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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사건

향교의 발전과 폐단

작성자그림9|작성시간08.07.10|조회수489 목록 댓글 0

향교(鄕校)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여왔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와 같이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려는 의도에 의하여 학교가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고려시대 전 시기를 통하여 유교 교육이 행해져 왔음은 분명하다.(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28-37쪽 참조) 고려사 인종 20년(1142)에 "시험에 응시하는 지방 학생들은 계수관 향교의 도회(매년 여름 지방에서 치른 인재를 뽑는 모임)에서 증명을 해주도록 했다."는 기록에서 향교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인종 5년(1127)에 전국의 주에 향학을 세우도록 조서를 내린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향교와 비슷한 교육기관이 설립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설립된 향교가 무신집권기와 몽고간섭기에 제대로 운영이 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 지방관과 유생의 노력으로 그 기능이 회복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왕조가 세워진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에 전도되었던 민중의 사고를 바꾸기 위해서는 유교이념보급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는 왕조가 시작하자마자(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按廉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써 지방관 고과(考課)의 기준을 삼는다고 할 정도로 향교의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329개의 고을에 향교가 건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향교의 급속한 보급은 고려시대의 향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고려 인종 때 교동, 태안, 보안등의 속현까지도 향교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는 이미 전국에 향교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려시대사람들 이야기/31쪽)

 

조선시대의 관학의 체계는 중앙에 성균관을 두고 서울에 4학과 지방의 향교를 두는 체제로 되어있다. 지방의 향교도 관찰사가 있는 곳과 부와 군,현으로 구분하여 규모를 달리하였다. 향교의 기본구조는 제향공간祭享空間과 강학공간講學空間으로 나뉘는데 이것은 향교의 목적이 교육 외에도 성현에 대한 제사기능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중시하는 유교에서 제례는 가장 중요한 규범이므로 관학에서는 강학보다 우선되었다.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배치를 보면 제향공간이 앞으로 나오고 강학공간이 뒤에 배치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향교의 기본배치이다. 그러나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곳에 중요한 건물을 배치하는 개념이 존중되어 제향공간이 뒤에 있고 강학공간이 앞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가 일반적이다. 특이한 경우로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좌우로 병렬배치하는 경우도 있다.(밀양향교, 돌산향교 등)

 

조선시대 초기부터 국가주도로 각 군, 현에 설치된 향교는 초기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교수의 확보의 문제는 심각하였다. 태종 때부터 큰 읍에는 과거에 합격한 관리를 교수관으로 파견하고 교수가 파견되지 못한 군, 현에는 각 도의 관찰사가 학장을 선발하여 향교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한국의 향교/67쪽)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보면 정기시험이 3년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 선발되는 인원이 33명이다. 1등인 장원급제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직책이 종 6품의 관직인데 이것이 도호부에 파견되는 교수의 직급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전체 군, 현의 수가 300여 개소에 달하고 보니 실제적으로 파견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추구하는 급제자가 지방으로 가는 것을 꺼리게 되다보니 급기야는 문신좌천자文臣左遷者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관학은 퇴조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9대 성종 때는 관학의 쇠퇴현상을 놓고 신하들 사이에 큰 논란이 벌어졌고,(조선시대서원연구/12쪽) 11대 중종 때에는 어느 경전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군역을 면하기 위하여 교관직을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고, 13대 명종 조에는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사람을 학장으로 명하는 정책이 제시되기도 하였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향교) 관학의 퇴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향교에서의 교육을 기피하게 만들었다. 즉 조선조 초기부터 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역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수 차례의 관학 진흥책을 펼쳤지만 실패하고 결국 영조 때에 이르러 <속대전>에서 향교의 모든 교관은 없어지게 됨으로서 공식적으로 교관을 포기하게 되었다.(상기서/향교) 이로서 공식적으로 향교에서 교육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교육의 기능을 다시 살리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왔다. 조선 후기에 들어 지방관에 의하여 교육기능을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향교의 부속으로 양사재養士齋를 운영하는데 흥학재興學齋, 육영재育英齋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기관은 별도의 자산으로 운영되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서 향교내 또는 향교와 가까운 곳에 건립하였다. 이것도 경제적인 문제와 지방관의 관심부족으로 사라져갔다. 이후에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것이 사마재이다. 사마재는 서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초시합격자 즉 진사나 생원들의 교육장소로 이용되었다. 사마재는 초시합격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양사재보다는 상급교육기관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도 얼마 되지 않아 진사와 생원의 모임처로 전락하고 말았다.(한국의 향교/100쪽)

 

교육의 기능이 사라진 향교는 제향기능과 민간교화기능을 중심으로 활동해나갔다. 향교는 음력 2월과 8월 첫번째 열리는 석전釋奠이라는 제향기능을 중심으로 향촌사회에서 양반가의 구심점으로 자리잡게 된다. 문묘에 제사를 드리는 석전은 유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지방관이 초헌관으로 참석하고 석전이 끝나면 지방유림의 여론을 지방관에게 전달하거나 석전이 끝난 뒤 교임 등을 선출하기 때문에 향촌에서는 가장 큰 집회행사였다.(한국의 향교/96쪽) 따라서 향교에서 지방의 유림에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할 수 있는 자리이므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사족들이 향교를 중심으로 향약을 통해 지방을 장악하였고, 인재를 추천하는 향사례鄕射禮나 학덕이 높은 사람을 모시고 잔치를 베푸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통하여 일반인들을 교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향교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향교가 교육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례중심의 공간으로 변화되자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되게 되었다. 가장 많은 폐단은 교생을 돈을 받고 파는 행위이다. 향교의 교생은 초기에는 양반 양인의 구분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은 양인 자제이상이면 모두가 향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고려시대의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려시대 사람이야기/37쪽) 향교의 교생수는 읍의 크기에 따라 제한되어 있었다. 향교의 교생이 되면 군역이 면제되고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등 특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므로 향교의 교생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이 있었다. 당시 양반들은 군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군역의 대상이었던 양인들이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돈과 신역身役을 제공하고 향교에 적을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부정이 행해진 것은 향교가 많은 돈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제공한 토지로는 집을 새로 짓는다든지 할 때 필요한 돈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돈과 노동력이 필요한 향교의 처지와 양인의 욕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부정인 것이다.

 

이러한 정원 외의 교생을 액외교생額外校生이라고 하는데 많을 경우에는 정원의 수십 배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액외교생은 노역 면제의 특권 때문에 향교에 상주하면서 노역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교생이 되는 경우도 있고 원납願納이라는 명목으로 거금을 내고 액외교생으로 등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양반가문의 보수화로 인해 초기에 구분이 없었던 동재와 서재 학생의 구분도 생겼다. 동재에는 양반자제인 유생이 기거하였고 서재에는 평민으로서 額內校生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액외교생의 증가는 국가재정에 큰 문제가 됨으로서 모든 교생에게 시험을 치루어 합격하지 못하면 군역에 포함시키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돈을 내고 시험을 보지 않는 사람이 증가하자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도 가난한 사람의 구제에 필요한 재정확보를 위하여 공식적으로 면강첩(免講帖)을 발행하는 등 국가에서 주도하여 면강첩을 발행함으로써 시험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원납이나 면강첩은 후기 향교 재정수입에 큰 몫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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