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역사속사건

조선시대 회화의 흐름

작성자그림9|작성시간12.03.01|조회수1,490 목록 댓글 0

조선시대 회화의 흐름

 

조선시대에 가장 눈의 띄게 발전한 문화 분야는 회화이며, 조선시대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발전하였던 시대이다. 건국 초부터 도화원(圖畵圓)이 설치되었고 이 조직화된 도화서를 중심으로 다수의 훌륭한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회화미술이 꽃피게 되었다. 이러한 화원들과 더불어 사대부들이 이 시대 회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나무, 산수, 인물, 화초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졌으나 감상을 위한 산수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초상화는 동양의 삼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보다도 더욱 다양해졌고, 한국화현상을 더욱 뚜렷하게 이룩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현상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구도, 공간처리, 필묵법, 준법, 수기법등에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회화사적 흐름 살펴보면 보통 4기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다. 초기는 조선의 건국으로부터 중종연간(1550년경)에 이르는 안견화풍(安堅畵風)이 지배하던 시기이며, 중기는 이로부터 임진왜란 양란을 거쳐 숙종 연간(1700년경)에 이르는 약 150년간으로 이른바 '절파화풍'(浙派畵風)이라는 개성적인 화풍이 유행하던 시기이며, 후기는 숙종 연간으로부터 영·정조를 거쳐 순조 연간(1820년경)에 이르는 약 120년간으로 사실주의 화풍이 유행하던 시기이고, 말기는 순조 연간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하기까지 약 90년간으로 문인화의 유행과 매너리즘화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제 본론에서는 조선시대 회화의 역사적 배경과 그 중심에 있던 작가들 중 하나인 겸재정선의 활동, 그 작품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ㆍ조선시대 회화

 

조선 시대의 회화는 화풍의 변천에 따라 초기(1392∼약 1550), 중기(약 1550∼약 1700), 후기(약 1700∼약 1850), 말기(약 1850∼1910)로 나누어지는데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에는 고려시대 회화 및 그 시대에 전래되어 축적되었던 중국 역대의 화풍과 새로이 명으로부터 수용한 화풍 등을 토대로 중국이나 일본의 회화와는 다른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화풍상의 특징은 이 시대 작품들의 구도, 공간 개념, 필묵법, 준법 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조의 안견(安堅), 사대부화가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세종대왕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며 최대의 중국화 소장자이자 안견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 등이 활동하며 서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시기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 한국적인 특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 도원을 여행하고 꿈에 본 바를 안견에 명하여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4월에 제작한 것으로 조선시대 최대의 걸작이다. 일본 천리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몽유도원도」는 당시의 명사 20명이 찬문(撰文)을 자필로 쓴 작품으로서 시서화(詩書畵)가 함께 어우러져 당시의 문화적 경향과 역량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업적이다.

 

또한 이 작품은 안견파 화풍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몇 개의 산군들이 모여 총체를 이루는 구도, 넓은 공간의 설정, 사선을 이루며 웅장함을 자아내는 구성, 그리고 환상적인 세계의 성공적인 구현 등은 다른 나라나 전대의 한국회화와 두드러지게 다른 특색이다.

 

조선 초기에는 안견뿐만 아니라 사대부 화가로서 명대 절파화풍을 수용하여 대성한 강희안, 인물화의 최대 거장이었던 최경,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타고난 그림 재주 때문에 화원이 되었던 이상좌, 여성으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여성적인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하여 다방면의 그림을 그렸던 신사임당, 왕손으로서 천진난만한 강아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이암, 「달마도(達磨圖)」를 그린 김명국 등이 관심을 끈다.

