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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불교의 신앙대상은 무엇인가?

작성자정석준|작성시간11.07.19|조회수408 목록 댓글 1

  <논단>                          

             불교의 신앙대상은 무엇인가?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믿음이 있으면 종교요, 믿음이 없으면 철학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도 물론 믿음이 있으며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 경전인『화엄경에서는“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가 되어서 일체 선근을 심어준다."라고 하였으며,『법화경에서도“믿음으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종교의 생명이며 본질입니다. 그르면 불교는 무엇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첫번째, 부처님(佛)과 보살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하느님','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같이 불교에서는 '부처님',‘보살님'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의미는 매우 다릅니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신(기독교의 여호와 신, 회교의 알라 신 등)이 있어서 그 신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고 있으므로 그 신을 잘 믿으면 살아서는 소원을 성취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세계[천국]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창조신이나 주재신(主宰神)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고 인연에 의하여 사라진다는 인과법으로 존재의 원리[법칙]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법이 인연따라 일어나고 인연따라 사라진다면 여기에 신이 존재할 여지는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선각자(先覺者)이지 창조자나 주재신은 아니며, 보살님들은 깨달음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세우고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신앙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신행(信行) 또는 신봉(信奉)이라는 말을 쓰며, 이는 금강경 등 여러 대승불교경전의 신수봉행(信受奉行)이라는 말을 간추려 쓴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도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부처님, 동방 정유리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 부처님, 미래 세계에 오신다는 미륵부처님 등 많은 부처님이 계시고, 또 문수보살.보현보살.관세음보살.지장보살.대세지보살 등, 많은 보살님들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중생구제를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들 부처님이나 보살님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아뇩다라삼막삼보리(위 없는 바른 깨달음)'  이루고, 그 지혜로서 과거.현재. 미래의 3세와 한량없는 우주 공관을 두루 살펴보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부처님, 보살님을 신봉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 보살님을 신봉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와 같이 지구상에 태어나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서 잘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그는 신인가 인간인가, 혹은 신이면서 인간인가, 아니면 신과 인간의 개념을 넘어선 전혀 새로운 존재인가? 이런 물음은 꽤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던 듯, 불교사상가들은 이런 문제에 대답하기 위하여 퍽이나 장황하고 교묘한 이론들을 제시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법신(法身: 진리 그 자체이신 부처님), 보신(報身: 수행의 과보로 성취한 원만 구족하신 부처님), 화신(化身: 중생제도를 위하여 낱낱의 모습으로 화현하시는 부처님)등 삼신(三身)사상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가운데서도 특히 법신설(法身說)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부처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공덕과 신통(神通)을 묘사하기 위하여 쓸 수 있는 온갖 상상력을 다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전개는 불교의 보편화와 불법의 심화를 위해서 마땅히 요청되는 역사적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당연한 결과로써 석가모니 부처님의 비인격화.비인간화라는 중대하고도 본질적인 변절과 손실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과 출가와 성도와 교화와 열반이 이미 예정된 드라마에 불과하다는 경(經)의 말씀을 들을 때 중생제도라는 그 크나큰 본원(本願)앞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한편 무언가 따뜻한 체온을 교류할 수 있는 정다운 친구를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부처님이 이미 신격화 되어버린 이상, 이왕 신을 찾을 바엔 그 이미지와 능력이 보다 분명하고 강력한‘여호와',‘알라’신을 택하려는 오늘의 한국인들의 이기적 선호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석가모니 그는 누구인가? 이 미묘한 물음에 석가모니 자신의 대답은 매우 확실하고 간결합니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하여, 늙고 병들고 죽지 않으면 안 될 몸이면서 늙음과 병듬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 그대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하여,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환난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될 몸이면서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환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장아함경.27-15)

