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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작성자그림9|작성시간07.11.30|조회수101 목록 댓글 0
374(소수림왕 4)~412(광개토왕 22).
 
고구려 제19대 왕(391~412 재위).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여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본명은 담덕(談德).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했다(→ 고구려의 대중국전쟁).

 
정복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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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초부터 예성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던 백제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392년 7월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10월에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다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이라던 관미성(關彌城)을 20여 일 만에 함락시켰다. 394년 7월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에서, 395년 8월에는 패수(浿水)에서 각각 격퇴하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해로로 임진강 방면에 진출하여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해서 58성 700촌락을 쳐부수고,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백제는 399년 임나가야(任那加倻), 안라(安羅), 왜(倭)의 연합세력과 함께 신라를 공격해왔으며, 404년에는 다시 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침공했다. 광개토왕은 5만의 병력을 보내 신라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고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몰아냈다. 아울러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서쪽으로도 진출하여 랴오둥[遼東] 지방을 놓고 후연과 싸웠다. 당시 고구려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과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후연과는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400년 후연왕 모용성(募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략하자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에 402년 랴오허[遼河]를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募容歸)를 도망치게 했다.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성을 비롯한 랴오허 동쪽지역을 차지했다. 이는 전국시대 연(燕)에게 잃었던 고조선의 땅이 700여 년 만에 고구려에 의해 회복된 것이었다. 그뒤 405년 후연왕 모용희(募容熙)의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木抵城) 침입을 물리치고, 산둥 성[山東省]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남연(南燕)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후연을 견제하고 랴오허 동쪽지역을 더욱 확고히 장악했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北燕)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밖에도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 잡혀 있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시라무렌 강 방면의 거란으로 추측되는 비려(碑麗)를 친정하여 염수(鹽水) 방면의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했다.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켜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했다. 이리하여 재위기간중에 64성과 1,400촌락을 정복했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랴오허,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중국민족과의 뼈저린 투쟁의 목표이던 랴오둥을 완전히 차지하고 또 동북의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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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정의 정비에도 힘써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하여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했다.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그의 능(陵)과 생전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능비(陵碑)가 414년에 건립되었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에 남아 있다.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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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업적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절에는 중국과 비교할수 많큼 국력이 강했죠

오랜 만에 쓸려니까 기억이 잘안나네요......님이 궁금해 하시는걸 아실려면 광개토 대왕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는게 어떨까 싶네요...... 그래서 없는 시간 짜내어 친필 합니다...........

 

먼저광개토태왕을 얘기 할려면 고국원왕 때로 올라 가야합니다.....

바야흐로 4세기경 백제의 전성기 근초고왕이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대륙백제를 건설이 한창 진행중일때..

요서와 요동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고구려!

그때 백제의 입장으로 봤을때 대륙과 반도를 하나로 있는 거대한 프로잭트를 샐행하는데 거대한 걸림돌인 셈이죠..  대륙에서 발해만을 통과하여 반도로 이어지려는 백제와 발해만 유역이라도 지키려는 고구려와의 대결!!

이때 알아 주셔야 할점은 이때 고구려는 팽창과 축소를 심하게 반복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도처럼

딱딱 영역이 나누어 진것이아니라 어느나라가 어디까지 세력을 미치느냐!! 그걸로 영역을 나타냈죠

이때는 고구려내에 혼란이 일어나 세력이 약해 져 있었죠 그때문에 이전투는 결국 고구려가 지고

백제가 고구려의 수도를 포위하죠 결국 수도를 지키다 고국원왕이 죽고 결국 백제의 전성기가 시작되죠..

고국원왕이 죽은뒤 소수림왕이 왕위를 잇고 내란을 진정시키고 국가의 힘을 키우죠......

소수림왕이 아들없이죽자 고구려의왕은 그의 동생 고국양왕이 있죠.......

하지만 길러놓은 힘으로 다시 세력을 확보하려하나 번번히 실패합니다.

이 계기로 고구려는 좀 잠잠해짐답니다....... 하지만 잠잠해진것은 다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였으니.......

세력이 왕성할때 즉 고구려 전성기의 바로 앞인 4세기 말 바로 광개토 태왕이 태어납니다......

이름은 담덕이고 375년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죠....... 이때는 바야흐로 후연시대..

백제의 힘이 왕성했으나 이제 서서히 기울어 질무렵 19살에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쉴틈도 없이 바로 백제로 진격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륙과 반도 백제의 연결선인 발해만을 되찾고 대륙백제를 황하강 남쪽으로 밀어넣었으며

반도백제의 남쪽으로 진격 수도로 통하는 길목인 관미성(엄청난 요새죠!! 절벽에 둘러쌓인 섬의 모양대로 성벽을 쌓아 육지로 올라와서 함격하다간 절벽에 다이빙을 하게 된다는......)을 배를 육지처럼 이용해 .9일 만에 격파

한강을 이용해 백제의 수도로 진격 합니다...

백제는 엄청난 양의 재산을 지불하고 고구려를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백제는 전성기의 백제 그 굴욕을 잊지 않고 세력을 키운 다음 고구려의 급 성장을 두려워 하고 있는

주변나라들 후연, 거란 등과 손을 잡고 후연은 고구려의 남동쪽 거란은 북서쪽 백제는 남쪽을 치고 올라 옵니다

3국의 협동공격에 국경이 사방으로 공격을 당했으나 고구려의 광개토 태왕은 단숨에 3국을 격파합니다(역시 광개토태왕~~) 그리고 후연의 모용씨의 계속 되는 공격을 막고 역으로 공격하여 현도 지방의 성을 얻죠

그리고 말갈쪽 즉 북서면의 국경을 정리하죠...... 그리고 백제를 다시한번 위협

3국을 완전히 정리하죠.......

이제 부터가 중요합니다.... 고구려에게 패한 후연은 국경 문제도 않좋은데 나라안까지도 문제가 일어나죠.....

결국 두나라로 나누어 집니다....... 바로 북연과 남연....... 합쳐도 고구려를 못이길 정도인데 두갈래로 나누어 짐으로서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완전히 밀리죠 이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거듭나죠...... 이제 고구려는 실크로드를 이용해 아프가니스탄까지 갔던걸로 보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아프가니스탄 벽화 이죠....... 아! 정말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이제 고구려를 대적할 나라는 동아시아 밖에도  몇나라 안 되죠.......

그런데 많은 왜곡

왜곡의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조상은 위대한데 후손은 좀 위대하지 못한경우죠

결국 고구려의 역사가 아예 사라질뻔하지 않았습니까??

산둥은 후연놈들이랑 접할때 위에 자도보다 산둥반도의 영역은 훨씬 더 컸습니다.....

그리고 북쪽도 많이 축소되었는데 송화강을 훨씬넘어 지금의 몽골땅 근처일것 같습니다.......

남쪽으로 한강 경계로 이남까지 침입했습니다.......

수도는 발해만 영역으로 추측 됩니다.......

아 그리고 태왕사신기에 나오는 쥬신의 영역입니다. 전성기때 고구려+말갈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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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好太王碑)

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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