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역사속사건

한양천도

작성자그림9|작성시간10.02.17|조회수543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의 한양천도에 관한 기록

 

백제의 근초고왕이 375년에 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했다.


세종지리지의 경도한성부에 실린 내용을 보면 지금의 서울은 삼국시대인 고구려로 거슬러간다. 기록에 ‘경도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니 일명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다.’라는 기록과 백제의 최전성기에 왕권강화와 정복사업을 통해 강력한 국가기반을 구축한 근초고왕(?~375)은 ‘372년에 남한성(南漢城: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부터 이곳 북한산군(北漢山郡:지금의 서울)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삼국시대의 기록을 뒤로하고 고려 초에는 북한산군(北漢山郡)양주(楊州)로 고치고 고려숙종(문종8년,1054년~숙종10년,1105년)은 재위4년 9월에 이곳을 답사한 후 ‘양주(楊州)목면장(木覓壤:지금의 서울 남산근방)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는 고려숙종5년(1100년)에 시작하여 숙종9년(1104년)에 끝났다. 공사가 끝난 후 숙종이 친히 와서 살펴보고 양주(楊州)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다. 이 후로 현재의 서울은 개경(개성), 동경(경주) 등과 함께 남경(서울)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고려삼경이다. 고려의 인종부터 공민왕까지 모든 왕이 순행하면서 이곳에 정기적으로 일정기간 머물렀다. 충렬왕34년(1308)에 다시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부윤 판관을 주재시켰다. 그 후 공양왕2년 (1390)에는 한양부(漢陽府)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이곳의 별궁을 수리한 일이 있었다. 당시 참위설(讖緯說)에 근거하여 수도를 이전하지 않으면 역성혁명이 일어난다는 설을 믿고 천도를 결심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성계의 위하도회군으로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태조는 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1392년 음력 7월 6일 조선을 건국하고 초대 왕(태조)으로 등극했다. 태조는 왕에 오르자 1392년 음력 8월 13일 도평의사에게 명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명한다[O敎都評議使司移都漢陽]. 그러나 수도이전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모든 명문 대족들이 개경에 터를 두고 있었고, 500년간 개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반시설들을 일시에 정지하고 수도를 별 준비 없이 옮기는 것은 국가의 기틀을 흔드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반대에 부닥치게 되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한양(南京)은 국토의 중앙지점인데다가 지리적으로도 무수한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개경 및 동경(지금의 경주)과 함께  고려숙종(1104년)은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한 이후, 1390년까지 186년간 고려왕들이 순행하면서 장기간 머물고 정사를 펼친 제2의 도읍지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고  공양왕(1390년) 때는 남경(서울)으로 천도를 계획할 만큼 기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실록 태조1년 (1392)9월 3일 기사를 보면 태조는 바로 수도를 한양(서울)으로 이전하기를 바랐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시중 배극렴과 조준이 아뢰기를 “한양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해서 -<중략>-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보면 왕이 정말 머물 곳도 없는 곳으로 천도를 명하고 독촉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고려 186년간 실질적 제2의 도읍지로 이를 정도의 상당한 인프라가 이미 부족하지만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근거가 있었음을 짐작한다. 이렇듯 급하게 천도를 준비하고 있는 과정 중 갑자기 왕이 계룡산(鷄龍山)에 행차하여 도읍을 정하고 역사를 재촉하는 황당한 기록이 전한다.


복서(卜筮)에 통달한 권중화(權仲和)의 말을 듣고 계룡산(鷄龍山)에 도읍을 정한바 있다.


