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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의 정혜결사

작성자그림9|작성시간09.03.19|조회수404 목록 댓글 0

정혜결사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근수(勤修)하는 결사(結社)이다.
정혜결사는 첫째 당시에 극히 속화되고 미신화된 '호국기복불교' '우상불교'에서 현실적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구세제중(救世濟衆)하는 '정법불교'의 복귀운동이며,

둘째 명리(名利)의 도구화된 '형식불교, '가면불교'에서 진실한 출세간의 길을 밟아 성불도생(成佛度生)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행불교'의 재건운동이며,퇴폐하고 변질되어 버린 '궁중불교' '관권불교'에서 참신하고 생명 있는 '민간불교' '대중불교'의 건설운동이었다.


보조국사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서 구시대적 불교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한편 참다운 '수행불교' '정법불교' '민간불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근수정혜결사(勤修定慧結社)>를 발기했다.

이 세종류의 불교이념이 그 결사의 제호에 그대로 표현되었는데 '근수(勤修)'는 '수행불교'의 재건을 뜻하는 것이고, '정혜(定慧)'는 '정법불교'의 복귀를 말하는 것이며, '결사(結社)'는 지난날 궁정불교, 관권불교를 탈피한 새로운 민간자유의 수행집단을 구축하는 민간불교, 대중불교를 지향한 것이며, 이것이 정혜결사의 근본 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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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의 정혜결사운동과 소태산의 불교개혁운동 인문 

 
 金邦龍 (원광대 동양종교학과 강사)


Ⅰ. 서론


정치 경제적으로 국제화․세계화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컴퓨터와 인터넷에 의한 정보화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 「무한 경쟁시대」을 알리는 북소리를 우리는 분명히 듣고 있으며 우리사회에 불어닥친 IMF의 한파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더욱 위축되어 있다. 경제적인 불황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허감에 우리는 휩싸여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공동체적 윤리보다는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행위의 선차적 조건이 되어가고, 물질의 가치는 더욱 기승을 부리며, 이에따라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더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대중문화에 있어서는 반기성문화 혹은 신세대문화가 유행하고, 운전․컴퓨터․외국어 등이 필수적이 되어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꾸 근본적인 것이 바로 세워지지 못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21세기 인류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변화해가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 남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은 개인과 기업은 물론 국가 또한 마찬가지이며, 종교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현재 우리는 마치 인터넷에 들어가서 수 많은 정보를 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느 정보도 선택할 수 없는 상태와도 같이, 사상의 부재가 아닌 사상의 홍수 속에서 나타나는 무관심 내지 부적응 상태에 빠져 있다. 21세기를 눈 앞에 두고 진행되는 이런 심상치 않은 징후들은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이러한 당혹감은 종교인에게 있어서 더 심하다.

 

그러나 이런 때 일수록 「바람직한 종교인의 자세는 어찌해야 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모두들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그냥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이리 저리 분주히 움직일 때, 더디가더라도 확실한 길을 가는 것이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개교표어가 말하고 있듯이, 산업화와 마찬가지로 정보화사회 또한 물질개벽의 새로운 장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을 개벽하는 일은 앞으로도 원불교인의 과제이자 일원세계를 이룩해가는 희망의 창구이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우리사회에 불어닥친 근대화의 바람은 산업화였다. 그리고 그러한 산업화를 지탱시켜주었던 정신은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서구정신이었다. 그동안 일부에서는 소태산 대종사가 제시한 「물질개벽」의 의미를 산업혁명이후 발달한 산업화의 의미로 보았던 것 같다. 특히 새마을 운동이후 지속적으로 변화된 우리사회의 모습 속에서 물질개벽의 위력을 실감하였으며, 그러한 전제하에 「정신개벽」의 의미가 실용주의나 합리주의와 유사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측면이 있었던 같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정신개벽」의 의미는 실용주의와 합리주의의 서구정신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한 정보화와 세계화로 상징되는 물질개벽의 또다른 장 앞에서, 「정신개벽」의 의미를 지금 철학계에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주의나 해체주의 등으로 보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정신개벽의 의미를 산업화의 시기에는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로 이해하고, 정보화․세계화의 시기에는 해체주의 내지 포스트모던주의 등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바로 물질개벽에 정신개벽이 종속되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 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 무변한 낙원으로 인도함」1)을 개교의 동기로 밝히고 있는 소태산 대종사의 입장에 상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개벽」이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의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정신개벽」의 의미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즉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깨달음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질의 개벽에 종속되어지는 마음이 아닌, 물질의 개벽을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정신의 개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宇宙萬有의 本源이며 諸佛諸聖의 心印이며 一切衆生의 本性인 一圓相의 眞理를 깨달아 우리의 삶을 변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원상 진리는 佛法이며, 참나를 깨닫는 것이며, 참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본래 空的靈知한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남이라는 分別心이 생기고, 이러한 미혹한 마음이 대상을 향해  貪․瞋․痴의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번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특히  「신세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다가오는 21세기의 사상적 혼란상 속에서 원불교는 과연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고려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운동과 소태산 대종사의 불교개혁운동의 비교를 통하여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普照國師 知訥은 타락된 고려불교를 개혁하여 정법불교를 구현하였으며, 현재 태고 보우와 함께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서 숭앙받고 있듯이 한국불교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少太山 大宗師는 자신의 깨달음을 통하여 그 연원을 불법에 대고 당시불교를 개혁하였을 뿐만아니라,  원불교를 창시하여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들 두 운동은 모두 철저한 구도과정을 통하여 깨달음의 근원을 우리의 마음에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통찰하고 이를 개조하려는 적극적인 운동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이 두 운동은 지금의 우리 삶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운동의 배경과 그 핵심적 성격을 찾아보고, 그러한 점이 현재 당면한 우리의 문제에 어떠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지눌의 정혜결사운동

