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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죽인 두 여장부 논개와 계월향

작성자그림9|작성시간15.02.04|조회수791 목록 댓글 1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죽인 두 여장부 논개와 계월향

 

  

 

논개 1574년~1593년

 

논개는, 정조있는 여성 중 대표적으로 꼽힙니다.

 

논개는 원래 양반가 출신이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이 몰락 위기에 처하자 최경회의 후처, 즉 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후 최경회가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열심히 싸우다가 전사하게 됩니다.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기생들을 데리고 축석루에서 연회를 벌이는데, 이 때 논개는 지아비인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연회에 참석합니다.

 

논개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왜장을 꾀어 함께 남강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후 논개가 왜장과 올라갔던 바위는 의암으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논개(論介, ?∼1593)는 진주목의 관기로 임진왜란 중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이긴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을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이다.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면서부터이며,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논개의 충성심은 이미 의심할 바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의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의기 논개가 공식적인 호칭이 된 때는 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이다. 이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고, 매년 논개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다.

논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일명 장계) 주촌(朱村)마을이다. 이곳에 논개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장수읍 두산리에 의암사(義巖祠)라는 논개사당과 논개의 수명비(竪名碑)가 세워져 있다. 한편,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의 당산 뒤편 골짜기에 있다. 최근 사적지로 지정되어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장수와 함양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논개의 일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네 살 나던 해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길을 떠났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 장사 지낼 요량으로 운구해오다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

논개의 생애

남해안 임진왜란 전적지를 찾아서

1) 출생지와 가문

전라도 지역의 역사서들은 논개를 장수군 태생임을 강조하였다. 1846년 조정은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논개의 출생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계내면 대곡리 주촌이 유력해 보인다.

논개의 가문에 대한 것은 지역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구전되어 오던 것이 최근 공개되었다. 즉 논개의 성은 朱氏이며, 본관은 신안이다. 부는 주달문, 모는 함양박씨, 숙부는 주달무라 한다. 주달문은 한학에 밝았고, 향리에서 청년 자제들의 훈학에 종사한 선비였다고 한다. 따라서 논개는 천한 신분이 아닌 양가여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개의 출생 연월 일시가 1574년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갑술이었으므로 술은 개 戌이라서 '놓은 개(낳은 개)'라 하여 '논개'라 이름하였다 한다.

2) 논개의 애인은 누구였는가.

논개의 애인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 부사 황진과 우병사 최경회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황진설은 장지연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황진이 장수 황씨로 남원부 주포리 산내촌에서 태어나 1593년 충청 병사가 되었다가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황진은 본관이 장수라는 것과 장수와 인접한 남원 출생이라는 점 외에 장수와 인연을 맺은 적이 없다.

최경회설은 논개가 진주로 가게된 동기를 최경회의 사랑을 받아서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하자 이를 따라 들어간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경회와 논개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최경회가 장수현감 시절 논개의 송사 사건 해결과 관련을 지우고 있다. 논개의 숙부가 논개를 인근의 김씨 문중의 민며느리로 팔아버리자 함양 안의현 외가로 도망했다가 붙잡혀 송사에 연루되었으나 최경회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고, 돌아갈 곳 없는 논개의 모녀를 최경회가 데리고 있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민간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를 1589년으로 보아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역사서에 의해 증명되는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는 1577년경 이어서 시기 차이가 크다. 따라서 최경회와 논개의 관계는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한 1593년 4월부터 6월 사이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논개가 끌어안고 죽었던 왜장은 누구인가.

대체적인 견해는 가등청정의 부하로 조선에 건너와 진주성 공격의 선봉대장이었던 '毛谷村六助'라 한다. 이는 일본에서 유명했던 검객으로서 적국 미녀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무덤이 없었으며, 1974년 九州의 유지들이 건축사 上塚博勇을 파견하여 진주의 흙을 가져다가 九州英彦山麓에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4) 논개와 의암 바위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새겨진 '義巖'이란 글씨는 정대융의 글씨라 전해진다. 정대융은 임란시 함경도 의병장이던 정문부의 차자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던 선비였다. 인조 2년 1월 정문부가 무고로 피해되자, 그의 유명에 따라 형 정대영과 함께 다음 해 진주로 이거하였다. 따라서 의암이라는 글씨를 쓴 것은 인조 3년(1625) 이후이다. 그리고 효종 2년(1651)에 오두인이 의암이 쓰여진 바위를 보고 「義巖記」를 쓰는 것으로 봐 1625년에서 1651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즉 논개가 순국하고 난 30여년 후에 의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논개의 순국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논개의 순국사실이 진주 지역민들에 의해 확고한 사실로 인식되어졌음을 증명해 준다.

5) 논개의 무덤은 어디 있는가.

