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역사속사건

조선시대 내시들의 삶

작성자그림9|작성시간08.07.28|조회수506 목록 댓글 0

 조선시대 내시의 삶

 

내시는 왕을 가까이 모신 관계로 그들 중에는 공신이 된 자가 매우 많았다. 내시 출신의 대표적인 공신으로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와 정난 공신과 좌익공신 2등에 각각 책록된 하음군 전균, 성종조 남이 장군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 1등에 책록 된 흥양 군 신운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또 중종 즉위에 공을 세운 정국공신 4등에 6명, 선조의 피난을 도운 공으로 호성 공신 3등에 24명이라는 많은 내시가 책록 된 바 있다.

 

공신이 되면 많은 사패 지(나라에서 내려준 땅)를 받았으므로 내시는 전국 각지에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가 많았다. 또한 공신이 되면 위패를 영구히 옮기지 않고 부조묘라는 사당에 모실 수 있는 특전이 있었다. 심지어 시호를 받은 인물까지 있었으니, 고려조에는 영원부원군에 봉해진 신소봉이 충희공에 봉해진 예가 있고, 조선조에는 세조의 즉위를 도와 2개 공신에 각각 봉해진 하음군 전균이 양경공에 봉해진 예가 있다.

 

고려 때의 권신 환관 방신우는 그의 공덕을 기록한 비석과 영정을 봉안한 사당까지 국가에서 건립하기도 했다. 노원구 월계 2동 향천사의 박점순 보살에 의하면, "내시들도 사당이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내시들은 자신의 고향이 승격되는 영예를 받은 경우까지 있었다. 일찍이 왕후의 고향을 승격하거나 역적의 고향을 강봉하는 경우는 흔히 있었지만, 일개 내시의 고향을 승격하는 것은 예외 중의 예외였다. 비록 지체 높은 사대부라 하더라도 그가 태어난 고을을 승격한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왕실과 조정에서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는 중국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칙사로서 무리한 요구를 했으므로 조선 왕실과 조정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우왕 13년(1387)에 이신의 고향 평창군이 지군사로 승격된 기록이 있고, ≪고려사지리지≫엔 충렬왕 때에 이대순의 고향인 소태현을 지태안군사로 승격시킨 예가 있다. 이런 폐습은 조선 초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 3년(1403)에 주윤단의 고향인 임주군을 승격하여 부(府)로 삼고, 한첩목아의 고향인 김제현을 승격하여 지군(知郡)을 삼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성종은 재위 14년(1483)에 명나라 황실에서 봉사했다가 돌아와 90세로 죽은 윤봉의 공을 생각하여 그의 고향인 서흥현을 부로 승격시킴은 물론 친히 제문을 지어 내리고, 좌찬성 허종을 빈소에 보내 제사를 지내주게 했다.

 

보통 최고 관리인 영의정이 죽어도 왕의 비서실 관리격인 승지를 보내는 것이 관례인데, 예외적으로 종1품인 좌찬성을 보낸 것은 그가 자신의 신하가 아닌 황제의 신하였고 과거에 칙사로 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명종조에는 상약 노익겸이 어느 날 왕이 계단에서 갑자기 넘어지려할 때 달려와 붙잡아주었다고 해서 왕이 친히 가자(加資: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에 올려줌)한 예가 있다. 또 선조조 내시 이봉정은 자신을 위해 왕이 직접 부채에다 쓴 율시를 하사 받은 사례도 있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 내시들에 대한 왕실의 예우가 각별했고, 그들의 권력과 자부심 또한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시도 일반 사대부나 평민과 마찬가지로 부인과 자녀를 두고 결혼 생활을 했는데 사대부와 같이 첩도 두었고, 아내가 죽으면 새로 재혼을 하여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을 맞는 경우까지 있었다. 내시의 아내로는 평민뿐 아니라 왕실과 줄을 대려는 양반 사대부 가문의 규수도 많았다. 내시의 부인은 사대부의 부인과 같이 남편의 품계에 따라 정경부인(1품)·정부인(2품) 등 높은 봉작을 받기도 했다. 내시의 아내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많은 전토와 노비, 금은보화 등 그야말로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적 불구자인 남편과의 잠자리만은 불만이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내시 아내들은 이런 성적 욕구를 취미 생활을 통해 해소하기도 했으나 일부는 외간남자와 정을 통해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밖에 환관촌의 내시 아내들끼리의 동성애도 성행했는데, 이를 속칭 '대식(對食)'이라 했다. 대식 관계가 이루어지면 서방님, 마님 하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대식 연인끼리 손을 묶고 나란히 목매어 정사한 사례도 있었다. 원로 향토사학자인 김동복 씨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나라 내시는 정낭만을 제거해 그래도 성관계는 가능했다고 한다. 내시의 아내는 남편과 성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수건으로 내시의 입을 동여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은 내시가 관계를 시작하면 감정이 절정에 달하는데 사정이 안 되어 괴로워서 아내의 목덜미와 어깨를 사정없이 문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결혼 생활을 6개월 이상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비교적 천한 출신으로서 권력과 풍요로운 삶 모두를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씨 없는 남자'로서의 그들의 애환은 안타까움 그 이상이었다. 환관들은 어떤 물건이 없다거나 부족한 것에 대해 아주 민감했다. 예를 들어 꼬리가 없는 개를 보더라도 꼬리 없다 혹은 꼬리가 끊어졌다고 하지 않고, 사슴 꼬리를 가진 개라는 식으로 비유해서 말했다. 그들은 '자른다'라는 말에 대단히 민감해서 자른다 대신 '찌른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환관들끼리만 통하는 환관 특수용어가 통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술 때 잘려나간 성기와 고환은 어떻게 했을까? 내시의 절단한 양물을 고승이라 부르는데, 이는 주인인 내시보다 높다는 뜻이다. 수술 후 절단된 남근은 썩는 것을 예방하고, 피와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횟가루가 담긴 그릇 속에 넣었다가 젖은 수건으로 깨끗이 닦은 후, 다시 참기름 속에 넣어두었다. 참기름이 다 스며들고 나면 그것을 작은 헝겊 주머니 속에 있는 '목갑' 속에 넣고 잘 밀봉했다. 이후 길일을 택하여 수술받은 환관의 사랑에 모시는데, 반드시 대들보 위에 놓았다. 그러다 그 내시가 죽으면 대들보 위에서 그 목갑을 내려 죽은 환관의 육신에 원래대로 바늘로 기워 맸다. 이는 죽은 환관이 온전한 남자가 되어 구중천에 가서도 떳떳한 신분으로 조상님을 만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출처 :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박상진, 가람기획, 2007.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