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esign.co.kr/D/d200003/html/aca170.htm
타이포그래피는 유리잔과 같아야 한다” 비어트리스 워드
글/최성민(<디자인|텍스트> 동인)
‘투명한’ 타이포그래피.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은 결국 관습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통적인 서적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잘 구현하면서 개성을 내세우지 않는 미덕을 보인다. 전통적이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외양을 모방하려고 인위적인 장식을 가하지는 않았다. 좌측 정렬로 오른쪽을 흘린 본문 세팅도 이러한 무형식적인 느낌을 더해 준다. Fred Smeijers, Counterpunch: Making Type in the Sixteenth Century, Designing Typefaces Now (London: Hyphen Press, 1996). 220 x 145 mm. 192 pp. 반양장본. 서체: Renard. 디자이너: Fred Smeijers
‘투명해 보이는’ 타이포그래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위스를 중심으로 개발된 새로운 모더니즘은 질서와 명료성을 형태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추구하여, 오히려 독서에 지장을 주는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 책은, 비록 1990년대 말에 발표된 것이지만 스위스 모더니즘의 독단적인 특징들을 일부 보여 준다. 광택이 심한 종이와 지나치게 작고 가는 활자 등은 한 폭의 단아한 그림으로 보기에는 좋을 지 모르나, 읽기 위한 타이포그래피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Franc Nunoo-Quarcoo, Bruno Monguzzi: a Designer’s Perspective (Baltimore County: The Fine Arts Gallery, University of Maryland, 1998). 230 x 150 mm. 200 pp. 반양장본. 서체: Monotype Grotesk. 디자이너: Bruno Monguzzi
‘불투명한’ 타이포그래피. 90년대에 서구에서는 ‘해체’ 타이포그래피가 투명성이라는 가치를 집중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이 어차피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원래부터’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타이포그래피의 형식적 요소들을 왜곡하고 과장하여 이러한 비판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Emigre (No.34, 1995). 285 x 210 mm. 64 pp. 중철본. 서체: Arbitrary, Platelet. 디자이너: Ludy VanderLans
투명성의 귀환.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거치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의 실험이 성과와 한계를 모두 드러내면서 타이포그래피의 합리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합리성이 반드시 과거 모더니즘의 ‘위생적’인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관습화된 투명성의 조건들을 위배하거나 변형시키면서도, 독자를 존중하고 독자와 대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대표적인 디자이너가 바로 네덜란드의 카렐 마르텐스(Karel Martens)이다. 이 책 역시 명쾌성을 유지하면서도 교조적인 모더니즘의 원리를 위배하는 특징들(굵은 활자, 좁은 여백, 본문의 강조를 회색으로 처리하는 방법 등)을 잘 보여준다. Frederike Huygen & Hugues Boekraad, Wim Crouwel: Mode en Module (Rotterdam: Uitgeverij 010, 1998). 230 x 175 mm. 432 pp. 반양장본. 서체: Univers. 디자이너: Karel Martens & Jaap van Triest
황금잔과 유리잔
눈 앞에 좋은 와인 한 병과 두 개의 잔이 있다. 하나는 호사스럽게 장식된 황금잔이고, 또 하나는 수수하고 투명한 유리잔이다. 아무거나 골라 와인을 따라 보라. 어떤 잔을 고르냐에 따라 와인에 대한 조예가 판가름 날 것이다. 와인을 모르는 자, 즉 와인의 색과 향과 맛에 관심이 없는 자라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황금잔을 선택할 것이다. 반대로, 와인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자라면 내용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투명한 유리잔을 선택할 것이다.
이 은유를 창안한 비어트리스 워드(Beatrice Warde, 1900~1969)는 미국 출신의 타이포그래피 역사가 겸 비평가였다. 남편과 함께 1925년에 유럽으로 건너온 그녀는, 영국의 중요한 타이포그래피 저널 <플러런(The Fleuron)>에 폴 부종(Paul Beaujon)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얻은 평판에 힘입어 1927년에는 <모노타입 레코더(Monotype Recorder)> 지의 편집장에 임명되었다. 그녀의 명쾌하고 재치 있는 비평은 남성 중심적인 영국 타이포그래피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글월로 발표된 비평도 그렇지만 그녀의 지성은 오히려 말을 할 때, 즉 아무 준비 없이 연설을 할 때 더욱 빛을 발했다고 한다. 아무리 즉흥적으로 마련된 자리라 해도 40분 정도는 청중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니 말이다.