최근에 논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하여 논란이 많은데, 발견된 곳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이다. 함양 지역에는 조선 후기 이후 신안 주씨들이 유력 양반 사족으로서 상당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 문중이었다. 그리고 서상면 방지리는 논개의 부모가 일시 웅거했다고 전해지는 지역이다. 그리고 논개의 출생지인 주촌마을과 고개를 넘어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그 타당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6) 논개의 순국 사실은 어떻게 증명되었는가.

논개의 치적에 대해서 진주민들은 입으로 전하였지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경종 원년(1721)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 지역의 士民들의 요구로 ≪어우야담≫과 '義巖'이라 새겨진 글자를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때 당(唐)의 왕씨 여인을 숭의부인에 봉했듯이 논개도 이에 상응하는 봉작을 베풀고, 진주성 함락시 전몰한 제신들과 같이 사당을 건립하고, 왕이 사액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1722년 비변사로부터 논개의 순국사실이 담긴 문적을 조사 보고하라는 지시에 따라 公金과 사전을 공동으로 염출해서 「義巖事蹟碑銘」을 건립했다. 이 비명의 내용을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이에 정부는 논개의 순국사실을 인정하고 논개의 자손에게 포상하기 위해 이들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논개의 자손을 찾을 수 없어 결국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최진한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지만 계속해서 논개 포상을 요구하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논개 포상 건의는 영조 14년(1738) 남덕하가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민들의 요구는 모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영조 16년(1740) 6월에 義妓祠 건립을 허가 받았다. 의기사는 그 후 정조 3년(1779)에 우병사 홍화보가 처음으로 보수하였고 정약용이 논개를 추모하는 「矗石樓懷古詩」, 「晉州義妓祠記」를 지었다. 그후 의기사는 퇴락했고, 다시 순조 23년(1823) 목사 홍백순과 경상감사 이지연이 중건했다.

이때 그동안 지내왔던 6월 29일제를 폐지하고 춘추상제를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고종 5년(1868)에 목사 정현석이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가무를 곁들인 의암별제는 300명의 女妓가 연 삼일간 치제하는 화려한 대제전이었다
 
 
논개의 생애 요약

1574년(1살)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탄생.

1578년(5살)
부친 주달문 사망후,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됨.

1579년(6살)
이른봄,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
김씨 부인의 배려로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됨.
늦가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감.

1582년(9살)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자 따라감

1587년(14살)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때 수행함.

1590년(17살)
최경회의 부실이 됨.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서 기다림.

1592년(19살)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로 와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의병 훈련 뒷바라지함.

1593년(20살)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함.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한 뒤,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 순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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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월향은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의 첩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부장 소서비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신은

자결하였습니다.


왜장을 죽이고 자결한 기생 계월향에 얽힌 이야기.

의열사는 계월향의 의열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매년 봄·가을에 평양 기생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계월향평양 기생으로 본명은 월선(月仙)이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이 함락되어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때 평양 기생 계월향도 포로로 잡히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인 고니시(小西飛)의 진중에 있게 되었다. 고니시는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가까이 두려고 했으나 계월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계월향은 죽을 것을 결심하였는데, 문득 “혼자 죽어 무엇하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난 이후 고니시의 부장 소서비 장군을 가까이 대하여 그의 애첩이 되었다.

원래 계월향에게는 사모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김응서라는 평양의 순별 초관이었다. 평양성이 함락되자 김응서는 용강, 강서 등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평양성 밖 대동간 서편에서 진을 치고 날마다 평양 서문 쪽으로 와서 정찰을 했다. 계월향은 이를 알고 미리 세워둔 계획을 실천하기로 하고, 성 밖 김응서에게 비밀리에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며칠 후 계월향은 소서비에게 같이 연을 날리고 싶다고 청을 하여 서문으로 그를 유인하였다. 때마침 김응서가 이곳을 지나니, 이는 사실 계월향과 김응서 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계월향은 “장군님! 저기 지나는 이가 네 오라버니이옵니다. 이번 난으로 서로 헤어졌는데 이곳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부디 한 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라고 간곡히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서비는 애첩 계월향의 뜻을 들어주고 이 둘을 성 안에 같이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 안에서 큰 잔치를 벌어졌는데 계월향은 소서비에게 계속 술을 먹여서 만취하게 하였다. 소서비는 그런 계월향의 의중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계월향은 마냥 벙긋벙긋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이키는 소서비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남다른 각오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저녁 소서비는 무거운 몸뚱어리를 이끌고 마침내 잠이 들었다. 계월향은 안팎의 동태를 살피어 문 밖으로 신호를 보내 방안으로 김응서를 불러 들였다. 그는 바람처럼 몰래 들어와 단숨에 소서비를 죽여 버렸다. 그 뒤 김응서는 도망가고 계월향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계월향 일화는 논개처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전쟁에 맞선 여인들의 모습을 잘 알려주는 일화이다

 

조선 중기의 평양 명기.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敵將)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신은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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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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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카방 | 작성시간 15.02.04 아~~가슴 짠하게 읽고 갑니다.
    정보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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