 

조선 중기의 회화 역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대란과 격렬한 당쟁이 계속되던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한편으로는 안견파 화풍, 절파화풍등 조선 초기 이래의 전통을 나름대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모나 화조화(花鳥畵), 묵죽(墨竹), 묵매(墨梅), 묵포도(墨葡萄) 등에서 종래에 보기 드물었던 새로운 한국적 특징을 발전시켰다. 김제의「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김명국의「설중귀로도(雪中歸路圖)」, 이 정의 「묵죽도(墨竹圖)」등은 이 시대 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영조와 정조의 재위 연간을 전후하여 꽃피웠던 조선 후기의 회화는 정선에 의해 발전된 진경산수(眞景山水),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유행된 풍속화에서 특히 한국적인 특색을 농도 짙게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남종 문인 화풍이 크게 유행하였고 또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법이 전래되는 등, 전과는 다른 경향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밖에 이 시대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크게 풍미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금강전도」나「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등에서 보듯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있는 산천을 새로운 화풍으로 구사하여 그린 것으로 후대의 화원과 민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정선의 제자였던 심사정은 대담한 필선과 고아한 담채를 혼합한 우수한 기법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러한 정선파의 산수화들은 종전의 산수화와는 현저하게 다르며 또한 우리의 국토에 실재하는 산천을 묘사한 것이기에 특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대에 두드러졌던 자아의식, 여행 붐, 지도 제작의 활성화 등이 복합적으로 자극을 주어 진경산수화가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서민들의 생활의 전경을 주로 해학적으로 묘사한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 또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로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로맨스를 예리하게 파헤친 신윤복은 「미인도」등으로 풍속화에 더욱 한국적인 멋과 특색이 넘쳐흐른다. 이처럼 한국적인 화풍이 크게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면, 추사 김정희와 그를 추종하던 화가들에 의해 남종문인화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고 후기의 토속적인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김정희의 제자로서 호남화단의 기초를 다진 소치 허련과 함께 오원 장승업이 배출되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형성하고 제자들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등을 통해 현대 화단으로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화풍이 중국적 성향을 강하게 띤 점은 아쉽게 생각된다.

 

ㆍ겸재정선의 진경산수화

 

1. 시대적 배경

 

조선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큰 맥락은 임진왜란(1592∼1597)과 병자호란(1627∼1636)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역사로 나누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왜란과 호란의 겪어 국토가 초토화되는 상황에서 우리를 굴복시킨 여진족은 1644영 명나라마저 멸망시키고 중원에 청(淸)을 세워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대국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조선은 전쟁의 피해와 아울러 열악한 기후조건과 경제사정으로 17세기 내내 경제적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17세기 효종의 북벌정책(北伐政策)으로 청과도 좋은 관계에 있지 못하였으며, 18세기에 들어와서야 기후가 좋아지고 경제사정이 호전되면서 문화적인 여건도 나아지게 되었다.

 

18세기는 양대 전란(壬辰 1592, 病者 1636)의 상처를 씻고 당쟁의 진정책으로 말미암은 정치·사회·경제적 변동의 바탕 위에 왕권 중심의 권력기반을 재확립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분 질서의 해체, 자본주의 맹아론의 제기 등 근대를 향한 자체적 변혁의 움직임을 준비하는 시기로 평가된다.

 

또한 이때 이룩한 문화 발전은 경제성장을 토대로 한 봉건사회 해체기 내지 근대로의 전환기로 커다란 사회변동 속에서 다른 분야보다도 문화영역에서 의식변화와 미적 이상, 삶의 정취와 시대상황이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발산함으로 그 진로를 다진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 미술의 발전은 건축, 도자기, 목공예 금속공예, 불교미술, 민예나 민속미술 등에 이르기까지 다 방면에 걸쳐 이루어 졌고 그 중에서도 회화는 창작과 소비 등의 활동에서 어느 때보다 활발한 양상을 보였다. 이에 대해 18세기 후반의 권국진(權國珍)도 발전된 변화에 대해 "우리나라 서화의 울훙(蔚興)이 요즘같이 성한 적이 없다."고 말 한 바 있다.

 

이렇듯 조선의 회화는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안민을 위한 일련의 정책과 노력을 통해 변동된 사회적, 경제적 구조 위에서 시서화 창작 겸비와 서화고동(書畵古董) 소비 등을 핵심으로 한 문인문화의 확산으로, 17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 조류로서 크게 풍미한 문인주의와 탈속 심미적 문인의식 및 취향과 결부되어 그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 왕성한 활동을 보이게 된다.