이 유명한 ‘유리잔’ 은유 역시 1932년에 런던의 영국 타이포그래퍼 길드(‘타이포그래픽 디자이너 협회’의 전신)에서 했던 연설에서 나온 것이다. 유명한 은유라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생소한 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의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유리잔’은 가장 자주 인용되고 논의되는 은유 중 하나이지만, 우리에게는 ‘비어트리스 워드’라는 이름만큼이나 낯선 은유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 은유가 한국의 디자인계에 유포되어야 할 당위성은 전혀 없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유리잔이라는 사물 자체가 익숙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와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이 은유가 함축하는 의미는 한번 제대로 음미해 볼 만하다.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
워드가 유리잔을 빌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는 분명하다. 타이포그래피는 황금 잔처럼 화려한 외양으로 내용물을 감추어서는 안 되고 유리잔처럼 투명하게 내용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교과서적인 원리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타이포그래피가 장식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모더니즘적 명제에 미묘한 차원을 더해 준다.
투명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령, 어떤 책이 투명하게 디자인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곧, 독자가 그 책을 읽으면서 지면에서 아무런 시각적 저항이나 자극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 독자는 일단 책을 덮으면 지면의 모양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 독자는 주어진 책의 지면에서 어떤 새로움도, 또 어떤 좋고 나쁜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불투명하게 디자인된 책은 독자에게 지면의 형식을 일차적으로 지각시키며, 독자가 지면 다음으로 텍스트의 내용에 접근하는 길목에서 꾸준히 자신의 물리적, 시각적 존재를 환기시켜 줄 것이다. 지면의 구체적인 형식이 독자에게 거부감을 주건 쾌감을 주건 간에, 일단 내용에 앞서 형식이 느껴졌다는 점에서 그 책은 불투명한 것이고, 워드의 기준으로 보자면 잘못 디자인된 것이다.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는 특정한 조형적 질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잠시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자. 비어트리스 워드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19세기 말 영국과 유럽의 타이포그래피는 객관성과 명료성보다는 주관성과 표현성을 중시하는 아르 누보의 지배를 받았다. 윌리엄 모리스의 켈름스코트 프레스(Kelmscott Press)를 필두로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사립 출판 운동이나 순수 인쇄(fine printing) 운동 역시 좋은 재료와 우아한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호사스러운 책을 물신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워드가 “극도로 정교한 패턴으로 장식된 황금 잔”을 언급할 때 염두에 두었던 표적이 무엇인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그렇지만 워드가 말하는 ‘유리잔’이 반드시 위에서 거론한 표현적 타이포그래피에 반대하며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오히려 모더니즘의 기하학적이고 원소적인 형태가, 투명해지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새로워 보였을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모더니즘의 주요 과학적 근거 중 하나였던 가독성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실험실의 연구에 따르면, 14포인트의 굵은 산세리프 활자로 인쇄된 지면이 11포인트의 배스커빌 체로 인쇄된 것보다 읽기 쉽다. 연설자가 고함을 칠 때 더 듣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연설에서 좋은 목소리는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 그런 목소리이다. 말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굳이 인식이 되지 않는 목소리가 좋은 목소리인 것처럼, 잘 짜인 활자는 ‘활자’로 보이지 않는다.”
유리잔의 가치
비어트리스 워드가 이 연설을 한 후부터, ‘유리잔’은 여러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투명한 타이포그래피의 도덕적 가치는 인쇄업계나 교육계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모더니즘의 헤게모니가 비교적 잘 정착한 후에도 최소한 책이라는 제한된 독서 영역은 꾸준히 유리잔을 지향했고, 이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편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위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는 도발적인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정리하고 광고나 잡지 등의 새로운 영역에서 투명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일어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도 이 유리잔은 전선의 한가운데에 서서 두 진영 모두의 전략을 좌우했다.
