미국(신미양요, 1871년) 등과 같은 강화도에서의 군사 분쟁으로 나타났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물리치고, 국내적으로도 경복궁을 중건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는 등 전제 왕권 강화를 분명히 하였다.
1868년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았는데,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1871년 첫 아들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죽었다. 1874년 음력 2월에 태어난 척(坧)이 1875년 음력 2월 세자가 되었다. 그 뒤로도 아들 둘과 딸 하나가 더 태어났으며 일찍 죽었고, 살아남은 아들 척에게 더 정성을 쏟게 된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사람 몇몇을 조정의 요직에 앉히고 대외적으로도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중도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1874년 선물로 위장된 폭발 사고로 민승호와 어머니가 죽자 민씨 조카들을 등용하여 울타리를 쳤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한다. 이 두 사건의 배후에 흥선대원군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는 홍계훈(洪啓薰)의 등에 업혀,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피신한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이 복권하였고, 서울로 돌아온 황후는 민씨 척족을 더 등용한다. 흥선대원군의 도발이 오히려 민씨 척족을 단결하게 만든 셈이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조정의 실력자이기도 민씨 척족 상당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살생부에 올라 죽음을 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개인 비서인 내관 유재현까지 살해된다. 그때 양조카 민영익만 미국인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의 치료로 생명을 건진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횡포에 대응하여 러시아에 접근했으나 이를 우려한 영국 군함이 1885년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장악하고(→거문도 점령 사건) 청나라도 흥선 대원군을 돌려보내는 등 제어 조치를 취하여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다. 이때 배일(排日)로 돌아선 고종과 황후 세력 및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출동한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그들과 대립 관계에 흥선대원군을 앞세운다. 그해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을 투입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흥선대원군을 내세웠다.
이튿날인 음력 6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측근 이원긍을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내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이준용도 24일까지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을 비롯한 일본 공사관 요원들이 거절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대원군 세력을 달포 만에 끌어내린다. 그 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한다. 그때 황후 세력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를 비롯한 민씨 일족이 모두 유배된다. 명성황후도 경기 감사 홍순형(洪淳馨)의 집에 피신한다.
죽음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에게 접근을 시도하였다. 즉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하였는데, 이는 정책상 일본에 불리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낭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침입, 고종 황제를 위협하였다. 그들은 옥호루에서 피신하는 명성황후를 발을 걸어 가슴을 수 차례 밟고 이어 난자 살해하여 그 시신을 궁궐 밖으로 운반하여 소각하였다.
만행에 가담한 미우라를 비롯한 48명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을미사변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고,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후 “왕후”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되었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0일(양력 11월 26일) 복호되었고, 시해 2년 뒤인 1897년 황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직후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같은 해 양력 11월 국장으로 홍릉에 안장되었다.
평가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은데, 친일 급진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다. 반면에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황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외국인의 평가
명성황후에 대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좋게 평가했다. 이를테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민간인의 인상기가 그렇다. 그들은 한결같이 명성황후가 총명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임을 전해준다.
영국 왕립지리학회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영어: 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에서도 명성황후는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하였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왕비가 우아하고 근엄했으며, 체형은 수척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순박하면서도, 즉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도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다.
다만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황후의 삽화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 외교관들은 그녀를 “여우”라고 불렀다.
기타
명성황후의 초상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사진 촬영을 기피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명성황후라고 알려진 사진은 명성황후와는 관련이 없다. 심지어 어의조차 명성황후의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명성황후의 호칭
명성황후의 호칭은 사람마다 달리 주장한다. 일례로 성혼 전에 아명이 자영(玆暎)·아영·정호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출처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성혼하여 왕비로 책봉된 뒤에는 고종의 정비 민씨가 되었고, 이를 흔히 ‘민비’라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 때에는 그녀가 죽었다고 주장하며 장례를 치르기도 했고, 갑오경장 때에는 폐서인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갑오경장의 와중에 고종이 대군주폐하로 격상되면서, 명성황후도 고종의 정후(正后) 민씨로 격상되었고, 이를 흔히 ‘민후’라고 한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10월 10일(음력 8월 22일)에 거짓 조서에 따라 폐서인된다. 왕태자 이척이 태자위를 선위하겠다고 말하며 격렬히 항의하자 후궁에 해당하는 ‘빈’(嬪)으로 승격된다. 그럼에도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 폐후 조칙이 취소된다.
그해 12월 1일(음력 10월 15일)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식 확인되었고, 이후 장례 절차에 들어간다. 그러나 장례는 아관파천 등으로 말미암아 몇 차례 연기되었고,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에 왕후에서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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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일본의 "여우사냥" 작전>
마침내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정적(政敵)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흥선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정권에서 퇴각시킨다.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킨 후 명성황후는 자신의 친척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펼쳤다.
1882년 명성황후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구 군인의 세력을 업고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명성황후는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자신의 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로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 후 명성황후는 왕궁에서 외교적 정치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고, 청국과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를 거세하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 특히 일찍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자본주의 내정간섭을 실시하고자 하나, 명성황후는 일본을 배척하였다.
1895년 일본은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친척 및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명성황후를 제거할 이른바 "여우사냥"이란 작전을 세웠다.
1895년 8월 일본군 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해 10월 8일 심야에 일본인들은 서대문 공덕리에 몰려가 대원군을 호위하여 궁궐로 향하는 한편 일본인 수비대 및 낭인들은 경복궁으로 직행, 명성황후 처소에 들어가 그녀를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처 죽지 않은 명성황후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웠다. 이때 명성황후 나이 4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