 

또한 정치 경제적인 여건의 호전에 따른 지배 권력층의 상승국면을 타고 사대부 지식인층 문화의 활성화가 뒷받침되어, 이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나아가 당대의 모든 회화의 동향은 조선시대 봉건문화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조선 후기의 이러한 회화 활동의 양적 팽창은 이 시기의 개혁 또는 개항 의지와 밀착되어 기존 풍조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질적인 새로움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진경산수화 같은 창신적인 경향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2. 진경산수화의 특징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한국회화사의 흐름 속에서 일대 변혁이었다. 정선은 금강산과 서울 주변을 비롯하여 한국의 자연을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독창적인 표현의 진경산수화를 창출하여 한국회화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실경 표현이 한국 회화에서 '진경산수화' 라는 회화 장르로 발전 된 것은 국풍화와 함께 실경을 자신의 회화세계에 적극 투영시킨 정선과 그 이후에서이다.

 

정선의 출현으로 인한 진경산수화의 유행은 조선 후기 화단이 한국회화에 남긴 큰 업적으로 이는 전대의 전통화풍 계승이나 18세기에 새로이 부상한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유행 및 서양화풍의 유입 등 조선 후기의 여러 성향과 맥이 닮은 것이다. 특히 진경산수화가 남긴 업적은 이들 새 경향의 화풍들을 수용, 소화하여 한국의 경관에 어울리는 한국적 화법을 구축한 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당시 화단에 유행하기 시작한 피마준이나 미점(米點)등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浙派)화풍의 잔영도 엿보인다. 괴량감 넘치는 대부벽준 형태의 적묵암준법이 그 잔영이고, 거침없이 힘차게 내리그은 수직준법과 한 손에 붓 두 자루를 쥐고 그이는 양필법은 진경 표현의 정선식 화법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한마디로 든다면, 소재와 조형, 미감 등 그림의 모든 면에 있어서 나타난 '조선적 고유성과 토착성'이라 할 수 있다. 진경산수는 조성의 주체의식을 토대로 하여 자연과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남종화와 서양화법 등의 외래 그림까지 진취적으로 소화하여 우리식대로 풀어낸 고유성을 지닌 회화이다. 이는 민족적 주체성을 핵으로 하여 조선적 고유성과 현실적 사실성, 국제적 개방성의 다원적 요소가 조화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조선 풍과 개성적 독창성을 가능케 한 조선 후기의 회화 사상은 사실주의(寫實主義)정신이다.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한 계층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할 현실에 애정을 쏟으려는 풍조와 함께 주체적 문예의식이 싹텄다. 그래서 옛 것을 본받기보다 새롭게 창작되는 당대 문예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사대부 사회에서도 국정에서 소외된 세력이 성장하면서 현실 비판적 성향이 부상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실묘사력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세심한 대상 관찰을 통한 '실득(實得)'(윤두서)으로부터 살아있는 그림을 위해 현장 사생을 시도한 '즉물사진(卽物寫眞)'(조영석)으로 사실주의적 창작방식을 강조한 주장과 형상 묘사를 완벽하게 구현한 '곡진물태(曲盡物態)'(김홍도 그림에 대한 강세황의 평)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후기의 그림을 통해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산천을 대상으로 한 이 시대의 진경산수화풍은 이전부터 이어온 전통과 당대의 사회적 요구가 한데 어울려 이루어 졌지만 겸재 정선이라는 대가의 출현이 없었다면 그 발전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이 영향은 18세기 남종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데 앞장섰던 문인 화가들에게도 이어져 특히 문인화가들의 여기적 진경 작품은 격조있는 화격과 참신한 개성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강산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조성 후기 진경산수화의 발전을 다채롭게 하여 기행과 사경을 통하여 습득한 화법은 또한 남종화풍을 조선적으로 소화한 면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겸재 정선의 대표적인 작품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