 

 1. 시대적 배경과 정혜결사운동의 전개

 

지눌은 고려 의종 12년(1158)에서 희종 6년(1210)까지 53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지눌은 당시 고려불교의 타락된 현실을 직시한 후 고려불교를 바로 잡으려는 定慧結社의 목표를 확립하고 그의 실현을 위해 평생을 진력하였다. 普照 知訥의 정혜결사 운동에 대한 주요 내용은 지눌이 지은 󰡔勸修定慧結社文󰡕과 김군수 찬의  󰡔普照國師碑銘󰡕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고려불교는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무신정권의 구테타에 의한 정권찬탈 과정에서 불교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종교 본연의 자세를 잃게 되었다. 즉 고려불교는 초기부터 왕실과 밀접한 왕실불교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왕실의 변화와 불안정은 불교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왕실의 비호를 받던 불교계는 경제적 신분적으로 받는 혜택으로 인하여 승려기강이 해이되고 물질적 풍요 속에 타락되었던 것이다. 내적으로는 불교내의 분열상을 들 수 있는데, 선종과 교종이 심한 반목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각 파벌간에 심한 갈등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상황 속에서 불교계가 취한 태도를 종합해보면, 敎宗을 중심으로하여 나타난 무신정권에 대한 항쟁2)과, 다른 하나는 普照의 定慧結社運動이나 白蓮社를 중심으로 한 了世(1163-1245)의 白蓮結社運動이다. 특히 보조 지눌의 정혜결사운동은 이러한 불교계 내외적 위기에 대하여 대응한 가장 적극적인 시도였다.  선‧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눌은 그의 전 삶을 일관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 그가 취한 태도는 첫째, 정치적인 세력과는 항상 거리를 유지하였고 둘째, 선교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인 규명작업을 하였으며, 또한 실천적인 차원에서 정혜결사를 진행시켰다.

 

지눌의 삶은 정혜결사운동의 뜻을 세우고, 정혜결사운동을 준비하고, 정혜결사운동을 실천한 삶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정혜결사운동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군수 찬의 보조국사비명에 의하면, 지눌은 의종 12년(1158)에 황해도 서흥군에서 국학의 학정인 정광우의 아들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계의 종휘(宗暉)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지눌은 25세(1182)에 승선(僧選)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승선은 승려의 과거제도로서 그 합격은 출세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젊은 지눌은 출세의 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동학 10여 인과 더불어 고려불교를 새롭게 할 다짐을 한다. 이러한 결심은 훗날 정혜결사의 형태로 나타난다.