그렇지만 투명한 타이포그래피라는 가치는 역시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상대적인 가치임이 분명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굳이 롤랑 바르트나 자크 데리다를 읽을 필요는 없다. 워드가 예로 드는 배스커빌 역시 발표된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읽기 어렵다는 반응을 얻었던 활자체이다. 반면, 오늘날 읽기 어려운 활자체로 꼽히는 중세 유럽의 블랙 레터(흔히 헤비메탈 음반 재킷에서 볼 수 있는 활자)가 당대에는 가장 ‘투명한’ 활자체였다. 이러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은 특정한 형식 자체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독서 공동체의 관습과 습관에 의해, 그것도 아주 잠정적으로 불완전하게만 유지될 수 있는 성질이며,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독서 공동체의 현실이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타이포그래피가 특정한 형식과 원리에 집착하여 전반적인 의사소통을 경색시키고 있다면, 이에는 새로운 조치를 제안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타이포그래피가 사회적 의사소통에 봉사한다는 윤리적 전제에 동의할 때의 이야기이다. 시장에서의 일시적 이익을 겨냥한 진귀한 자극의 폭격은, 정체된 디자인이 야기하는 불감증 못지않게 해로운 감수성의 과잉 각성 효과를 낳을 것이다. 또한 디자이너가 독자를 볼모로 지극히 사적인 실험을 지나치게 자주 행하는 것 역시 귀한 사회적 비용의 낭비를 초래할 것이다.
‘효율성’ ‘신속성’ ‘정확성’과 같은 관료적인 구호들이 합리적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편집증적으로 묘사하는 데 반해, 비어트리스 워드가 제안한 맑고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근사한 와인은 훨씬 청량하고 여유 있는 상상을 제공한다. (물론, 그윽한 소주 한 잔을 상상해도 상관없다) 전통주의건 모더니즘이건 특정한 양식 자체를 신성시하거나 죄악시하는 태도만 버린다면, 그녀가 남긴 유리잔의 이상은 소중한 유산으로서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한 말에 따르면, “투명한 유리잔을 고안하기 위해 오랜 시간 행복한 실험을 거듭하는 것은 인간 정신이라는 소중한 와인을 보존하기 위한”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최성민 1971년 생. 1995년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원을 수료했다. 1996년에는 이미지드롬에서, 1997년에는 동부정보시스템에서 디이너로 일했다. 현재 1999년 가을에 창간한 <디자인|텍스트>의 편집동인으로 활동중이다.
타이포그래피는 유리잔과 같아야 한다” 비어트리스 워드
글/최성민(<디자인|텍스트> 동인)
‘투명한’ 타이포그래피.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은 결국 관습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통적인 서적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잘 구현하면서 개성을 내세우지 않는 미덕을 보인다. 전통적이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외양을 모방하려고 인위적인 장식을 가하지는 않았다. 좌측 정렬로 오른쪽을 흘린 본문 세팅도 이러한 무형식적인 느낌을 더해 준다. Fred Smeijers, Counterpunch: Making Type in the Sixteenth Century, Designing Typefaces Now (London: Hyphen Press, 1996). 220 x 145 mm. 192 pp. 반양장본. 서체: Renard. 디자이너: Fred Smeijers
‘투명해 보이는’ 타이포그래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위스를 중심으로 개발된 새로운 모더니즘은 질서와 명료성을 형태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추구하여, 오히려 독서에 지장을 주는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 책은, 비록 1990년대 말에 발표된 것이지만 스위스 모더니즘의 독단적인 특징들을 일부 보여 준다. 광택이 심한 종이와 지나치게 작고 가는 활자 등은 한 폭의 단아한 그림으로 보기에는 좋을 지 모르나, 읽기 위한 타이포그래피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Franc Nunoo-Quarcoo, Bruno Monguzzi: a Designer’s Perspective (Baltimore County: The Fine Arts Gallery, University of Maryland, 1998). 230 x 150 mm. 200 pp. 반양장본. 서체: Monotype Grotesk. 디자이너: Bruno Monguzzi
