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 (九山禪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불교가 한창 성할 때에 고승들이 중국에 들어가 달마선법을 받아 가지고 와서 종풍을 크게 일으킨 9개의 산문이다.
그 때는 화엄교종이 불교의 교세를 잡고 있어서 새로운 사상으로 들어온 선종은 교종의 위세에 눌려 세를 규합하지 못하자 각기 산 속의 암자를 짓고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중앙정부 권세가 들의 홀대를 받던 신흥세력들이 당시의 중앙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새로운 선불교를 개창한 산 속의 선승을 지방의 구심점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왔으며 석물과 철물을 다루는 기술자는 부도나 부처를 조성하는 불사에 흔쾌히 동참하였다. 쌍계사와 성주사도 이런 방식으로 이룩되었던 것이다.
이를 산문이라 불렀는데 그들 속에 아홉 산의 산문이 두드러졌다.
1) 실상산문(實相山門) : 남원의 실상사에 홍척국사가 개산(開山)
2) 가지산문(迦智山門) : 장흥의 보림사에 도의국사가 개산
3) 사굴산문(闍崛山門) : 강릉의 굴산사에 범일국사가 개산
4) 동리산문(桐裏山門) : 곡성의 태안사에 혜철국사가 개산
5) 성주산문(聖住山門) : 보령의 성주사에 무염국사가 개산
6) 사자산문(獅子山門) : 능주의 쌍봉사에 도윤국사가 개산
7) 희양산문(曦陽山門) : 문경의 봉암사에 도헌국사가 개산
8) 봉림산문(鳳林山門) : 창원의 봉림사에 현욱국사가 개산
9) 수미산문(須彌山門) : 해주의 광조사에 리엄존자가 개산
이들 아홉 산문중에 범일국사를 개조로 받드는 사굴산문이 가장 번창하였다하며, 무염이 주석한 성주산문과 도선이 주석한 동리산문이 후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가지산문은 도의를 개조로 받들어 오늘날 조계종의 종조가 되었다.
당시 산문에 머물고 있던 유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선승 15명의 출신성분을 보면 이러하다. 금마 출신의 혜소 경주출신의 혜철 철원출신의 대통 경주출신의 도현 영암출신의 도선 경주출신의 이관 등 6명이 평민이었다. 그 박에 낮은 귀족 벼슬아치의 출신이 섞여 있고 진골출신이 한명 있으며 성골 출신은 한 명도 없다. 이런 신분 구성은 선승들이 평민 지향적이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화엄종 승려들은 왕자나 진골 귀족출신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었던 경우와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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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禪宗)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선종 사상을 초석으로 아홉개의 산문(山門)이 형성 되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처음으로 실상산문(實相山門)이 개설된 828년(신라 법흥왕 3)에서 부터 마지막 수미산문(須彌山門)이 만들어진 932년(고려 태조 15)까지는 실로 104년의 긴세월이 흐른다. 현재 우리 불교의 종가를 이루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맥도 바로 이 구산선문에서부터 비롯 되었다. 수미산문 광조사는 북한지역에 있다.
■ 실상산문(실상사)
구산선문중 가장 먼저 개창된 것이 실상산문이다. 개조(開祖) 홍척스님(?∼828)은 중국 서당의 법을 얻어 826년(흥덕왕 6)에 귀국해 산문을 만들고 “정(靜) 하였을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이는 그가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그의 제자로는 편운과 수철이 있었는데 단의장옹주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구산선문중 실상선문이 가장 왕실과 밀착 됐었음을 알 수 있다.
평평한 절마당 곳곳에 잘 보전돼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37호) 2기와 석등(보물 제35호), 창건주의 유골을 모신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과 탑비(보물 제39호) 등은 실상사의 내력과 함께 고찰의 역사를 웅변해 준다. 단층 기단위의 탑신 전체에 난간·신중(神衆)·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들이 정교하게 조작돼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은 통일 신라 시대의 지혜와 향기를 맛볼 수 있게 해 준다. 인근에는 쌍계사와 칠불암이 있다.
■ 가지산문(보림사)
도의선사(783∼821)는 859년(헌안왕 3)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에 머무르며 김언경 등의 후원 아래 사원 세력을 확장시켜 가지산문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난다(心足意興)는 화두를 강조했다. 이후 가지산문은 염거·체증·형미·진공 등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 왔다.
전라남도 장흥군에 위치한 보림사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 사천왕상과 긴 세월 속에서 자태와 위용을 한껏 뽐내는 삼층석탑, 석등(국보 제44호)을 만날 수 있다. 또 왼쪽 어깨에 새겨진 8행의 기록을 통해 보림사의 역사를 증명해 주는 커다란 불상인 철제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근처에 있는 운주사와 쌍봉사도 가 볼만 하다.
■ 희양산문(봉암사)
구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킨 희양산문의 개창자 지증선사(824∼882). 그는 다른 선문 개산조와는 달리 유학에 밝았고 선승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 탄생·금기·출가 등 6이(異)와 불사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6시(是) 등을 주장했다.
봉암사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1년내내 오직 참선으로 수행·정진하는 도량이다. 이 사찰의 최대 자랑 거리는 장중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지증대사적조탑(보물 제137호)과 탑비(보물 제138호). 인근에 김용사와 대승사가 있다.
■ 동리산문(태안사)
중국 서당의 법을 받아 개창했던 또 하나의 산문이 바로 동리산문이다. 개조 혜철스님(785∼861)은 839년(신무왕 1) 중국에서 돌아와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해 산문을 이끌고 나갔다. 그의 제자로는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설을 제창한 도선이 있었는데 그의 사상은 왕건이 고려 국가를 건설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전해 진다.