 

승선에 합격한 후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서 동료10 여인과 고려불교를 유신할 결사를 결의한 후 산속에 은거하게 된다. 이는 바로 정혜결사운동을 준비하는 기간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 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지눌이 남하(南下)하여 청원사(淸源寺)에 입사한 명종(明宗) 12년(1182)인 그의 나이 25세부터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정혜결사문󰡕을 지어 정혜결사의 기치를 든 명종 20년(1190년)인 그의 나이 33세까지로 볼 수 있다. 담선법회를 파한 후, 지눌은 남하하여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3년을 머문 다음 1185년에는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은거하며 수련과 정진에 들어간다. 창평 청원사에서 하가산 보문사에 머무는 동안 지눌은 고려불교가 가지고 있는 많은 폐단들을 절감하고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길렀던 것이다. 

 

지눌은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문'을 지어 본격적인 정혜결사의 기치를 내걸게 되는데, 그 이후  죽는 순간까지 정혜결사의 삶을 실천하게 된다. 이 기간은 󰡔정혜결사문󰡕을 발표한 1190년 그의 나이 33세부터 입적할 때인 1210년 그의 나이 53세까지이다. 그는 정혜결사를 위한 더 넓은 도량을 물색하던 중 1197년 송광산 길상사를 발견하였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확장공사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9년 만에 공사를 마치게 된다. 지눌은 신종 3년(1200)에 현재의 순천 송광사로 정혜결사의 본거지를 옮기어 본격적인 결사의 실천과 교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1205년 희종은 그 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그 절을 수선사(修禪寺)로 이름붙인다. 지눌은 1205년 이전에 저술했던 󰡔정혜결사문󰡕을 다시 인쇄하여 발표하고, 아울러 승당(僧堂)에 있어서의 생활 규법으로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저술한다. 이 책은 정혜결사의 청규(淸規)법으로서 저술 반포되어 사중(社衆)의 일상 생활을 경책(警策)한 것이었다5).  위의 두 책을 통하여 지눌은 정혜결사의 취지를 밝히고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정해 놓았던 것이다. 

 

이렇듯 지눌의 정혜결사는 오염되고 타락한 고려사회와 부패한 고려불교를 부정하고 올바르고 새로운 정법불교를 이루려는 신불교운동이었다. 또한 지눌의 삶 전체는 정혜결사의 뜻을 세우고, 정혜결사를 준비하고, 정혜결사를 실천하는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2. 정혜결사운동의 이념과 성격


정혜결사의 과정은 바로 지눌의 삶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정혜결사의 이념은 지눌의 깨침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로 환원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눌에게 있어서 깨침의 과정은 잘못된 고려불교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통찰과, 그 통찰을 바탕으로 잘못된 현실이 있게 된 원인 규명과, 세속적 명리를 탐하고 바른 종교적 실천으로부터 멀어진 고려불교를 바로잡아 정법불교를 구현하겠다는 지눌의 이상과, 잘못된 상태에 있는 고려불교를 정법불교로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담고있는 것이다.

그럼 지눌이 실천하였던 정혜결사운동을 몇 가지 이념으로 나누어 고찰해보자.

 

첫째 이념은 수심불교(修心佛敎)를 확립했다는 점이다.

지눌은 세속적 명리에 이끌리는 것이나 비좁은 파벌주의로 싸우는 것도 다 마음닦는 일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므로 모든 불자들이 마음닦는 일에 철저해야 한다고 하였다.6) 지눌이 말하는 마음은 바로 일체의 對가 끊어지고 공적영지(空寂靈知)한 진심(眞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心則佛)이다. 지눌은 바로 당시의 타락된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를 마음을 닦는 길로 여겼으며, 이러한 점이 정혜결사운동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둘째 이념은 선교융회(禪敎融會)의 이념이라는 점이다.

지눌은 당시 불교계의 문제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들고 있다. 지눌은 정혜결사를 준비하기 까지 이론적으로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는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에 나오는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교(敎)요,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다.」7)라는 구절을 통하여 이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이러한 이론적인 회통을 통하여 정혜결사운동은 선종과 교종의 회통을 꾀한 실천운동으로 볼 수 있다.

 

세째 이념은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이념이라는 점이다.

지눌은 마음이 부처라는 자각을 통하여 선정(定)과 지혜(慧)를 함께 닦자는 구체적인 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지눌이 정혜쌍수라 할 때 정과 혜는 마음에 즉(卽)하여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정은 마음의 공적(空寂)한  본체(本體)를 가리키며, 혜란 마음의 영지(靈知)한 작용(作用)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분리할 수 없듯이 정과 혜도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이다. 수심(修心)의 실제에 있어서 정(定)에만 치우치면 혼침(昏沈)에 떨어지기가 쉽고, 혜(慧)에만 치우치면 산란해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정과 혜를 쌍수하자는 것이다.

