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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는 ...왜 전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일까?

작성자그림9|작성시간12.03.24|조회수123 목록 댓글 0

안동에는 ...왜 전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일까?


[조탑리 5층전탑]



안동에는 다른 지역에 없는 벽돌로 된 탑이 많이 모여 있다. 벽돌로 된 탑을 전탑(塼塔)이라고 하는데, 유독 안동에 모여 있어서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탑을 흉내낸 석탑을 모전탑 (模塼塔)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안동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 별로 없는 전탑의 형식이 안동에서 주로 발견되고 또 주변에 그것을 흉내낸 탑들조차 많이 모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 신앙과 예배 대상물의 핵심은 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리(舍利)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탑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탑의 형태나 재료 그리고 자리잡은 위치는 특별한 뜻을 지닌다.

인도에서 사발을 엎어놓은 듯 둥글고 크게 쌓아올려 내부공간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해두고 예배하던 것이 중국에 전해져 높고 웅장한 목탑으로 발전하였고, 다시 불에 탈 염려도 없고 견고한 벽돌로 탑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축조되는 과정의 애로와 탑 안에서 예배하던 것이 생략되는 형식적 탑이 조성되면서 오늘날 같이 높고 장엄 형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풍부한 화강암 석재의 견고함과 돌을 다듬어 장식을 할 수 있는 장점을 취하여 일반적 으로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인해 '석탑의 나라'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독 안동에서는 쌓기도 힘들고 재료도 손쉽지 않은 벽돌을 소재로 해서 만든 전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불교의 전래과정이나 재료의 어려움으로 보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안동에 왜 전탑이 많이 모여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우선 가설 몇 가지를 추려두고 거기에서 근거를 찾아봐야 하겠다.


첫 번째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으리라는 가설을 들 수 있다. 부석사·봉정사를 비롯한 화엄종찰(華嚴宗刹)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첨단사상을 유학한 의상이 신진유학을 쫓는 여러 승려들을 모아들여 화엄종을 열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전탑 형식을 도입하여 집중적으로 탑을 조성하였으리라는 가설 이다.

그러나 의상이 창건하여 중심사찰로 썼던 부석사·봉정사등에서는 전탑이 존재하지 않고 그 밖의 사찰에서도 전탑이 유행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의상이 확립한 화엄사상은 말 그대로 중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체적으로 정립되어 있어 중국과의 교류에고 불구하고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당시 사정으로 봐서도 불교 종파에 의해 전탑이 도입 발전되었다는 근거는 희박해진다. 하지만 의상에서 비롯된 화엄종의 영향권 안에 있는 안동지역에서, 건립시기 또한 통일신라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전탑이 축조되고 있어 좀더 규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신라 불교의 중심인 경주에 유행하지 않던 전탑이 안동에 유독 널리 분포된 것은 경쟁 관계에 있던 안동지방 불교세력의 개성있는 조탑 양식이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안동지방 에 화엄종파의 특별한 의도가 드러난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본다.



두 번째




소재성에 근거하여 훌륭한 화강암 석재와 벽돌 이외의 탑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전탑을 세웠으리라는 가설이 있다. 비교적 구하기 쉬운 낙동강을 낀 퇴적암지대의 양질의 점토와 강모래를 이용한 벽돌을 사용하였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아직까지 벽돌을 구운 대형의 그 시대의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고, 또 특별히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한 재료가 이곳에서만 존재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이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세 번째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에 특별히 영향을 입어 강안에 전탑을 집중해서 조성했으리라는 가설을 들 수 있다. 이 가설을 도선(도선;827∼898)과 연결되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이 지방 사찰의 창건신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풍수사상에 따른 비보사찰과 탑의 축조가 빈번히 등장 하고 있으며, 탑의 축조시기 또한 같은 시기에 겹쳐있어 이러한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강안에 집중되어 있는 점과 풍수지리설에 따른 전탑 축조라 하여도 꼭 벽돌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아 이 가설도 역시 의문의 여지가 있다.



네 번째




충분한 재력을 갖춘 토착세력과 중국을 비롯한 전조문화권(塼造文化圈)과의 빈번한 교류에 따른 벽돌공을 비롯한 장인들의 솜씨에 의해서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안동의 전탑들




개관




탑은 목탑, 전탑, 석탑으로 구분되지만, 우리나라 탑의 대부분은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목탑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전탑 또한 전국에 몇기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그 희귀한 전탑이 대부분 안동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특별한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돌을 벽돌 모양 잘라서 쌓은 모전탑 조차 안동 인근에 집중 분포되어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는데, 이런 안동의 전탑 집중현상과 인근지역의 모전탑 분포현상은 이해가 쉽지 않다.

불교의 전승경로나 조탑의 발전과정으로 봐서도 다른 지역을 거쳐서 받아들였을 이곳 안동의 전탑 축조는 많은 의문을 남긴다.

원래 우리나라에는 순수한 벽돌 건축물이 없는 편이다. 기껏 담벽이나 굴뚝같은 곳에 장식적 요소로만 사용되었고, 궁전이나 사찰의 벽과 바닥에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역시 벽돌이 비 생산적이고 마땅한 경제성을 지니지 못했음을 뜻한다. 또 안동같이 토질이 사질박토(砂質薄土) 였을때는 더 더욱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이곳에 전탑을 집중적으로 조성하여 발전시켰다는 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경제성과 생산성을 지니지 못한 벽돌을 사용하여, 다른 조탑 형식에 비해서도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가능한 전탑을 축조했다는 것은 신앙심과 정신문화에 대한 애착심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타 지역에 없는 전탑 유물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런점에서 각별한 의미와 독특한 개성을 지닌다 하겠다.