  석가모니 그는 사람입니다. 나와 더불어 포근한 체온을 공유하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사람만이 진실로 사람의 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뭇 왕들이 그의 발아래 예배하는 세존(世尊)으로서 홀로 높기를 원하지 않고 다정다감한 인간으로서 나와 당신의 범상(凡常)한 행렬에 동참하기를 갈망하는 우리들의 친구, 길동무인 것입니다. 그는 나와 당신과 더불어 기쁨도 함께하고 아픔도 함께하며 생(生)도 함께하며 사(死)도 함께 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수고도 예정된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적인 가책과 연민의 아픔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유루(有漏)냐, 무루(無漏)냐? 곧 인간적인 번민이나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가 교학상의 주요 쟁점이 되어 왔고“부처님은 무루다. 절대완전하다."라고 결론이 나 있지만 석가모니의 완전 무루성은 바로 지극한 인간성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각각타(自覺覺他)의 행을 몸소 실천하는 사생(四生)의 자비로우신 어버이요, 인천(人天)의 큰 스승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은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불보(佛寶)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두번째,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범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합니다. 다르마는 원래 사물의 이치.진상.법칙.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불교에서 이를 채용한 것으로 불교에서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의 교법(敎法)'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따라 다른 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행복의 길, 참된 삶의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이 길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인간은 신의 창조로 이루어 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신이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인간이란 결국 신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필요 즉, 쓰임새에 따라 만들어 지고 있듯이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인간의 의지보다는 오직 신의 섭리, 신의 눈치만 보고 살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과 그 대가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물주인 신의 뜻에 의해서만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면,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이며 불합리한 일입니까? 부처님은 최초로 인간을 신의 종속에서 해방시킨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우리 중생들을 구제하시고자 80 평생을 하루도 쉬지 않고 법을 펼치셨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을 경전, 또는 불경.일체경;대장경.팔만대장경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법[경전] 인간이 괴로움(苦)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법보(法寶)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승(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승을 범어로는 상가(Samgha)라고 하는데, 이를 음역하여 승가라고도 하며 간략하게 승이라고도 하고, 화할 화(和) 무리 중(衆)자를 써서 화합중(和合衆) 또는 화합승려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불자들이 화합하는 것이 마치 여러 강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지만 바닷물의 맛은 한가지인 것에 비유해서 바다 해(海), 무리 중(衆)자를 써서 해중(海衆)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승이란 화기애애하게 모여 사는 부처님의 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제자란 단순히 스님들만이 아니고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부대중이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가리키는데, 이 중 비구.비구니는 출가한 남.여 스님이며, 우바새.우바이는 재가 남.여 신도입니다. 이 처럼 승가는 출가 승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리 출가 2중과 재가 2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승가 즉 스님들과 신도들을 승보(僧寶)라고 하는데, 왜 승(僧)을 보배라고 하는가 하면 승가가 있음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홍포하고 후세에 까지 불법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승가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부처님을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들을 승보라 하여 부처님과 똑같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재가 신도라도 부처님의 정법을 바르게 깨닫고 이를 널리 전하는데 노력하는 사람은 삼보의 하나인 승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스님들을 존경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신도님들 가운데서도 남의 모범이 되는 불자는 다같이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법.승 이 세 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제자(僧)를 한 덩어리로 똑같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불어 이 세 가지 보물을 밖으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운데서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청정한 근본자성이 바로 불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불성은 부처와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조 혜능대사는“깨달으면 부처요 미(迷)하면 중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성 가운데의 불보를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이 소중한 보배를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성품이 보배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품이 온갖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역시 6조 혜능스님은“선지식아 일체 수다라와 모든 문자로 된 12부 경전이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세워진 것이니, 만일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일체만법이 본래 제 스스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4대 육신 가운데서 승보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육신을 천대하지만 이 육신을 떠나서는 부처도, 법도 간직할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서도 이 육신이 있어야 하므로 승보요, 갖가지 인연이 모여서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잘 움직이는 이 육신이야 말로 참으로 화합이 잘 이루어진 승보인 것입니다.  

  삼보에 대한 귀의를 삼귀의라고 하는데,『율장대품』에 의하면 그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거듭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듭 가르침에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귀의 합니다.”

  왜 세 번을 반복하여 귀의토록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삼보에의 귀의야 말로 불교 신앙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삼귀의를 귀명(歸命) 삼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목숨을 바쳐 삼보에 귀의 한다는 뜻으로서, 삼보에 자기의 전 인생과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마음가짐을 말 합니다.

                         (불기 2540. 8. 경주불교학생연합회 하계수련대회/ 감산 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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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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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진언 | 작성시간 11.10.09 스님들이 스님은 시비의 대상이 아니라고하는데, 대형교회에서 주님의 종을 대적치말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게 있어서
    이럴 때는 좀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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