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
호족이란 신라말과 고려초의 지방세력을 일컫는 말로 신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정권다툼에서 패배한 중앙귀족,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 해상세력, 지방군진세력, 초적 등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라를 붕괴시켜 중세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을 촉진시켰으며, 신라말과 고려초 지방사회와 정치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그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여 성종대(재위 981∼997) 이후 일부 세력은 중앙의 관리층으로 흡수되고 대다수 지방세력은 향리층으로 전락하였다.
견훤
시 대 : 후백제
생 몰 년 : 867년(신라 경문왕 7)~936년(고려 태조 19)
본 관 : 황간
관련전투 : 고창전투(古昌戰鬪) 공산전투(公山戰鬪) 조물성전투(曹物城戰鬪)
신라의 장군 출신으로 후백제의 건국자.
재위 892~935.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으며 황간견씨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고기>에는, 전라도 광주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혼인하여 낳았다고 전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기록이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과 남원부인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로서, 동생으로 능애·용개·보개·소개와 누이 대주도금이 있었다.
자랄수록 용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 비장이 되었다. 이때는 신라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하여 점거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였다.
918년,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이후 견훤은 고려와 잦은 세력다툼을 벌이게 되었는데,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가 924년(고려 태조 7)에 일어난 조물성전투였다. 조물성은 낙동강 상류의 안동과 상주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되는 전략적 요지의 하나로,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 등을 보내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장군 애선과 왕충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하였는 바, 애선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 조물성 안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견훤은 이기지 못하고 철군하였다.
이후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세력을 키운 견훤은 927년 근품성(지금의 상주)을 공격하고 고울부(지금의 영천)를 습격하였다.
이어서 경주로 진격하여 포석정에서 신라의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이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다. 이 소식을 접한 고려 태조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자 견훤은 이를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맞아 대파하고, 고려의 장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태조는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였다.
견훤은 여세를 몰아 929년 고창(지금의 안동)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고려 장군 유금필의 공습을 받아 8000여인의 사상자를 내는 패전으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고창전투에서의 패배로 경상도지방에 미치고 있던 견훤의 세력을 일시에 소멸되고 결국 고려에게 주두권을 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10여인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신검(神劍) 일파에게 935년 3월 금산사에 유폐당하고 금강은 죽임을 당하였다.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 딸 쇠복, 첩 고비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 맞이한 뒤, 가장 높은 벼슬인 상보의 지위와 양주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그 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하여 멸망하고,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쌓인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는 창질이 나서, 연산의 황산사에서 등창으로 죽었다.
시 대 : 태봉
생몰년 : ?~918년(고려 태조 1)
신라의 왕족으로 군사를 일으켜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왕.
통일신라 말기 신라왕실의 쇠약으로 지방 호족들이 대두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큰 대우를 받지 못하자,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양길로부터 군사를 지원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 지금의 평창)·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지금의 인제)·부약(夫若:지금의 김화)·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는 등 군세가 매우 강성해지자, 패서(浿西) 지역의 무리들이 속속 투항해왔다.
이어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뒤, 896년경 임진강 연안을 공략하여 개성 일대를 주무대로 삼던 왕건(王建) 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僧嶺: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임강(臨江:지금의 장단) 등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孔巖:지금의 양평)·금포(黔浦:지금의 김포)·혈구(穴口:지금의 강화) 등을 복속시켰다. 899년(효공왕 3)에는 송악군을 수리하고 왕건을 보내어 양주·견주(見州)를 수중에 넣었다.
그 다음해에도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마침내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그해 7월 청주인 1,000여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 서울을 정하고 상주(尙州) 등 30여 현을 얻었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聖冊)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鎭)을 평정한 바 있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후 궁예는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나주정벌을 하는 한편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왕건을 추대한 신하들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궁예는 왕위에서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태봉을 건국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훗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 데 주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왕건
시 대 : 고려
생몰년 : 877(헌강왕 3)~943(태조 26)
자 : 약천(若天)
시 호 : 신성(神聖)
관련전투 : 조물성전투(曹物城戰鬪)
고려 태조로 후삼국을 통일한 왕. 재위 918년~943년.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륭(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이 해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에서 왕위에 올라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이흔암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 당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24년 7월 고려와 후백제의 군사력 우열을 가리는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조물성전투가 그것이다. 조물성은 낙동강 상류의 안동과 상주 사이 지역으로 추정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전투에서는 피차 정예군이 총출동하여 대결하였으나 고려에서는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고, 후백제도 별 소득 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낙동강 유역에서 고려의 군사력이 커지고 신라와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자 후백제 견훤(甄萱)은 927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압박하였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의 고려군은 11월 대구 공산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였고,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포위 공격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대장 신숭겸, 김락 등이 사력을 다하여 왕건을 구출하고 그들은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안동에서 벌어진 930년의 고창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게 되어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 졌다. 마침내, 936년 9월 신검의 후백제군과 낙동강 지류인 일리천전투에서 최후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능은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소재 현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