태조2년(1393)2월1일 기록에는 이른 새벽 왕이 계룡산(鷄龍山)으로 행차할 준비에 바빴다. 이것은 전달에 복서(卜筮)에 통달했다는 권중화가 계룡산(鷄龍山)이 도읍지로 최적이라고 상언하여 이곳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왕의 이런 거동에 불편해 하였다. ‘지중추부사 정요(鄭曜)가 도평의사사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가지고 와서 현비(顯妃)가 병환이 나고 평주(平州: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평산군)와 봉주(鳳州: 황해도 은파군과 봉산군) 등지에 초적(草賊: 草野의 적이라는 뜻으로 亂民을 일컫는 말)이 있다고 아뢰니 임금이 불쾌해하면서 말하기를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들이 함께 싫어함으로 구실로 삼아 이를 중지시키려한다. 재상은 송경에 오래 살았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만으로 해결되겠는가?”하니 좌우에 모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때 이미 왕은 계룡산(鷄龍山)에 마음이 이르렀고 중신들은 왕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도읍할 땅을 왕이 정하시면 따르겠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왕은 또한 쐐기를 박듯이 말하는데 “그렇다면 정요(鄭曜)를 처벌한 뒤에 가자”하니 남은(南誾)이 아뢰기를 어찌 정요를 처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마침내 길을 떠났다. 일행은 청포원의 들판에서 유숙했다.’ [O上曰 然則必罪曜 而後行 誾曰 何必罪之 上遂行 至靑布院之郊留宿] ‘어가는 2월5일 청주에 이르고 2월 8일 계룡산(鷄龍山) 밑에 이르렀다.’[O庚辰/至淸州, O癸未/至鷄龍山下] 8일 만에 계룡산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왕은 도읍의 산수와 형세를 직접관찰하고 성곽을 축조할 지세도 살폈다. 2월10일에는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줄로서 땅을 측량케 하였다. 2월11일에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 지세를 살피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능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O駕登新都中心高阜 周覽形勢 問王師自超 以不能知對] 2월13일 계룡산(鷄龍山)을 떠나면서 신도의 건설을 추진할 것을 명하였다. 계룡산(鷄龍山)을 떠나 2월14일 청주를 거처 2월27일 개경에 도착했다. 계룡산(鷄龍山)에 머문 것은 5일간(8일~13일)이지만, 계룡산(鷄龍山)을 살피기 위해 왕이 개경을 비운 것은 근 한 달(1일~27일)이다. 이렇게 긴 시간 왕도를 비운 것은 개경을 버리고 천도할 의지가 그만큼 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태조는 국가적 대사인 천도계룡산(鷄龍山) 밑으로 정하고 국가의 행정구역도 81개의 주, 현, 부곡 등을 획정하였고[O己巳/定鷄龍山新都畿州縣 部曲 香蔬 凡八十一] 새 도읍의 역사를 위하여 역인과 공장들을 모았다. 드디어 8월5일 새 도성의 역사가 계룡산(鷄龍山)에서 시작되었다[O戊寅/始都城役]. 왕이 계룡산(鷄龍山)을 둘러보고 개경에 돌아온 지 불과 5개월이 지난 후이다. 사실은 왕이 계룡산(鷄龍山)에 가서 보고 그대로 역사를 진행할 것을 명하였으니 얼마큼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는 힘 있는 왕치제도하에서는 의론이 오래 갈 이유가 없었든 것일까? 11월29일까지 계룡산 하(鷄龍山下: 현 신도안면)에 도읍의 기초공사를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11월 29일에도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를 계룡산(鷄龍山)의 신 도읍지에 보내어 공사를 독려한다. 하지만 국가적 대사를 한, 두사람의 의견을 듣고 왕이 결정을 지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던가? 결국 계룡산(鷄龍山) 천도는 여러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계룡산(鷄龍山)의 새 도읍지로 지정된 곳은 지금의 계룡시의 신도안면이다. 조선시대의 명칭으로는 진잠현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건설중인 세종시와 인접해 있고 공주, 대전의 중간 지점이 되는 곳이다.

 