‘불투명한’ 타이포그래피. 90년대에 서구에서는 ‘해체’ 타이포그래피가 투명성이라는 가치를 집중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이 어차피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원래부터’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타이포그래피의 형식적 요소들을 왜곡하고 과장하여 이러한 비판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Emigre (No.34, 1995). 285 x 210 mm. 64 pp. 중철본. 서체: Arbitrary, Platelet. 디자이너: Ludy VanderLans
투명성의 귀환.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거치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의 실험이 성과와 한계를 모두 드러내면서 타이포그래피의 합리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합리성이 반드시 과거 모더니즘의 ‘위생적’인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관습화된 투명성의 조건들을 위배하거나 변형시키면서도, 독자를 존중하고 독자와 대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대표적인 디자이너가 바로 네덜란드의 카렐 마르텐스(Karel Martens)이다. 이 책 역시 명쾌성을 유지하면서도 교조적인 모더니즘의 원리를 위배하는 특징들(굵은 활자, 좁은 여백, 본문의 강조를 회색으로 처리하는 방법 등)을 잘 보여준다. Frederike Huygen & Hugues Boekraad, Wim Crouwel: Mode en Module (Rotterdam: Uitgeverij 010, 1998). 230 x 175 mm. 432 pp. 반양장본. 서체: Univers. 디자이너: Karel Martens & Jaap van Triest
황금잔과 유리잔
눈 앞에 좋은 와인 한 병과 두 개의 잔이 있다. 하나는 호사스럽게 장식된 황금잔이고, 또 하나는 수수하고 투명한 유리잔이다. 아무거나 골라 와인을 따라 보라. 어떤 잔을 고르냐에 따라 와인에 대한 조예가 판가름 날 것이다. 와인을 모르는 자, 즉 와인의 색과 향과 맛에 관심이 없는 자라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황금잔을 선택할 것이다. 반대로, 와인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자라면 내용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투명한 유리잔을 선택할 것이다.
이 은유를 창안한 비어트리스 워드(Beatrice Warde, 1900~1969)는 미국 출신의 타이포그래피 역사가 겸 비평가였다. 남편과 함께 1925년에 유럽으로 건너온 그녀는, 영국의 중요한 타이포그래피 저널 <플러런(The Fleuron)>에 폴 부종(Paul Beaujon)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얻은 평판에 힘입어 1927년에는 <모노타입 레코더(Monotype Recorder)> 지의 편집장에 임명되었다. 그녀의 명쾌하고 재치 있는 비평은 남성 중심적인 영국 타이포그래피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글월로 발표된 비평도 그렇지만 그녀의 지성은 오히려 말을 할 때, 즉 아무 준비 없이 연설을 할 때 더욱 빛을 발했다고 한다. 아무리 즉흥적으로 마련된 자리라 해도 40분 정도는 청중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니 말이다.
이 유명한 ‘유리잔’ 은유 역시 1932년에 런던의 영국 타이포그래퍼 길드(‘타이포그래픽 디자이너 협회’의 전신)에서 했던 연설에서 나온 것이다. 유명한 은유라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생소한 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의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유리잔’은 가장 자주 인용되고 논의되는 은유 중 하나이지만, 우리에게는 ‘비어트리스 워드’라는 이름만큼이나 낯선 은유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 은유가 한국의 디자인계에 유포되어야 할 당위성은 전혀 없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유리잔이라는 사물 자체가 익숙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와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이 은유가 함축하는 의미는 한번 제대로 음미해 볼 만하다.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
워드가 유리잔을 빌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는 분명하다. 타이포그래피는 황금 잔처럼 화려한 외양으로 내용물을 감추어서는 안 되고 유리잔처럼 투명하게 내용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교과서적인 원리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타이포그래피가 장식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모더니즘적 명제에 미묘한 차원을 더해 준다.
