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 이서(李曙)·이귀(李貴)·김유(金瑬)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뒤의 인조) 종(倧)을 왕으로 세운 정변.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들이 1623년 3월 12일 무력으로 궁을 점령하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 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추대했다. 당시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에야 이 사실을 알고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 보내졌다.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西宮)에 유폐(幽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攽)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광해조 대북정권 몰락의 원인을 정책의 패륜성에서도 찾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당시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야기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인정권은 북인을 도태시키면서도,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명분상 하자가 없는 남인을 크게 등용함으로써 반대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고등 한국사 <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 조선의 대외 관계와 양난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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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仁祖反正)
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모제(異母弟)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특히 임해군은 선조의 맏아들로서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명나라에서 임해군를 즉위시키려 했으며, 소북파인 유영경(柳永慶) 등 일부 대신들도 선조의 교서를 숨기고 임해군를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으나, 정인홍 등에 의해 유영경의 교서를 숨긴 사실이 들어나, 임해군은 광해군에 의해 진도로 유배된 후 강화의 교동에 옮겨져서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李而狀)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즉,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즉,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 등의 10명은 1등공신,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공신,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8명은 3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차석찬의 역사창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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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검정터, 조선중기 인조반정을 모의했던 곳
세검정은 서울 성곽 북서문에 해당되는 창의문 바깥에 위치한 작은 정자이다. 서울 도심과 가장 가까운 아름다운 계곡인 백사실계곡에서 흘러내려온 홍제천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중기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옹립한 반군세력들이 거사를 모의한 장소로 잘 알려져 있으며, 거사 후 이 곳에서 칼을 물로 씻었다는 것에서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정자가 언제부터 처음으로 세워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가장 최근의 기록으로는 영조때인 1748년에 새로 고치면서 세검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그 뒤 194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세금정 부근 홍제천은 옛날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다고 하며, 실록의 편찬이 끝난 뒤 사초들을 모아서 이 곳에서 씻는 세초작업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서울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변 바위에 세워진 세검정. 'T'자형의 모양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이 정자는 1977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하며, 옛 그림에서 묘사된 것을 참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세금정 아래의 큰 바위와 홍제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인 백사실계곡에허 맑은 물이 흘러내르는 명승지였다고 하며, 이 곳에서 조선시대에 실록편찬 작업이 끝난 후 사초를 씻는 세초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세금정 앞을 흐르는 홍제천과 세검정
여러 방향에서 본 세검정
19세기 화가 유숙이 그린 세검정 풍경.
세검정은 홍제천 일대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저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여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1748년에 고쳐 지으면서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세검정이라는 이름은 칼을 씻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건물은 194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림의 세검정은 정자 뒤로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길 쪽에 문이 있으며, 개울쪽으로도 작은 문이 있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숙종대에 북한산성과 서울 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건설하는 등 이 일대가 서울의 북방관문으로서 중요성이 커지면서 무신들의 휴식처로 자주 이용되었다. 또한 부근에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가 있어서 실록의 편찬이 끝나면 사용한 종이를 씻는 세초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세검정 터는 경치가 좋은 계곡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즐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잘 엿볼 수 있는 곳이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던 서울의 도성 밖 경승지이다. < 출처:서울시청>
.......................다음카페 '서울시민연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