 계룡산(鷄龍山) 역사는 중단되고 도읍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경기좌우도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륜(河崙)이 1393년 12월 11일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 온데, 계룡산(鷄龍山)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국토의 동쪽 끝)·서면(국토의 서쪽 끝)·북면(국토의 북쪽 끝)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鷄龍山)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 正北과 正西의 사이)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正東과 正南 사이)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고 상언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왕은 즉시 대장군(大將軍)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계룡산(鷄龍山) 신도공사를 중단시키고 새로운 신도 후보지를 물색할 것을 명한다. [○壬午/遣大將軍沈孝生如雞龍山, 罷新都之役 京畿左右道都觀察使河崙上言: 都邑宜在國中  雞龍山地偏於南, 與東西北面相阻 且臣嘗葬臣父, 粗聞風水諸書 今聞雞龍之地, 山自乾來, 水流巽去, 是宋朝胡舜臣所謂水破長生衰敗立至之地, 不宜建都] 10여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계룡산(鷄龍山)의 신도공사는 중단되고 역군들은 모두 방면되었다. 신중하지 못한 국가적 역사로 엄청난 국고와 공역이 낭비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이듬해 태조3년(1394) 2월28일 하륜의 천거로 조준, 권중화 등 11인에게 무악을 살피도록 했는데 권중화와 조준이 무악(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일대) 천도를 반대하고, 하륜만이 찬성하였다. 6월27일에는 서운관 관원들도 무악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니, 8월11일에는 왕이 직접 무악에서 지세를 살피고 들판에서 유숙했다. 이 때 도읍으로 추천된 지역이 여럿 나왔는데 개경(開京:지금의 개성)이 아직 그 기세가 남아있으니 그대로 도읍을 지키자는 것과 이미 역사를 중단한 계룡산(鷄龍山)은 지난일이지만 인접한 부소(扶蘇:지금의 공주)와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이 거론 되었다. [一國之內, 扶蘇明堂爲上, 南京次之  是夕, 上次于毋岳下] 또한 적성 광실원(京畿道 坡州市 적성면)이 좋다는 의견도 나왔는데 조운(漕運:운하수송)이 불가하다는 왕의 반대로 의론이 중단되었다. 이때 나온 의견 중에 왕사 자초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한양(漢陽府)을 도읍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태조3년(1394) 10월 28일 서울로 부분천도가 이루어지다.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하니 왕지(王旨)로서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都評議使司所申: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等竊惟-<중략>-竊觀漢陽, 表裏山河, 形勢之勝, 自古所稱, 四方道里之均, 舟車所通。 定都于玆, 以永于後, 允合天人之意” 王旨依申]. 드디어 1394년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9월 9일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한다. 10월 25일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아 행정기관의 일부를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드디어 10월28일 한양(漢陽)에 이르러 옛 한양부(漢陽府)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고[○甲午/至新都, 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 왕이 업무를 시작했다. 이것을 두고 양경제(兩京制)라 이른다.(일차 한양천도:1994년부터 도읍600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서울시민의 날로 정함)


태조4년 1395년에 경복궁이 완성되고 왕이 경복궁에 들다.


태조4년(1395) 6월 6일 한양부(漢陽府)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태조는 날을 받아 즉위 4년인 1395년 9월 29일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윤9월 1일 개성으로 부터 조상의 신위를 옮겨 모실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을 설치했다. 10월 7일(정유) 에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12월 28일(정사) 태조는 새 궁궐 경복궁에 들어갔다. 다음해인 태조5년(1396)에도 신도의 조성사업은 계속되어 도성과 4대문 4소문이 완성되고 명실상부한 수도로소의 면모를 갖추었다.


 정종은 도읍을 개성으로 다시 환도했다.


태조7년(1398)8월26일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이 당시 세자인 이방석을 귀양 보내고 도중에 살해했다. 이방석의 동복형제인 이방번도 함께 죽임을 당한다. 이방석을 도왔던 정도전·남은·심효생 등 개국공신들도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이방과(정종)가 세자를 이어받았다. 이 충격으로 태조는 왕위를 이방과(정종)에게 넘기고 은퇴하여 함흥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정종은 왕이 되자 바로 도읍을 개경으로 환도 했다. 개경(송경)으로 도읍을 옮길 뜻을 가진 정종은 “고려 태조의 지혜로서 여기에 도읍을 세운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한다. 실록에는‘정종 1년(1399 ) 3월 7일(무인) 정종은 뜻을 이루어 개경의 유후사(留後司*구도 개성 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 본래 고구려 의 부소갑(扶蘇岬) 이다.고려의 400년 수도 개성,지금의 개성지역은 고구려시기에 동비홀(冬比忽)과 부소갑(扶蘇岬)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후기신라 때에 동비홀은 개성(開城)으로, 부소갑은 송악(松岳)으로 고쳐졌다. 고려 건국 후 919년 개성과 송악이 통합되어 개주(開州)가 되면서 고려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 개성은 개경, 황도, 황성, 경도 등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주로 송도, 송경, 중경, 개성이라고 불리웠다.<백과사전>)로 환도(還都)하니, 공후(公侯)는 모두 따르고, 각사(各司)에서는 반씩만 따랐다. 태상왕(태조)이 거가(車駕)를 움직이니,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과 각사의 관원 한 사람씩이 따랐는데, 길이 정릉(貞陵)을 지나니, 두루 살펴보고 머뭇거리면서 또 태조가 말하기를“처음에 한양(漢陽)으로 옮긴 것은 오로지 내 뜻만이 아니었고, 나라 사람과 의논한 것이었다.”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갔다.’[○戊寅/還于留後司, 公侯皆從之, 各司半焉 太上王動駕, 懷安君芳幹及各司一員從之 道過貞陵, 周觀趑趄, 且曰: “初移漢陽, 非獨吾志, 與國人議之也。” 掩涕而去]는 기록에서 태조는 한양(漢陽)으로의 천도가 얼마나 어렵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1차 왕자의 난으로 가장 사랑하는 두 아들(방석과 방번)을 잃게 된 것을 참담하고 슬프게 생각한 것이었다. 이 때 태조 이성계의 나이 65세였는데 힘을 잃고 고민하는 모습은 애처롭다. 처음부터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공을 크게 세운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더라면 이런 큰 분란은 없었을 것이다. 태조는 계비인 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석을 나이 12살 어린 나이 때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공을 세운 형제들의 시기를 사서 결국 이방원이 난을 일으키게 되고 17살의 어린 나이로 동복동생 방번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태조 이성계가 사람을 보는 눈이 흐려 있었던 것은 아닌지 역사에 안타까움과 교훈을 주기도 한다.