투명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령, 어떤 책이 투명하게 디자인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곧, 독자가 그 책을 읽으면서 지면에서 아무런 시각적 저항이나 자극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 독자는 일단 책을 덮으면 지면의 모양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 독자는 주어진 책의 지면에서 어떤 새로움도, 또 어떤 좋고 나쁜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불투명하게 디자인된 책은 독자에게 지면의 형식을 일차적으로 지각시키며, 독자가 지면 다음으로 텍스트의 내용에 접근하는 길목에서 꾸준히 자신의 물리적, 시각적 존재를 환기시켜 줄 것이다. 지면의 구체적인 형식이 독자에게 거부감을 주건 쾌감을 주건 간에, 일단 내용에 앞서 형식이 느껴졌다는 점에서 그 책은 불투명한 것이고, 워드의 기준으로 보자면 잘못 디자인된 것이다.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는 특정한 조형적 질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잠시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자. 비어트리스 워드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19세기 말 영국과 유럽의 타이포그래피는 객관성과 명료성보다는 주관성과 표현성을 중시하는 아르 누보의 지배를 받았다. 윌리엄 모리스의 켈름스코트 프레스(Kelmscott Press)를 필두로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사립 출판 운동이나 순수 인쇄(fine printing) 운동 역시 좋은 재료와 우아한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호사스러운 책을 물신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워드가 “극도로 정교한 패턴으로 장식된 황금 잔”을 언급할 때 염두에 두었던 표적이 무엇인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그렇지만 워드가 말하는 ‘유리잔’이 반드시 위에서 거론한 표현적 타이포그래피에 반대하며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오히려 모더니즘의 기하학적이고 원소적인 형태가, 투명해지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새로워 보였을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모더니즘의 주요 과학적 근거 중 하나였던 가독성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실험실의 연구에 따르면, 14포인트의 굵은 산세리프 활자로 인쇄된 지면이 11포인트의 배스커빌 체로 인쇄된 것보다 읽기 쉽다. 연설자가 고함을 칠 때 더 듣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연설에서 좋은 목소리는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 그런 목소리이다. 말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굳이 인식이 되지 않는 목소리가 좋은 목소리인 것처럼, 잘 짜인 활자는 ‘활자’로 보이지 않는다.”
유리잔의 가치
비어트리스 워드가 이 연설을 한 후부터, ‘유리잔’은 여러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투명한 타이포그래피의 도덕적 가치는 인쇄업계나 교육계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모더니즘의 헤게모니가 비교적 잘 정착한 후에도 최소한 책이라는 제한된 독서 영역은 꾸준히 유리잔을 지향했고, 이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편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위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는 도발적인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정리하고 광고나 잡지 등의 새로운 영역에서 투명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일어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도 이 유리잔은 전선의 한가운데에 서서 두 진영 모두의 전략을 좌우했다.
그렇지만 투명한 타이포그래피라는 가치는 역시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상대적인 가치임이 분명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굳이 롤랑 바르트나 자크 데리다를 읽을 필요는 없다. 워드가 예로 드는 배스커빌 역시 발표된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읽기 어렵다는 반응을 얻었던 활자체이다. 반면, 오늘날 읽기 어려운 활자체로 꼽히는 중세 유럽의 블랙 레터(흔히 헤비메탈 음반 재킷에서 볼 수 있는 활자)가 당대에는 가장 ‘투명한’ 활자체였다. 이러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은 특정한 형식 자체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독서 공동체의 관습과 습관에 의해, 그것도 아주 잠정적으로 불완전하게만 유지될 수 있는 성질이며,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독서 공동체의 현실이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타이포그래피가 특정한 형식과 원리에 집착하여 전반적인 의사소통을 경색시키고 있다면, 이에는 새로운 조치를 제안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타이포그래피가 사회적 의사소통에 봉사한다는 윤리적 전제에 동의할 때의 이야기이다. 시장에서의 일시적 이익을 겨냥한 진귀한 자극의 폭격은, 정체된 디자인이 야기하는 불감증 못지않게 해로운 감수성의 과잉 각성 효과를 낳을 것이다. 또한 디자이너가 독자를 볼모로 지극히 사적인 실험을 지나치게 자주 행하는 것 역시 귀한 사회적 비용의 낭비를 초래할 것이다.
‘효율성’ ‘신속성’ ‘정확성’과 같은 관료적인 구호들이 합리적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편집증적으로 묘사하는 데 반해, 비어트리스 워드가 제안한 맑고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근사한 와인은 훨씬 청량하고 여유 있는 상상을 제공한다. (물론, 그윽한 소주 한 잔을 상상해도 상관없다) 전통주의건 모더니즘이건 특정한 양식 자체를 신성시하거나 죄악시하는 태도만 버린다면, 그녀가 남긴 유리잔의 이상은 소중한 유산으로서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한 말에 따르면, “투명한 유리잔을 고안하기 위해 오랜 시간 행복한 실험을 거듭하는 것은 인간 정신이라는 소중한 와인을 보존하기 위한”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최성민 1971년 생. 1995년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원을 수료했다. 1996년에는 이미지드롬에서, 1997년에는 동부정보시스템에서 디이너로 일했다. 현재 1999년 가을에 창간한 <디자인|텍스트>의 편집동인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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