이 사찰에서 순례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맞배지붕 건물인 옛 누각 능파각. 긴 역사에 비해 절을 이루고 있는 건물수가 적어 전체적으로 단촐한 느낌을 준다. 선원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동리산문을 개창한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탑인 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에 이르게 된다. 태안사는 부도 이외에도 1454년(단종 2)에 만든 대바라 한쌍(보물 제956호)과 1581년(선조 14)에 제작된 명문이 새겨진 대웅전 동종, 해회당 마루에 걸려 있는 직경1m의 금고(金鼓) 등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인근에는 화암사와 천은사가 있다.
■ 사굴산문(굴산사지)
사굴산문은 범일스님(810∼889)에 의해 개창됐다. 범일은 831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했다.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라 말한 그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그 뒤 진귀대사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다”고 설해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로는 행적·개청·신의 등이 있으며 이 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쳤다.
굴산사는 851년(신라 문성왕 13)에 범일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는 매우 유명했던 사찰이다. 전성기때에는 승려 수만도 2백여명이 넘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에 까지 흐를 정도로 큰 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소실돼 세인의 관심 밖에서 사라졌었다. 이후 1936년 강릉지방의 대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됐고 이때 부근 주민이 ‘사굴산사’라는 한문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이절이 굴산사였음이 밝혀지게 됐다.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 절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5.4m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또 이 절터에는 ‘굴산사지 부도탑’(보물 제85호)과 ‘굴산사지 석조 비로자나 삼존불상’이 남아 있다. 인근에는 등명낙가사와 보현사가 있다.
■ 봉림산문(봉림사지)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현욱선사(787∼868)이다. 현욱은 824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의 법을 받아 837년에 귀국한 뒤 봉림산문을 만들었다. 그의 제자 심희는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율희와 연결해 봉림사를 열었고 이어 918년에는 왕건의 권유로 고려 왕실에 나가기도 했다. 이어 심희의 제자 찬유는 “동일한 진성(眞性)이 일심(一心)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했고 천태사상을 받아 들이기도 했다.
현재 봉림사 절터에는 남아 있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봉건사지에는 본래 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탑비(보물 제363호) 그리고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었는데 탑과 탑비는 일제시대때 경복궁으로 이건됐고 석탑은 1960년 사지 3㎞ 밑에 있는 상북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인근에는 성주사와 장위암이 있다.
■ 사자산문(법흥사)
사자산문의 개창조인 도윤스님(798∼868)은 825년(헌덕왕 17)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의 법을 받아 귀국했다. 먼저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산문을 열었지만 번성하지 못했다. 이후 그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오면서 부터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되었다.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때인 7세기 중엽에 자장 율사가 문수 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 세 곳을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기도를 하다가 맨 마지막에 이곳에 들러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이후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흥녕사에서 법흥사로 절이름을 바꾸었다. 옛날 흥녕사 시절에는 구산선문으로서 이름을 떨치며 전국의 도속(道俗)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었다. 하지만 오늘의 법흥사는 적멸 보궁 도량으로서 수많은 불자들이 바치는 ‘나무석가모니불’ 정근 소리가 사시사철 그칠날 없이 도량에 메아리 친다. 월정사, 구룡사, 정암사 등이 가깝다.
■ 성주산문(성주사지)
성주산문은 무염국사(801∼888)에 의해 개창됐다. 무염국사는 821년(헌덕왕 13) 중국으로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의 법을 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 남포지역의 호족인 김흔과 결합해 성주산문을 열었다.
이 산문은 나말 여초에 가장 번창했으며 무염국사는 여엄·대통·심광·자인·영원 등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특히 이 산문은 선종의 입장에서 화엄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가졌다.
성주사는 백제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신라때에 개칭되면서 크게 중창된 사찰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서는 성주사의 규모를 불전 80칸, 행랑 800여칸, 수각(水閣) 7칸등 성주사의 규모를 거의 1천칸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소실돼 그 장엄하던 절이 송두리째 자취를 감췄다.
성주사터에는 오층석탑, 금당터의 석조 연꽃대좌, 세 기의 삼층석탑 등 돌로된 것들만이 그 형체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 부도비중 가장 큰 것으로 성주산문의 개창조사인 무염국사의 부도비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옛 명성을 자랑하고 서 있다. 인근에는 무량사와 장곡사 등이 있다.
■ 수미산문(광조사지)
구산선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스님(870∼936)이다. 그는 896년 중국에 들어가 운거의 법을 받아 911년(효공왕15)에 귀국해 산문을 열었다. 이엄의 제자로는 황보 제공과 왕유·이척량 등 전현직 고관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띠었다.
광조사는 진철대사 이엄을 아끼던 태조에 의해 932년에 창건됐다. 그때 이엄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求道者)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문의 전통이 확립 됐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
산문의 중심 도량인 광조사는 오래전에 소실됐고 이엄 즉 진철대사의 보월승공비(寶月乘空碑)와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황해도지>에 기록돼 있다.
실상산문 : 북종선 전수…왕실과 가장 밀착
가지산문 : 도의선사 개창…性相不二 강조
희양산문 : 순수 국내 산문…일년내내 안거
사자산문 : 최대 번성 문파…적멸보궁 갖춰
성주산문 : 千칸 규모 대찰…화엄사상 융합
수미산문 : 이엄이 해주에 세워…왕정 도와
동리산문 : 中 서당法이어…고려창건 한몫
사굴산문 : 범일국사 창립…조사선 일으켜
봉림산문 : 마조선맥 부흥…일심근본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