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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향토사

법화사

작성자제주큰동산|작성시간11.01.04|조회수281 목록 댓글 0

 

법 화 사

 

 

  제주도기념물 제 13호로 지정(1971년 8월 26일) 되어 있는 법화사지는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제주도의 남쪽에서 조금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유적의 표고는 160~ 175m이다. 이 유적은 1982년 이래로 모두 8차례에 걸쳐 발굴이 진행되었다.

 

 

 

 

 - 창건

 

  법화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상적으로 ‘법화경’을 근본으로 삼아 발전된 불교사상의 하나인 법화사상에 기초를 두었던 사찰이었다. 중국의 지의에 의해 체계화된 법화사상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통일신라에 들어와서 이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혜공왕 때의 법륭(法融)의 영향으로 천태종의 성격을 띤 법화사상이 유행하여 고려로 전승되어 나갔다. 특히, 고려 후기의 천태종은 백련사계와 묘련사계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법화사에 미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법화사는 백련사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은 문헌 기록의 제약 등으로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법화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 태종 6년(1406) 4월 경진조에 명나라 사신 황엄ㆍ한첩목아 등이 원나라 때 양공이 만든 미타삼존불을 가져가기 위해서 온다. 황엄이 직접 제주에 와서 취하려는 것을 임금이 군신들과 의논하여 명황제가 탐라의 형세를 살피려는 의도가 있을지 모르니 김도생과 박한으로 하여금 급히 가서 가져오게 하여 나주에서 인도하였다.

 

  다음 기록은 수정사와 법화사에 소속된 노비의 수를 대대적으로 줄인다는 태종 8년(1408)의 기록이다. 법화사에는 노비가 280명이 있는데 다른 절의 예에 따라 30명만 두고 나머지는 전농사(典農寺)에 소속시킬 것을 명한다.

 

  1977년 『완도군지』에 의하면 “서귀포와 완도 불치등(佛嗤嶝)‘에 장보고 장군이 귀국하여 각각 법화사를 ’그 자신의 소속 종파인 천태종의 종지 선양(宣揚)과 신라 문화의 해외진출로 외교상 우위 점거를 목적으로 창건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박영희(‘90년 조사 당시 99세의 노승으로 주로 해남 대흥사에 기거하였으며 1991년 사망)씨가 소장한 『해암입당순례기』라는 책자를 인용한 것이라는데 책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 중국 영성시 석도진의 적산 법화원에 세워진 비문에도 장보고가 그의 본원 사찰로서 석도의 적산, 완도의 상황봉, 제주도 등에 법화원을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 비보사찰

 

  법화사는 비보사찰이다. ‘비보(裨補)’란 불력으로써 지덕을 비보하여서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혼란한 사회사상에서 등장한 도참설과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찰의 입지도 전 국토적인 차원에서 계획하고 운영되었다. 태조의 훈요십조에 잘 나타나 있다. 비보사찰에는 승과에 급제한 승계를 받은 고급 승려가 파견되고, 사원전과 노비를 국가로부터 지급받았다. 개인적인 사찰의 경우는 원당(願堂)이라하여 그 성격이 달랐다.

 

 

- 중창

 

1992년 법화사 발굴에서 “...始重創十六年己卯畢” 라 쓰여진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1997년 제7차 발굴에서는 “至元六年己已始..”란 명문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이를 연결하면 ‘지원 6년 기사년에 중창을 시작하여 지원 16년 기묘년에 끝냈다고 해석이 된다. 따라서 법화사 중창은 원종 10(1269)에 시작하여 충렬왕 5년(1279)에 마무리되었음이 명백하다.