원시무속 신앙시대 때 부터 성주신의 본향으로 알려져 왔고, 전통 제의나 뿌리깊은 민속문화의 끈질긴 전승력에서도 특별한 문화적 특성을 지녀왔던 곳이 바로 안동이다. 그러므로,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독특한 개성을 갖고 정착.수용하고 발전하였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점은 이후 유교문화시대에도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불교문화가 왕성한 시대에 그 시대의 신앙과 문화의 대표적 유물인 전탑이 이 곳 안동에 집중적으로 잔존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의 상징적 문화 유산을 남긴다는 의미와 함께 불교문화의 핵심지였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1)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경상북도 안동시 동부동 소재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높이 8.35m. 보물 제56호 후세의 보수로 인하여 기단부가 상당히 변형된듯하나 현재는 높이 약 42cm의 화강석 3단을 쌓아 기단을 삼았다. 탑신부부터는 27.5 × 12.5cm 에 두께 6cm의 무문전을 사용하였고 옥신부에는 우주형의 표현이 없고 옥개부의 처마 너비는 좁아졌다.

옥신에는 각 층에 감실이 개설되었는데, 초층 남면에는 높이 47cm, 너비 55cm의 테두리를 화강석으로 만들어 감실을 삼았고 2층의 4면과 3층의 남면에는 높이가 전재 2매 두께인 형식적인 감실이 개설되었는데, 특히 2층 남면에는 2구의 인왕상을 조각한 화강판석을 끼우는 이례적인 표현을 하였다.

옥개석의 받침수는 초층부터 10단.8단.6단.4단.3단으로 체감되었고 낙수면에는 처마끝에 목제의 연함을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혔다. 상륜부는 전실되었고 지금은 연화가 조각된 복발형 석재가 얹혀 있다.

이 전탑은 <동국여지승람>이 나 <영가지>에 기록된 법림사전탑으로 추정되며 가까운 거리에 당간지주가 전하고 있으나 寺址는 안동역 구내에 편입되었다. <영가지>에는 법림사전탑이 7층이라는 점,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했다는 점, 상륜부는 법흥사탑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萬曆 戊戌인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현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추정된다.

또한, 안동지방에는 특히 전탑이 다수 전하고 있으며 기록에 보이는 전탑까지 합하면 10여개에 달하고 있음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한편, 안동과 인접한 지역에서 모전석탑이 다수 건립되었음도 주목 할만하다.



(2)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경상북도 안동시 신세동 소재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높이 17m. 국보 제16호. 한국 최고 최대의 전탑. 기단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이고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 또는 사천왕상을 양각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나,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서로 제작연대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고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지 의문이다.

또한, 단층 기단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을 배치한 예는 없다. 탑신부는 각 층을 길이 약 28cm, 너비 약 14cm, 두께 약 6cm의 회흑색 무문전으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 옥신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서 작은 감실을 개설하였는데,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cm의 방형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1층 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고층인데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감축되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단.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차츰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면 당초에는 각 층 낙수면에 모두 기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탑은 목탑을 번안한 것임을 보여준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에 기록된 '부동 5리'에 있다는 법흥사전탑'이 이 전탑에 비정되고 있으니, 만약 그렇다면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탑은 1487년(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


(3) 안동 조탑동 오층 전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조탑리 소재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높이 8.65m. 보물 제57호. 조탑리 들판 한가운데 탑만 서 있을 뿐 주위에는 寺址로 추정할만한 유물은 볼 수 없다. 이 전탑의 특징은 제 1층 옥신을 화강석으로 축조하였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석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일변 약 7M의 얕은 토축기단 중앙에 탑신을 받치기 위한 1변 약 2.65m, 높이 약 49cm의 화강석 5단의 굄돌을 마련하였다. 초층 옥신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을 5단 내지 6단을 쌓았는데, 상단은 폭이 약간 줄어들었다. 남면에는 좌우에 반원형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맛돌을 얹어 높이 66.5cm, 너비 50cm의 감실을 개설하고 내부 중앙에는 23×24.5cm의 각형 목심주가 남아 있다.

특히, 감실 입구 좌우에는 인왕상을 조각한 화강석 판석을 벽에 끼워넣었다. 제1층 옥개부터는 일변 27cm, 두께 5.5cm의 방형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제1층 옥개에 사용한 벽돌 중에는 주연에 연주문을 두르고 그 안에 당초문을 양각한 것이 포함되어 있어 아마 창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용된 벽돌들은 제조시기를 달리하는 여러가지가 섞여 있어 여러 차례의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각 층 옥개는 벽돌 한 장 두께로 처마를 삼고 제1층 옥개만은 하단, 즉 옥신 위에 벽돌 두장을 쌓아 굄을 삼았다. 옥개 밑의 받침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3단이며, 낙수면의 층단수는 초층부터 7단.5단.4단.3단이다. 옥신은 제1층의 높이에 비하여2층 이상은 급격히 감축되었고, 2층부터의 체감률은 경미하여 안정감이 있다. 또, 제2층과 제4층 옥신 남면에는 각각 극히 형식적인 감형이 있어 그 형식이 안동시 동부동 오층전탑과 상통하는 바 있다.

제4층 옥신에 비하여 제5층 옥신의 높이가 높아졌고 사용된 벽돌도 서로 달라서 후세의 수리 때의 변형으로 보인다.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옥개 낙수면에 기와가 없으나 원래는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안동 시내 2기의 전탑이 모두 조선시대에 보수 된 바 있으므로 이 탑도 그러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근에는 1917년의 수리 이후에도 여러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거치는 동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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