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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

작성자그림9|작성시간10.01.06|조회수272 목록 댓글 1

금성대군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년 음력 3월 28일~1457년 음력 10월 21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이다. 이름은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생애
1426년(세종 8년) 음력 3월 28일,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433년(세종 15년)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년) 4월에 친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어 12살때인 1437년(세종 19년) 2월에 최사강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맹한(孟漢)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부왕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의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그는 조카 단종이 즉위하면서 단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친형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샀다. 그리하여 1455년(세조 1년)에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안치되고, 그의 재산 및 노비는 모두 몰수당했다. 2년 후, 당시 순흥의 관노가 세조에게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 라는 보고를 올려 사사되고 말았다. 그 때가 1457년(세조 3년) 음력 10월 21일로,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와 더불어 그의 자손들은 단종과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다른 세종의 왕자들(한남군, 영풍군 등)의 자손들과 함께 종친록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사후
중종조에 금성대군의 자손이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옳게 여긴 중종은 1519년(중종 14년), 금성대군의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의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숙종조에 들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월 21일을 기일로 보고,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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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형 세조에 맞선 금성대군을 아시나요?

-순흥 금성단에서 향사(추모제) 열려

 

고향 영주를 떠올리면 사과와 인삼, 한우, 부석사, 소수서원 등이 생각난다. 지난 19일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유명한 순흥에 갔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을 보고 나서 뒤쪽에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가옥들을 새롭게 복원한 선비촌까지 둘러보았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금성단에서 금성대군을 위한 향사(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금성단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을 기리는 곳이다. 이름은 유(瑜)로 조선 세종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모친은 소헌왕후 심씨이며,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동생이다. 1433년(세종15) 여덟 살 나이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서른이 되던 해인 1455년(세조1)에 왕권 경쟁에서 조카를 누르고 왕이 된 친형 수양대군에게 반발하다가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2)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순흥에 안치, 그곳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 현감의 고변으로 사사(1457년 세조3)되었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은 죽음을 당하고 순흥부는 폐부가 되었으며, 역모에 동참한 혐의로 순흥 인근 30리 둘레 안에는 사람 그림자가 끊길 정도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당시 살육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순흥을 가로지르는 죽계천은 온통 피로 물들어 핏물이 10여 리를 흘러 안정면 동촌까지 갔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바로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550년이 지난 지금도 영주의 유생들은 정축지변으로 무고하게 죽어간 순흥인들과 금성대군의 충절을 기리며 금성단에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봄(음력 2월) 향사가 열리는 금성단은 금성대군이 이보흠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치되어 있던 곳(위리안치지-圍籬安置地)으로 알려졌다.

 

유림 이십여 분이 모여서 자그만하게 지내는 향사를 지켜보면서 조선의 선비정신과 충절, 기개 등 많은 생각을 하다가, 제가 끝나고 향사를 주관한 권용학 도감을 잠시 만났다.

 

#미니 인터뷰
 
-향사를 주관하는 도감(都監)이라는 자리는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까?
"우선 도감이라는 직책은 금성단 향사를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매년 음력 2월에 행사가 열리게 되는데, 행사의 유래와 규모, 예산은.
"단종과 금성대군이 승하한 1457년 정축지변 이후 220년이 흐른 1719년에 와서야 우리 고을 선비 이기륭이 이곳을 지나가다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당시의 부사이던 이명희에게 고하여 위리안치소 옆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후 1742년 영조 임금 대에 와서 왕명으로 금성단을 만들고 3단의 비석(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이보흠, 좌단은 순절의사를 기림)을 세우면서 관에서 제수를 주어 고을 유생들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사람들을 두어 단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현재는 영주지역 유생들을 중심으로 봄 제를 지내는 소규모 행사에 머물고 있지만, 최근 모두가 힘을 모아 금성단 성역화 사업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행사를 위한 예산은 거의 대부분 유생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며, 앞으로는 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성단 향사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인가요?
"금성대군과 순흥인들의 충절을 기린다는 의미가 가장 강하고, 그것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는 영주인들의 기개와 지조, 충절, 도덕성 등을 느낄 수 있는 행사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영월에서 단종제 개막 전에 이곳 영주 땅 순흥으로 와서 금성단 향사를 지내고 혼을 모시고 영월로 가서 행사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지금도 뜻있는 영월 유림들이 이곳 향사에 참가를 하기는 하지만, 90년대 지자체가 시작되고는 강원도와 경상도 간에 간극이 생겼습니다.

 

현재는 영주 지역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시도 지원을 받아내어 금성단을 성역화 하는 문제나 도덕성 회복과 충효사상교육, 관광자원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수서원과 연계한 성역화가 시급하고 숭모전(崇慕殿) 건립 등으로 소수서원이나 부석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보물급 역사문화유산으로 개발 보존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P.S 금성단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수서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영주시민신문 2006.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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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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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카방 | 작성시간 14.02.11 정축지변이라...영주의 슬픈 역사네요 ~~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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