 

정혜결사의 취지와 목표는 그 근본에 있어서 볼 때, 깨침의 세계에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나와 남이 분별된 우리의 의식세계를 깨고, 나와 남이 하나가 된 연기의 세계에 눈뜨자는 것이다.  정과 혜를 같이 닦자는 정혜쌍수는 이론적으로 공적영지한 마음의 바탕에 입각하여 설명되어 진다. 그리고 그 실천과정은 지눌이 경험한 깨침의 세계로 가르침을 받는자들을 인도하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성격은 「어떻게 하면 깨침의 세계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인도할 수 있을까?」 하는 지눌의 고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정혜결사운동은 나타난 성격을 요약하여 보면, 첫째, 근기를 중시하는 성격과 둘째, 회통불교적 성격과 세째, 대중적 불교로서의 성격과 네째, 실천불교로서의 성격을 들 수 있다.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  첫머리는 「내 들으니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사람은 땅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하였다. 그러므로 땅을 떠나 일어나려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한 마음이 미혹하여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요, 한 마음을 깨달아 끝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는 부처다. 미혹함과 깨달음은 다르지마는 모두 한 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마음을 떠나 부처가 되려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지눌은 당시 불교계의 문제점을 자신의 문제로 직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을 정혜결사운동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이루어 나간다. 정혜결사운동의 핵심은 定과 慧로서 마음을 닦자는 것이다. 당시 불교계의 타락과 더 나아가 모든 인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미혹된 마음」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혹된 마음을 닦아 참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는 것을 지눌은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정혜결사운동을 통하여 그러한 목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Ⅲ. 소태산의 불교개혁운동


 1. 시대적 배경과 불교개혁운동의 전개

 

소태산 대종사(朴重彬1891-1943)는 전남 영광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구도과정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그는 7세에 문득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10) 하는 의심을 일으킨 후, 바람과 구름의 우주적 문제에 대한 의심이 뒤를 잇고, 자신과 부모와 형제와 물건과 주야 변천 등에 대한 수많은 의심이 꼬리를 물게 된다. 그 후 산신을 만나려고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5년간 기도하고, 6년간 도사를 찾아 온갖 정성을 다 들이다가, 22세부터는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한 생각에 사무쳐, 26세(원기 원년, 1916년) 되던 해에 깨침을 얻는다.

 

1916년 소태산 대종사는 스스로의 깨침 이후 모든 경전을 열람하던 중, 「나의 아는 바는 옛 성인 또한 먼저 알았도다」12) 하시고 「그 중에서도 진리의 심천(深淺)이 있으니 진리를 근본적으로 밝히는 것은 불법이 제일이다」13)라하여 불법을 연원으로하여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를 창시하기에 이른다. 소태산은 원기 5년 4월에 부안 봉래산에서 새회상의 교강으로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를 발표하였으며, 새 회상의 교서 초안으로 '朝鮮佛敎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이 차례대로 초안되었다. 󰡔조선불교혁신론󰡕은 재래 조선불교를 시대에 적응하여 대중교화를 의미한 것이요, 󰡔수양연구요론󰡕은 수양 전문의 방식과 각항 연구조목을 지정하여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의 실지 경계를 밟게 하는 경전이다.

      

이와같이 소태산 대종사는 불교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위하여 불교개혁운동을 일으켰으며,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 아래 28년간 중생제도에 힘쓰다가 53세(1943년, 원기 28년) 6월 1일에 열반한다.