태종5년(1405)10월 11일 왕(태종)이 한양으로 와서 종묘에 알현하고 천도를 고하다.


정종2년(1400년) 1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이러났다. 태조의 4남이자 이방원의 동복형인 이방간(李-芳幹/?~1421(세종 3).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넷째 아들)과 이방원(李芳遠/1367(공민왕 16)~1422(세종 4))의 전쟁으로 기록되는 이 전쟁에서 이방원(李芳遠)이 승리하고 11월에 왕이 되고 태종이라 했다. 왕이 되자 태종은 한양(漢陽)으로 재 천도를 바랐으나 개경에 근거를 둔 관료들은 여전히 개경에 머물기를 바랐다. 신료들은 심지어 양경제(兩京制)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조가 태종에게 계속해서 한양(漢陽)으로의 천도를 건유함으로 태종 4년(1403)왕사 무학 하륜의 무악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한양(漢陽)천도를 결심한다. 태종5년(1405)2월1일한양(漢陽)에 도착하여 2월에는 이궁(창덕궁)의 규모를 획정학고 이궁조성공사를 실시한다. 태종은 2월 28일까지 한양(漢陽)에 머물다가 개경(송도)로 돌아왔다. 한양(漢陽)천도를 결심한 태종이었으나 계속적인 반대에 부닥친다. 8월3일에는 환도의 가부를 의정부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으나 흉년으로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 태종은 “한경(한양)은 부왕(태조)께서 개창하신 땅인데 기묘년(1399)에 조박이 상왕(정종)에게 청하여 갑자기 송도에 와서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죄는 (조)박에게 있다”[[○丙寅/命議政府, 議遷都漢京可否, 議政府對以年飢不可。 上曰: “陰陽書曰: ‘王氏五百年後李氏興, 遷南京’ 今李氏之興果然, 遷南京之說, 不可不信也。 且向者相地之時, 說者紛紜未定, 予乃躬詣宗廟, 卜旣得吉, 離宮已成, 遷都之計定矣。 將以十月移于漢京, 本宮則當不御也。” 謂左右曰: “漢京是父王開創之地. 歲己卯, 趙璞請于上王, 遽來松都, 至今未還, 罪在璞矣”]하고 왕이 크게 경계하는 말을 하였으나 반대의 세력은 만만하지 않았다. 10월천도를 하겠다하고 8월9일 이제 본궁에 거처하지 않고 경덕궁으로 옮겼다. 경덕궁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다. 조정에서는 다시 한양(漢陽)으로 천도를 의논하는데 왕이 말하기를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새 도읍(都邑)을 창건(創建)하시었으니, 이것은 이씨(李氏)의 바꿀 수 없는 정도(定都)이다. 우리 상왕(上王)께서 송도(松都)로 옮겨 오신 뒤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지금 7년이나 되어, 아버님이 시작하고 아들이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어긋났으니, 과인(寡人)의 죄이다. 지난 가을에 송도(松都)에 음려(陰沴*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잃어 음기(陰氣)가 치성한 나머지 천지 사이에 일어나는 재해.)의 재앙(災殃)이 있기 때문에 신도(新都)에 가서 종묘(宗廟)에 점쳤더니, 이미 길(吉)한 것을 얻었고, 금년 봄에 또 가서 수즙(修葺*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이는 일)하는 것을 보았더니, 공사가 거의 끝났으니 옮겨 갈 계책이 정하여졌다. 소민(小民)과 거실(巨室)이 모두 불가(不可)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살고 있는 땅을 편안하게 여기고, 딴 곳으로 옮기기를 싫어하는 뜻이다.” 하고 의지를 못 박았으나 영의정 상경이 옛 은나라의 17대왕 반경의 예를 들면서 옮기기를 미루기를 청한다. 이에 왕은  “금년에 옮기지 않고 명년에 또 옮기지 않아서, 그럭저럭 옮기지 못하면, 송도(松都)의 인가(人家)는 날로 더욱 조밀하여지고, 한읍(漢邑)은 날로 더욱 조잔(凋殘)하고 황폐하여질 것이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물며, 음양가(陰陽家)가 말하기를, ‘송도는 군신(君臣)의 분별이 없어지는 땅이라.’한다. 사람들이 모두 ‘흉년이 들어서 옮길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흉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풍해(豊海)와 경기(京畿)는 비록 한재(旱災)가 있으나, 그 나머지 각도(各道)는 흉년이 아닌데, 흉년이라고 말하여 천도(遷都)하려는 뜻을 배격하는 자는 사직(社稷)을 사랑하지 않는 신하이다.”하고 얼음장을 놓았으나 남재가 무리하다는 의견을 올린다. 그러나 태조에게 환도를 고한 태종은 계획대로 천도할 것을 진행하여 9월 29일에는 국사를 한양경복궁 근정전으로 옮기고 10월1일에 인소전(仁昭殿:태조비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신도를 한양(漢陽)으로 옮길 것을 고했다. 태종은 드디어 10월 11한양(漢陽)에 이르러 종묘에 알현하고 연화방 고(故) 영의정부사 조준의 집에서 이궁(10월25일 창덕궁이라 명명)이 완성되는 10월 19일까지 머물고 10월20일 이궁(창덕궁)에 들었다. 6년 만에 한양으로 재 환궁한 것이다.