분류:유물 / 일반회화/ 산수화/산수화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였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실경산수화일 뿐만 아니라 그 화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산수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의 400여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금강전도(金剛全圖)

국보 제217호

분류: 유물 / 일반회화/ 산수화/ 산수화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을 실제로 보고 그리는 실경산수화풍을 연 겸재 정선(1676∼1759)이 영조 10년(1734)에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3.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이념

 

진경산수화의 '진경(眞景)'이란 말은 그대로 실경을 뜻한다. 즉 실경산수를 말한다. 그런데 당대에는 실경보다도 '진경(眞景)' 혹은 '진경(眞境)'이라는 용어를 즐겨 썼다. '진경(眞境)'은 신선이 사는 곳, 깨끗한 땅이라는 의미를 가졌고 '진(眞)'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른 면 "{선인이 변형해 놓고 하늘에 오른 땅"의 뜻을 지녔다.} 로 보아 진경은 실경으로서의 단순한 경치뿐만 아니라 선경(仙境)의 의미까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경산수화는 일찍부터 동양권에서 발달한 산수화의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본래 산수화와 그의 대한 화론이 발달한 여우는 풍류적인 탐승과 속세를 떠난 심산유곡에 은일하려는 유·도가적 이상주의를 추종한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양의 산수화는 비록 관념적인 형식을 취한 듯하지만 실상 출발부터 실경적요소를 바탕으로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에도 이어져 '진경'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고 그 발달은 조선 성리학의 완성과 관련이 깊다.

 

17세기 여진족이 동북아시아 문화의 중심이었던 명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지매하게 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붕괴되는 큰 충격을 겪게 된다. 이에 대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 성리학을 토대로 새로운 이념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즉, 명의 멸망과 청의 건국으로 동북아시아 문화의 주체가 소멸되고 붕괴되었으므로 이제 전통적인 동북아시아 문화의 핵심인 성리학과 예학이 가장 발달한 조선이 새로운 문화의 중심이요 주체라는 '조선중화사상'의 문화적 화이론이 그것이다.

 

영·정조 땐, 청조가 들어선 가운데 명나라의 법통을 유지하려는 주자학적 종본주의(宗本主義) 혹은 조선 중화사상의 입장을 취한 서인-노론계의 권력 장악이 이루어진 후이다. 이런 변화와 성리학적 원론에 대한 심취는 진경산수의 발전과 연계된다. 즉 선계(仙界)다운 절경을 담은 18세기 진경산수의 배경에는 조선 선비들의 기행 탐승하는 풍류적 성향 및, 이이의 석담구곡(石潭九曲), 송시열의 화양구곡(華陽九曲), 김수증의 곡운구곡(谷雲九曲) 등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그것을 조선 산천에서 실현하고자 한 이상주의적 은일사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 지식인들은 이와 같은 자존적 주체의식을 토대로 한 엄격한 자기 관리와 진보적인 제도 개혁을 통해 국방력과 경제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하는 한편, 사상과 문화 방면에 있어서도 조선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한껏 드러낸 독자적 진경문화를 이룩하게 된다. 이러한 조선 중화사상과 문화적 자존의식은 이후 현실을 더욱 개선하고자 하는 개혁의식인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집약되어 현실주의적인 진경산수와 함께 그 절정기를 이룬다.

 

특히 18세기 후반 영·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지라학과 천문학의 발달로 중국 중심의 화이론을 극복하게 되고 이는 억지로 명나라 계승의 명분론을 빌리지 않고도 조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자부할 수 있는 현실주의 적 사고가 더욱 발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의 정조는 조선 중화사상에 입각한 조선 중심의 자존적 주체의식을 기본 이념으로 설정하여 이를 더욱 고양시키는 한편 중국과 서양의 문물까지도 선별적으로나마 적극 수용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문화를 이룩한다는 조선 중심의 다원적 문화정책을 추구하였다. 정조대를 전후한 진경풍속은 바로 이와 같은 다원적 문화 의식과 정책을 토대로 이루어질 수 있던 것이다.