 

그렇다면 먼저 이러한 소태산 대종사가 살다간 시기의 시대적 배경과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제되어야만 왜 소태산 대종사가 불법에 그의 깨침의 연원을 두었으며, 당시의 불교를 개혁하여 원불교를 창시하였는 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그 의의에 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살다간 1891-1943은 바로 우리의 국맥이 끊어져 가는 조선 말기와 일제시대에 해당된다.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가 소태산이 태어나던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승려들의 지위가 천민화되어 도성의 출입마저 제한당하게 된다. 철저하게 피폐화된 조선말의 불교는 일본 군부의 조선 침략이 구체화됨에 따라 조선인의 「정신적 계몽」을 위한 침략적 도구로서 또다시 이용 당하게 된다. 한일합방 이전의 집요했던 회유, 포섭 공작과 합방이후의 사찰령에 의한 통제와 간섭이 그것이었다. 일제의 한국침략 의도가 점차 구체화 되어감에 따라 침략의 사전 整地작업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실행되었던 부분이 일본종파의 한국내 다량 침투15)였다. 이것은 한국내 일본인들을 위한 포교, 위안 활동이 그 명목상 이유였으나 그 이면에는 한국내 일제 불교교단을 거점으로 하여 친일 세력을 육성하고 항일 의식의 분위기를 무마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불교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 불교인들을 유인, 포섭 내지는 개종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한국 승려들의 도성 출입허가건이었다. 승려의 도성출입에 대한 허가는 1895년 일본 승려 사노가 김홍집 총리대신에게 상서한 것을 김홍집이 고종에게서 허가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승려들의 도성출입허가는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준 반면, 이러한 일이 일본 승려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 한국불교의 친일적인 경향을 노정시키게 되었다.

 

1925년까지의 국내 불교계에 대표적인 사건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908년 3월 6일 전국 승려대표자 52인이 元興寺에 모여 총회를 열고 宗名을 圓宗이라 선포하고 圓宗宗務院을 발족시키고, 李晦光을 대종정으로 추대한다. 이 원종은 당시 한국불교의 통일기관이 등장하게 된다. 1910년 10월 이회광은 圓宗과 일본불교 曹洞宗과 양종의 연합맹약에 합의하고, 7개조의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친일적 매종행위임이 밝혀짐에 따라 전국도처에서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912년 정월 박한영․진진응․한용운․오성월 등을 필두로 전라․경상도의 사찰이 맹약하여 임제종을 표방하고 격렬한 반대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원종과 조동종과의 연합맹약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들이 추진한 임제종 운동은 마침내 송광사에 臨濟宗 임시종무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1년에 공포된 사찰령이다. 이 사찰령의 골자는 첫째, 30개 본사를 정하여 전국의 900여개 사찰을 분할 관리케하고 본사나 말사를 물문하고 독립사찰이면 반드시 주지를 두어 사찰을 관리케하되 본사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얻어 취임하게 하였던 것이며, 둘째, 사찰에 속한 토지․임지․건물․기타 귀중품 등의 재산은 주지가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찰령의 결과 몇 가지의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첫째, 주지의 임명권이 총독에게로 옮겨지게 된다. 이로써 주지가 山中公議에 따라 전통적으로 추대되던 전통을 잃어버리게 된다. 관권에 의해 임명된 주지들이 관권을 배경으로 온갖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둘째, 사찰령은 사찰의 온갖 처분 및 관리권이 총독의 임명을 받는 주지에게로 넘어가게 했는데 이로 인한 본사 주지들의 지나친 권한 비대화는 결과적으로 주지들의 세속화, 타락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세째, 사찰령이 한국의 사원조직 자체에 의한 자율적 통제성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한국불교계의 수뇌부로 하여금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교단내에 점차 비판의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사찰령을 근거로 하는 일제의 통제․간섭이 그대로 있는 한, 한국불교의 정상적인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로부터 한용운 김법린 등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政敎分離」 즉 사찰령폐지 운동과 교단 자체의 체질개선운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기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실천되지는 못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조선불교혁신론󰡕을 발표하고 이를 관철시켰으니 소태산의 깨침 이후의 삶 전체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소태산은 깨달음을 통해 개벽세계를 알리고 개벽시대의 종교상과 인간상을 제시한다. 깨달음의 전달은 시대에 맞고 대중적이며 개방적이어야 함과 생활 속에서 사실적 방법을 통해 복락이 추구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저축조합운동이나 간석지 개척사업은 당시 민중들에게 일반적이었던 미신적 구복신앙을 사실적 신앙으로 이끈 구체적인 예이다. 즉, 실생활에서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땀흘려 일하고 노력할 때 비로소 복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산교훈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깊어진 신뢰는 법인기도(法印祈禱)의 원동력이 된다. 법인기도(1919. 7. 26)는 동맹기도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는데, 이에 참여한 9인 제자는 개개인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와 그 시대 일체중생을 향한 기도를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짖눌린 조선, 그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지역의 촌부들로 하여금 개벽시대를 건설하는 주역들로 떨쳐 일어서게 한다. 그러므로 법인성사는 이웃의 고난과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는 널은 안목의 열린 인간으로 탄생하는 원불교적 삶의 표준이 제시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緣起論적 안목은 원불교 개교 이후 일체존재를 서로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천명한 恩사상으로 구체적 범주를 들어 설명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초기 신앙 공동체적 시기를 지나 제도 정착기에 들어서서 물질이 개벽되는 시대에 일반인들로 하여금 정신이 개벽 주체가 되도록하는 삶을 교리적으로 제시한다. 대종사는 스스로 체험한 깨달음의 경지를 일원상으로 상징한다. 일원상은 우주의 근본원리요, 모든 성자가 깨친 진리이며, 중생의 본래 마음인데,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하여 그 위력을 얻고 그에 합일하는 것이 원불교인의 삶이다. 결국 지금의 원불교는 바로 불교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 불교개혁운동의 이념과 성격