태상왕 태조가 태종5년(1405)11월 6일 한양으로 돌아옴으로 사실상 천도의 꿈이 실현되었다..


 1938년 1차완자의 난으로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함흥으로 들었다. 이 후 2차 왕자의 난으로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태종은 여러 번 함흥에 은거하는 태상왕을 모셔오기를 바랐으나 오지 않다가 1401년 4월 일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1402년 11월 다시 한양을 떠났다가 12월 다시 개경으로 귀경하였다. 1405년 한양으로 환도한 후 태종은  11월6일 태상왕을 견주(현 양주읍 고읍리)에서 맞이하였다. 태상왕인 태조가 이르기를 “양도(兩都:개경, 한양)에 내왕(來往)하여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편히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부터는 〈한군데〉 정(定)해 살 수 있겠는가?”하니 왕은 차질 없이 하겠다고 답하였다.

비로소 한양천도가 완료되고 안정적으로 정치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 1392년 음력 8월 13태조가 한양천도를 계획한 후 1405년 11월 6일 사실상 모든 천도가 끝났으니 13년 3개월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소요되었다.(2차 전면 환도)

 

 

양경제(兩京制)는 오랜 시간 운용되었다.


상고했듯이 고려시대에는 오랜 기간 양경제가 운용되었고 특히 개경과 남경의 이경체재는 오랜 역사와 국가운영의 기틀이 되었다. 숙종9년(1104년)부터 공민왕4년(1392년)까지 188년간 양경제로 나라를 운영하였던 정황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도 태조원년(1392년)에서부터 태종 5년(1405년)까지 개경과 한양의 양경제로 운영되었다고 보인다. 태조가 말했듯이 양도는 백성의 생업에도 큰 차질이 있었다는 것을 회고하면 양경제도는 효율적 국가 운영체재는 아닌 듯하다. 또한 10여개월 동안 계룡산의 신도공사가 진행되었고 역군들은 전국각지에서 공역으로 참여했다. 신중하지 못한 국가적 역사로 엄청난 국고와 예산이 낭비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고 태조는 상고했다. 또한 양도(兩都:개경, 한양)에 내왕(來往)하여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편히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부터는 한 곳으로 정(定)해 살 수 있겠는가?라고태조는태종에게 강조했다.

 

참고문헌

세종지리지. 조선실록

 

 

...............................박정주(朴正柱)작성>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