 

 

  법화사의 와당 명문에서와 같이, 1269년(원종10)에 중창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원의 탐라국 통치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원은 세계대제국 건설을 위하여 일본과 남송 정벌을 모색하고 있었다. 즉, 원은 정벌에 이용될 1,000척 외에 따로 10척의 선박을 탐라에서 건조하도록 조치하였다(원종 9년 10월, 1268). 그리고 원의 세조는 탈타아(脫朶兒), 왕국창(王國昌)등을 보내어 탐라 등지의 해로를 탐사토록 하였다(원종 10년 7월 1269). 이러한 조치는 정벌에 필요한 점함의 일부를 탐라에서 얻고자 한 것이며, 해로탐사는 정벌시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후 1270년(원종11)에는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와서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고, 제주에서 대몽 항쟁을 전개하고 있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직후인 1273년(원종 14) 6월 원은 제주 지역의 통할을 위하여 탐라국초토사를 설치하였다. 이 관부는 1275년 (충렬왕 원년) 경에 군민도달노화적총관부로 개편되었고, 이때부터 원에서는 제주 지역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그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법화사의 중창은 이러한 원의 제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법화사는 원이 제주를 남종 및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한 1269년 이전, 언제인가 창건되어 있다가 제주에 원의 힘이 미치면서 법화사도 중창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법화사지에서는 고려시대 때 왕실 건축 건물 이외에 는 사용이 금지된 것이었고, 또한 몽골 콩두미 궁전에서 발굴된 막새와 유형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원 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다고 판단되는 용과 봉황문 막새도 출토되었다. 또한 출토 청자도 대부분 질이 좋으며 고급품이 법화사에 다수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청자의 중심 연대는 13세기이다.

 

 

 

 

 

  법화사의 위상은 원 황실의 원찰임과 동시에, 제주에 거주했던 상당수 몽골족이 찾아왔었던 종교적 안식처였다. 뿐만 아니라 몽골족과 결혼한 제주 여자 및 그 사이 태어난 반몽골족화의 제주민으로 구성된 몽골족 가족, 또한 토착 주민 등이 함께 종교적 안식처로 찾아왔고, 그 수도 상당하였을 것이다.

 

 

 

 

 

  법화사는 사찰로서 지녔던 자신의 위상을 매래고 몽골족의 제주사회 지배를 뒷받침하는 관아와 같은 기능도 지녔고, 법화사 경내는 원 명망 직전부터 짓던 황제 순제의 피난 궁전터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 폐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법화사는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는데, 승 혜일의 시 ‘법화암가에 물화가 그윽하니, 대를 끌고 솔을 휘두르며 홀로 스스로 논다. 만일 세상 사이에 항상 머무르는 모양을 묻는다면, 배꽃은 어지럽게 떨어지고 물은 달아나 흐른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는 존속한 것으로 보이나, 효종 4년(1653)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법화사는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절터와 나한전 자리의 주춧돌과 섬돌을 살펴보면 모두 크고 정밀하게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였으니 그 전성시에는 굉장하였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지금은 단지 초가 암자 몇 칸만 있다. 그 서쪽에 물 맛이 좋은 샘이 있는데 절 앞에 논에 물을 댄다.’라고 하여 1653년 경에는 법화사는 이미 폐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간에서 이형상 목사가 법화사를 훼사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암자의 형태로 남아 있던 초가를 말하는 것이다. 위의 기록처럼 법화사는 효종 4년 이전에 이미 혁파되었으니 이형상 목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법화사의 재건

 

  화북 출신인 안봉려관니사와 경남 산청출신인 안도월선사법화사 포교소를 열었다. 포교소 시절의 법당 자리는 현 대웅전 서쪽에 보이는 능선상에 동향으로 자리했었다 한다. 그러나 1947년의 4.3사건 당시 중산간 일대의 소개령과 연관하여 헐려버렸다.

  그 후 1950년 6.25동란이 나자 1951년 3월 21일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세워지면서 이곳 법화사지에는 군 숙영소로 사용될 임시 가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 군대의 불도저가 들어와서 사지를 전면적으로 정치하였다. 그 후 1957년 군 숙영소가 철수하게 되면서부터 옛 절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윗체에 목조 슬레이트 지붕의 법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의 정지 작업시에 금당지에서 지대석들이 발견되었다. 주초석은 해체하여 기념으로 보존하고 지대석들은 목조 슬레이트 가설 법당의 댓돌과 기단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 속탐라록 -제주문화방송

                   제주도사연구-제주도사연구회

                   법화사지-서귀포시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진 : 법화사, 제주큰동산, 2010.11.14.15:10,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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