소태산의 불교개혁운동의 이념은 󰡔불교혁신론󰡕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소태산은 󰡔조선불교혁신론󰡕의 총론에서 불교혁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불교를 말하면 老大종교로서 세계적 종교가 되었는지라.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넓은 세상에 있는 불교를 다 말할 것은 없으나 조선 불교에 있어서는 폐단을 대강 알고 발전을 하기로 하는 지라. 외람이 이로써 혁신의 내력을 말하자면, 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 과거의 불교를 현재와 미래의 불교로, 산중 승려 및 몇 사람의 불교를 일반 대중의 불교로 혁신하되 부처님의 설하신 무상대도는 변치 아니할 것이나, 세간 출세간을 따라서 세간 생활에 필요한 인생의 요도를 더 밝혀야 할 것이며 모든 교리를 운전하는 제도와 방편도 시개와 인심에 따라서 쇄신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조선불교혁신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불교개혁의 방향은 「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 「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분열된 교화과목을 통일하기로」, 「등상불 숭배를 불성일원상으로」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개혁은 그의 전 생애와 원불교사상의 체계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불교개혁운동의 성격은 시대화․대중화․생활화한 혁신불교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태산이 깨침을 얻은 후 스스로 얻은 결론은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22)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의 깨침에 바탕하여 볼 때 불법(佛法)이 무상대도임을 확신하고, 그러한 불법을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살려내기 위해서는 당시의 불교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함을 철저히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불법이 무상대도임을 확신하게 된 데에는 첫째, 근본진리와 수행의 길이 탁월했다는 점과 둘째, 앞으로 불교가 세계적인 주교(主敎)가 되리라는 전망에서 비롯되어 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종사는 구한말의 미신적이고 타락한 불교를 혁신하여야만 이러한 불교의 본모습이 드러날 수 있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소태산의 불교개혁운동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불상숭배의 허구성과 불공법의 비합리성으로 구성된 신앙의 비진리화 경향을 소태산은  법신불 일원상 신앙과 실천불공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 제도나 수행방법에 있어서 종파간의 분화와 대립을 지적하고 이의 개혁안으로 모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세째, 출세간적인 불교에서 세간을 떠나지 않고 불법을 활용할 수 있는 공부법을 제시하였다. 이는 在家 出家의 구별을 없애고 사부대중이 하나되는 불교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네째, 소태산의 불교개혁운동은 비단 불교개혁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유불선과의 회통은 물론 모든 종교와의 회통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는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Ⅳ. 정혜결사운동과 불교개혁운동의 의의


보조 지눌과 소태산 대종사는 비록 그들이 산 시대는 다르나 당시의 타락되고 잘못된 불교를 정법불교로 개혁하려는 노력으로 한 평생을 진력하였던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철저한 구도적인 과정을 통하여 깨침을 이루고, 바른 깨침을 바탕으로하여 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의 문을 펼친 점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53세의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간 것도 우연히 일치하는 공통점이기도 한다.