 

조선의 진경산수화의 이념을 성리학 특히 조선성리학보는 견해와 더불어 실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18세기 미술에 보이는 새로운 사실적인 측면은 자주의식에서 기인했다기보다는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영향으로 생겨난 현실인식, 다시 말해면 중국에서 실학이 전래됨에 따라 일어난 새로운 경향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의 성리학을 자주적인 학문보다도 사변적이고 이상적인 학문이라고 보고 이를 극복하고자 발생한 실학을 진경산수의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실학 또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전개된 것이지만 더 실천적이고 서학과도 관련되어 있어 반드시 주자학에서 출발하였다고는 볼 수 없음을 말한다.

 

18세기 정선이나 조영석고 같은 문인화가들이 새로운 실학적 사고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주위의 실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실학 사조의 반영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는 진경산수를 무슨 국가의식보다는 실제적인 필요성이나 시각에서 주변을 둘러본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런 점이 당시 일부 실학자들이 보인 국토지기에 대한 관심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작가나 예술가들은 새로운 사조에 민감하므로 중국의 새로운 실학 문예사조에 착안하여 그것을 한국적으로 변형하고 한국의 문물을 대상으로 하여 표현하는 진경산수로 이어진다는 견해이다. 즉 실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에서 한국적 경물들을 택하였고 그만큼 한국화에 성공하였으며 따라서 중국적인 배경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라 보고 있다.

 

진경산수화의 의의와 한계점

 

한국미술사에서 조선 후기 회화의 찬란한 업적은, 먼저 조선풍의 고전적 전형을 완성한 점이다. 우리의 땅과 삶을 담은 그릇으로 민족적 형식을 이룩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조선풍의 독창성을 이끌어 내었다는데 있다. 물론 중국 회화에 대한 영향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감화에서 벗어나 조선의 화가가 조선을 그리는 양식이 확립된 것이다.

 

더불어 이 시기는 회화의 창작뿐만 아니라 소비와 비평 등의 활동도 전대와 달리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며, 가장 큰 변화로는 회화가 기존의 잡기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심신을 수양하는 하나의 예로 간주된 점이다. 이는 중인에 속하는 화가들뿐만 아니라 선비 계층에서도 회화가 널리 통용되고 그들에 의해 사상적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 배경이 된다.

 

이러한 18세기의 토대로 한 회회 수준의 유지나 시민계급으로 성장할 문화적 향수층의 새로운 생활감정과 취미, 보수성과 봉건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형성, 지역특성을 살린 지역화단과 공예문화의 융성 등 그나마 근대성을 이끌어낼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18세기를 통해 발전해온 회화는 19세기에 가서는 창작과 소비관계의 증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형식에서 근대성과 거리가 먼 모순을 지니고 있다. 낡은 형식에 안주하려 했던 19세기 문화의 진취적이지 못한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풍속화나 진경산수화가 근대적 사실주의로 변모하지 못한 데는 그 회화 장르 자체가 지니는 봉건적 성격에도 작용하였다. 그런데다 격동기의 사대부나 새로 부상한 향수층의 안목과 미의식이 18세기에 못 미친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19세기의 선비 화가들은 신분적 위상의 크게 흔들리는 변혁기에서 보수적인데 집착한 결과 형식주의로 치닫게 되는 결과를 초래 하게 된다. 이는 다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자주적 발전이 저지되고 식민지를 경험하며 그 성과와 한계를 명확히 진단하면서 올곧게 계승하지 못하였다. 특히 18세기 호화의 사실주의 정신이 근대적 성과로 전승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한편, 20세기 이후 우리의 현실 사실주의는 서구 조형론에 밀려 조선 후기 회화와 정상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역사적 한계를 지니게 된다.

 

'진경(眞境)'은 신선이 사는 곳, 깨끗한 땅이라는 의미를 가졌고 '진(眞)'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선인이 변형해 놓고 하늘에 오른 땅"의 뜻을 지녔다. 이로보아 진경은 실경으로서의 단순한 경치뿐만 아니라 선경(仙境)의 의미까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다음카페 '예술향기'에서>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