 

소태산 대종사에게 있어서도 지눌의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편찬한  󰡔불조요경󰡕에는 지눌의 󰡔수심결(修心訣)󰡕이 들어가 있다. 󰡔수심결󰡕은 지눌이 정혜결사운동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닦는 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즉 修心의 문제를 인간의 근본문제로 파악한 지눌이 그 구체적인 지침서를 내놓은 것이 바로 󰡔수심결󰡕인 것이다. 이러한 󰡔수심결󰡕을 대종사가 󰡔불조요경󰡕에 넣어 편찬한 이유는 바로 「마음을 닦는 길」이 수행인의 근본적인 길이라는 자각에서 일 것이다. 

 

21세기 국제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분명 혼란을 느끼고 있다. 비록 시대에 맞고 대중적이며 개방적인 새로운 불교를 표방하고 출발한 원불교이지만, 현재 닥친 새로운 물질개벽의 장 앞에서 대중성이 결여되고, 교단주의적인 형태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삶의 귀감이 되고 있는 지눌과 소태산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정보화 통신화의 변화는 분명 물질개벽의 새로운 장이다. 이러한 물질개벽은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앞으로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물질개벽의 상황이 우리의 정신을 통해 활용하여야 할 문제이지, 우리의 정신이 그에 맞추어 나갈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눌과 소태산의 경우 자신과 자신의 시대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을 초월한 인간보편의 문제에 고민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修心과 정신개벽이란 동일한 형태로 밝힌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이 운동에서 보이는 다양한 포용력도 배워야 한다. 

 

현대에 있어서도 보조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체계는 불교 수행인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사은․사요․삼학․팔조의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은 현대를 살아가는 수행인의 모범이 되고 있다. 왜 보조와 대종사의 가르침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일까? 그점은 바로 정혜결사운동과 불교개혁운동으로 나타난 바로 그 결사정신․개혁정신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들 두 운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밝히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할까 한다.

 

첫째, 구도자적 삶의 태도이다.

지눌과 소태산의 삶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철저한 구도자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운동 또한 이런 구도자적 삶의 자연스런 결과물일 뿐이다. 필자는 우리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이상적인 삶의 태도는 바로 「道에 합당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된사람」, 「못된 놈」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평가가 단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현실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이 둘이 아닌 세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삶의 가치를 현실지향적인 가치-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 개인주의-를 우위로 하는 서구적인 영향으로 인해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과 도덕의 조화를 꾀하는 삶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하며, 이러한 점을 지눌과 소태산의 구도자적인 삶의 자세에서 배워야 한다.

 

둘째, 수행의 근본은 마음을 닦는 길에 있다는 점이다.

지눌에게 있어 定慧를 같이 닦자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닦자는 것이다. 소태산에 있어서 「등상불 숭배를 불성일원상으로」 바꾸자는 의미는 부처는 곧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그 마음을 닦는 것을 근본적인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불법을 구하는 수행인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마음을 닦는 일을 근본으로 하여야 하며, 이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근본으로 하여야 하는가 하는 해답이 여기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셋째, 현재 자신의 삶에 요청되는 모순을 철저히 제거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

지눌은 그의 깨침에 바탕하여 고려시대의 인간과 그가 몸담고 있는 불교계의 문제를 직시하여 당시의 구태와 모순을 제거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정혜결사의 운동을 펼쳤다. 소태산 대종사 또한 그의 깨침에 바탕하여 당시의 구태와 모순을 제거할 불교개혁운동 즉 원불교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는 바로 현재 자신의 삶에 요청되는 제반 모순을 철저하게 고뇌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점이다.

 

넷째, 깨침과 자비의 통일적 정신이다.

지눌과 소태산의 결사 개혁정신은 바로 깨침에 그치지 않고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실천행을 일생을 통하여 구현했다는 점에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이론과 실천이 하나 되는 삶, 진리와 삶이 하나되는 길의 제시, 그리고 진리의 길에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운동을 펼친 이들의 삶의 태도야 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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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그 부친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불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뒤 병이 깨끗이 나았으므로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특별한 스승은 없었다. 자기가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모두가 스승이었고, 올바른 길을 교시해주는 이는 모두가 은사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불교사회의 종파대립적인 교육보다는 파벌을 지양하고 자유롭게 공부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의식의 극대화로 말미암아 재정의 궁핍과 승려의 타락상 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선종과 교종의 대립은 극심한 것이었다. 그는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선종의 가르침을 섭렵하였고, 그 합일점과 조화를 모색하였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선종에서는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법(心法)을 주장하면서 경전의 문자와 이론을 무시하였고, 교종에서는 경전법문만이 부처의 참된 가르침일 뿐 선은 중국에 와서 성립된 한 종파에 불과하다고 하여 정통불교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 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을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이원화된 선과 교의 근원을 밝히기 위하여 화엄종장(華嚴宗匠)들을 방문하여 교종의 수행방법을 물었으나 모두가 교리를 관하는 방편만을 말할 뿐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지(禪旨)와는 매우 거리가 있어 마음으로 수긍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스스로 3년동안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 華嚴新論》을 열람하다가 “보살은 십신위(十信位)에서 자기 성품 중에 있는 근본부동지(根本不動智)·보광명지(普光明智)를 깨달아 십주초위(十住初位)에 들어간다. ”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또, “몸은 지혜의 그림자요 국토 또한 그러하다. 지혜가 깨끗하면 그림자도 맑아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용납됨이 인타라망(因陀羅網)과 같다. ”고 한 문구에 이르러 책을 덮어두고 탄식하기를,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할 것인가. ” 하였다.

이때 그는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인도적인 교와 중국적인 선을 함께 회통함으로써 새로운 지도체계를 세웠고, 말법학도(末法學徒)를 위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또한, 그는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 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마치 원수처럼 등을 지고 있던 종래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뒤 이때의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아 《원돈성불론 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고, 실천의 방면에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베풀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일융화라는 전통을 남기게 되었다.

1188년 봄,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하였던 득재선백(得才禪伯)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전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사람을 시켜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1190년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거조사로 옮겼다. 결사를 약속한 동지를 모은 뒤 사명(社名)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장편의 취지문을 지어 선포하였다. 이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하였다.

이 정과 혜의 두가지는 일심 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적등지(惺寂等持)라는 표현을 많이 쓰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고 적을 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불교에로의 복귀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 8년째 되던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대중들 중, 엄격한 절제생활을 기피하면서 시비를 일으키는 한 무리가 있어 그는 이들을 교화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기의 도덕과 법력의 부족이라 생각하며 물러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숨어서 홀로 선정을 닦기로 작정하고 대중의 교화 및 사람들과의 교제 등을 피하고 오직 생각도 없고 집착도 없는 적정삼매(寂靜三昧)의 경지에 안주하여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였다.

그때 송나라 대혜종고(大慧宗#고18)의 《어록 語錄》을 열람하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여의치 않고 참구해야만 한다. ”라는 문구에 이르러 홀연히 눈이 열리면서 본분(本分)을 활연히 체득하였다. 이때의 심경을, “내가 보문사 이래로 10여년 동안, 일찍이 방심한 일 없이 마음에 만족한 수행을 하여왔건만 오히려 정견(情見)을 놓아버리지 못한 채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보다가 홀연히 눈이 열리어 당장에 안락하여졌다. ”고 뒷날 술회하였다. 이로써 그는 세번째의 심기일전을 한 것이다.

그뒤 그의 도력을 좇아 모여드는 수행인들이 차츰 많아지자, 새로운 결사의 도량을 구하고자 제자 수우(守愚)로 하여금 낙동강 이남의 절을 찾아보게 하였다. 이때부터 머무른 절이 송광사(松廣寺)이다.

1205년(희종 1) 지리산에서 송광사로 와서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큰 법회를 베풀었다. 이때 《대혜어록》 30권을 강설하였고, 대중의 지도는 주로 대혜선사의 간화선법(看話禪法)으로써 하였다.

1109년 당나라 규봉종밀이 찬술한 《법집별행록 法集別行錄》을 절요(節要)하고 사기(私記)를 부연하여 《법집별행록병입사기 法集別行錄竝入私記》 1권을 저술하였다.이것은 불법을 공부하는 자가 먼저 부처와 조사의 진실한 가르침에 의하여 올바른 지견을 선택한 다음, 그 이론과 지식을 놓아버리고 자기 마음을 반조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길을 찾으면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즉, 교와 선을 따로 나누어 보지 말고 부처와 조사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여 참선하면 그 요령을 얻게 된다는 선교상자론(禪敎相資論)을 펴고 있으며, 문자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간화선법을 취하라고 가르쳤다. 이 글은 지눌이 수행자들을 위하여 남긴 최후의 수행지침서이기도 하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세번 치고,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 ”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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